234화. 전승행진
롤랑 가로스가 종료되고 2주 후, 영국 런던.
지혁은 예정대로 1번 탑시드를 배정받고 윔블던에 참가했다.
이번 대회에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 기록이 걸려있는 탓인지 테니스 팬들의 이목은 전부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지혁과 관련된 아주 작은 일조차도 속보로 쓰이며 현재 컨디션과 윔블던의 결과를 사전 예측하는 방송들이 특집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렇게 며칠에 걸친 예선전이 끝나고 시작된 본선 1라운드.
선수들은 푸른색 잔디 코트에 시간에 맞춰 등장했다.
사막처럼 삭막하기 그지없는 롤랑과 비교하면 산뜻한 분위기였다.
경기를 하지 않아서 잔디가 파인 흔적도 없었고 말이다.
이대로 일주일만 지나면 이 코트는 만신창이가 될 테니 지금 많이 즐겨놓아야 한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선수들끼리 친분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기에 경기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서비스게임을 가져간 행운의 주인공은 지혁이었다.
그 대신 코트 선택권이 상대 쪽으로 넘어갔지만 그것보다 서브를 먼저 할 수 있는 이점이 훨씬 큰 터라 문제는 없었다.
[네. 경기가 시작했습니다. 이지혁 선수의 1라운드 상대는 세계 랭킹 37위의 플로리안 마이어입니다. 독일 국적의 베테랑으로 한 때 이름을 꽤 날린 선수죠. 물론 지금도 만만치 않은 실력의 탑랭커구요.]
[아무리 10살이나 더 많은 노장이라고 해도 우리 이지혁 선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롤랑에서 그랬듯이 평범한 탑랭커들 하고는 실력 차이가 비교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나요.]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래도 오늘 경기는 윔블던의 첫 매치이니 워밍업 차원의 경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후반 라운드가 된다면 지금보다 괜찮은 라인업이 저절로 나올 겁니다.]
[오늘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두 선수가 같은 올라운더 스타일인 것에 집중하면 되겠네요. 베이스라이너처럼 지루할 틈은 없겠습니다.]
[마이어는 기복이 심하기로 유명한데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았으면…….]
관중들이나 중계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누구도 마이어가 승리하는 반전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선수의 커리어가 하늘과 땅 수준으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혁은 아직도 전승행진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어떤 측면으로 봐도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쾅!!
[피프틴 러브.]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T존을 때리는 플랫 서브.
하드, 클레이 코트와 다르게 바운드된 공이 낮게 미끄러지자 마이어는 헛스윙을 하며 에이스를 허용했다.
공과 라켓의 거리가 너무 심각할 정도라서 다른 사람들이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쿵!!
[게임 리.]
서비스게임은 정확하게 4번의 서브로 종료되었다.
모든 포인트가 에이스로 마무리된 게임이었다.
저벅저벅.
다음 게임이 짝수가 되자 규칙에 따라 코트를 교체하는 선수들.
이후에 진행된 경기에서 지금의 분위기가 역전되는 일은 없었다.
지혁이 마이어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엄청난 속도로 스코어를 쌓아간 것이다.
서브, 리턴 양쪽 모두 무슨 짓을 해도 위닝샷을 따내지 못하자 마이어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썩어갔다.
그도 나름 세계 랭킹 37위나 되는 중견급 탑랭커라 어딜 가서 무능한 선수 취급을 받지 않았는데 이건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세트 리.]
결국 지혁의 상대인 마이어에게 주어진 1세트의 결과는 6-0, 베이글이었다.
볼 키즈는 마이어의 처참한 심정을 약간이나마 공감하는지 어색한 동작으로 눈치를 보며 움직였다.
‘음…. 서브 실력이 상승한 효과가 확실하네. 서비스게임을 가져오는 게 작년보다 훨씬 수월해졌어. 에이스 빈도가 많이 늘어서 경기 시간이 30% 이상 줄어든 것도 마음에 들고.’
바운드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는 클레이에서 경기를 하다가 잔디 코트를 사용하니 마치 족쇄가 풀린 느낌이다.
역시 4개의 그랜드슬램 중에서 윔블던이 가장 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나달도 여기서는 내 서브를 롤랑처럼 처리하지 못할 거야.’
지혁은 1세트 동안 서브를 시험해보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쩍 상승했다.
세계 랭킹 1위인 자신조차도 리턴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같은 급인 빅4라고 다를 리 있겠는가.
게다가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서 우승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그동안 정체되어있던 피지컬이 롤랑을 기점으로 한계가 풀렸으니까.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지.’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85▲ 신장: 188cm▲
서브(S), 포핸드(S), 백핸드(S), 풋워크(S), 외모(A), 트릭샷(A), 찰나(A+)
[포인트: 70,990]
롤랑 가로스 결승과 윔블던 본선 1라운드의 텀이 2주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시험해본 건 아니었지만 지구력이 몇 단계 올라간 건 확실했다.
연습 경기를 몇 번 하면서 예전이었다면 힘에 부칠 시간이 지나도 여유로웠으니 말이다.
물론 윔블던은 랠리가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다른 그랜드슬램 대회보다 평균적인 플레이 타임이 짧았다.
그래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세트 리.]
[게임 세트. 매치 리.]
지혁의 윔블던 1라운드는 마스터즈 경기와 비슷한 시간으로 끝났다.
이건 세트가 무려 1.5배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게 의미하는 건 마이어가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관중들은 세계 랭킹이 37위나 되는 베테랑조차 어린아이로 만들어버리는 지혁의 실력에 전율하며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
지혁은 1라운드에서 플로리안 마이어를 탈락시키고 결승까지 크게 고생하지 않고 올라갔다.
윔블던에 참가하고 이미 6번이나 경기를 했지만 지금까지 지혁과 대등한 대결을 펼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3-0,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달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느낀 것인지 하나 같이 막막한 표정을 보여줬었다.
그만큼 잔디 코트에서 지혁의 실력은 다른 선수들이 분석과 훈련으로 극복할 수준이 아니었다.
애초에 서브, 스트로크 양쪽에서 약점이 하나도 없는 완전체를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그나마 기대를 걸만한 선수는 작년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이번에 결승에 진출한 머레이였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이지혁 선수의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 기록 달성까지 이제 한 경기만 남았습니다. 윔블던의 우승 트로피가 바로 앞에 있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지금까지 했던 경기들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머레이는 준결승에서 조코비치를 쓰러트리고 왔으니까요. 잔디 코트를 한정으로 한다면 그는 빅4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아요.]
해설들의 말대로 팬들은 머레이를 이번 윔블던에서 지혁의 독주를 막아낼 유일한 대항마라고 생각했다.
─ 너희들은 둘 중에 누가 이길 거라고 봄? 나는 대충 5:5로 생각하고 있는데. 요즘 이지혁이 대세이긴 한데 머레이도 진짜 장난 아니잖아.
─ 우리 지혁이가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3-0으로 찢는 거 못 봤냐? 결승전 상대가 머레이라고 달라질 건 없음. 심지어 나달도 준결승에서 별로 다를 건 없었잖아.
─ 아 머레이한테 밀려서 ATP랭킹 4위로 주저앉은 나달? 재작년이나 작년이면 몰라도 올해는 어느 쪽으로 봐도 머레이가 훨씬 낫지.
─ ㅇㅇ 윗 댓이 뭘 좀 아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라인업이 최강인 것 같음. 여기서 더 좋아지긴 힘들다. 페나조가 대신 뛴다고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오거든.
─ 오 지금 시작한다 빨리 채널에 집중하셈 ㄱㄱㄱ
대기록을 달성하기 직전인 탓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로 유명한 지혁조차 긴장감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이라는 위대한 타이틀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데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는 선수가 어디 있겠는가.
아마 지혁이 아닌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였어도 비슷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쾅!!
머레이의 서브로 시작하는 경기.
191cm와 188cm의 피지컬 괴물들이 경기를 하는 만큼 코트는 시작부터 꽉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기를 보면 어째서 아시아 선수들이 윔블던에서 맥을 못 추는지 어느 정도 알만 했다.
이곳은 구조적으로 신장 170대의 테니스 선수가 우승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테크닉과 인내심만으로 비벼볼 만한 여지가 단 1도 없는 것이다.
타다다다다! 탕!!
코트를 때리는 스트로크의 바운드 하나, 하나가 낮게 깔리며 랠리는 10구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파국이 나왔다.
아무리 탑랭커들 중 최정점에 선 그들이라고 해도 잔디 코트에서 무한정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어진 환경상 경기 템포가 최소 두 박자는 빨랐으니 말이다.
바운드 높이가 낮으니 테이크백과 스윙을 할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서 어쩔 수 없었다.
[게임 머레이 2-1.]
경기는 결승전답게 초반부터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았다.
선수들의 스코어가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누가 우세한지는 뚜렷하게 티가 났다.
한쪽은 개고생을 하며 서비스게임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데 다른 한쪽은 여유롭다 보니 관중들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쿵!!
“크윽….”
역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서브를 처리하기 위해 라켓의 방향을 억지로 바꾸는 머레이.
임팩트가 불안정한 탓인지 머레이는 손목에 적잖은 고통을 느꼈다.
코스와 정확도라도 부족했다면 리턴의 난이도가 훨씬 떨어졌을 텐데 서브의 등급이 S로 오르고 트위스트 서브의 위력까지 동반 상승해버렸다.
[게임 리 3-3.]
그렇게 지혁은 서브를 통해 재미를 톡톡히 봤다.
안 그래도 체력을 포함해서 여러 조건이 유리한데 머레이의 강점인 서브마저도 주도권을 뺏어버린 것이다.
꽈악.
머레이는 타구의 방향을 억지로 바꾸느라 손목과 전완근에 쥐가 났는지 약간의 짬이 생기는 시간마다 주먹을 계속 쥐었다, 폈다했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 지금 상황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가장 자신있어하는 무대에서 열세에 처하는 걸 누가 좋아할까.
[게임 리 5-4.]
결국 조금씩 스노우볼이 구르고 굴러서 지혁은 경기의 균형을 깨고 브레이크를 따냈다.
서서히 낌새가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롤랑에서 나달하고 한 경기에 비하면 너무 쉽네. 뭐, 이게 당연한 거겠지만.’
롤랑을 거의 7~8년을 지배한 나달과 윔블던 고작 한 번 우승한 머레이를 비교한다는 게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다.
다음 서비스게임은 지혁의 차례이니 이제 1세트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머레이가 다음 리턴 차례에 브레이크를 달성하고 복수를 하는 그림은 전혀 가망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세트 리.]
머레이가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하고 1세트를 무력하게 헌납한 것이다.
이건 산술적으로 경기의 1/5이 넘어갔다는 의미였으니 그의 입장에서 상당히 암울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