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전승행진
지혁이 6-4로 승리한 1세트.
그 이후의 경기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윔블던이 홈그라운드인 머레이가 필사적으로 전세를 뒤집으려고 했지만 별 소득 없이 시간이 계속 흐른 것이다.
애초에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여야 불리한 상황에서 동점까지 따라갈 수 있지 지금처럼 격차가 현격한데 의지만으로 원하는 게 될 리가 없었다.
“허억…. 허억….”
심리적 압박과 많은 활동량으로 숨을 헐떡이는 머레이.
그 모습은 땀만 조금 흘리고 있는 지혁과 제대로 대비되었다.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이것보다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게 있을까.
머레이의 승리를 바라던 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남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트 리.]
결국 지혁은 2세트마저도 승리하면서 유리한 분위기를 굳혔다.
세트 스코어 2-0, 역전하기엔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 올해는 앤디가 우승하긴 힘들 것 같네. 도저히 역전할만한 방법이 보이지 않아.”
“그런데 골든 보이가 이 정도로 대단했었나? 윔블던에서 앤디를 이렇게까지 압도한다고? 작년에는 우승을 내줬는데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실력으로 졌다고?”
“…아마도 그때보다 성장한 거겠지. 누가 봐도 경기력이 확실하게 늘었잖아. 특히 서브하고 백핸드.”
“그 당시에도 이미 정상급 선수이지 않았나…. 세계 랭킹도 1~2위를 유지했잖아.”
“뭐든 상대적인 거지. 1위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다는 건 골든 보이보다 더 잘하는 선수가 있다는 뜻이니까.”
“이젠 더 이상 성장할 곳도 보이지 않네. 예전에는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약간씩 보였는데 지금은 전체적으로 완벽해졌어.”
“어. 공략할 만한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네. 앤디가 정말 막막하겠어.”
탕!! 탕!! 탕!! 탕!!
그렇게 3세트에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치열한 스트로크 대결.
머레이는 발 밑에 불이 떨어진 터라 체력 안배를 전부 집어치운 채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3-0으로 지게 생겼는데 어떻게 뒷일을 생각하겠는가.
먼저 브레이크를 당한다면 이후의 결과가 뻔했기에 일단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맞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 갑자기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다.
쿵!!
지혁의 오른쪽 코트를 공략하는 머레이의 백핸드 다운 더 라인.
계속 한 방향으로 유도한 뒤에 위닝샷을 넣은 타이밍도 절묘했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저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무식한 속도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지혁이 어떻게든 스트로크를 추격해서 퍼올렸을 테니까.
물론 방금도 제대로 마음만 먹었다면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위닝샷을 넣도록 그냥 내버려 둔 건 여러모로 가성비가 맞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테니스의 세트는 타이브레이크처럼 한 포인트, 한 포인트에 승부가 갈리는 게 아니라 5번의 브레이크 기회 중에 한 번만 이기면 되었으니.
‘굳이 더 쉬운 방법을 놔두고 고생하면서 이길 이유가 없지. 머레이의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 하는데 베이글 스코어가 필수적인 것도 아니니까.’
머레이도 고작 한 번의 위닝샷으로 지금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게임 머레이 2-2.]
결국 3세트는 동점을 계속 유지했다.
아직 누구에게도 세트가 유리한 건 아니어서 선수들 사이에선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브 리.]
쾅!!
[피프틴 러브.]
쾅!!
[게임 리 3-2.]
다섯 번째 게임을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것은 에이스 두 번과 위닝샷 두 번이면 충분했다.
머레이가 개고생을 하면서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지킨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허무한 모습이었다.
애초에 경기의 내용이 계속 이런 식이어서 지혁이 세트 스코어 2-0으로 이기고 있는 거지만.
[에이스! 서비스라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플랫 서브였습니다. 알아도 막지 못하는 샷이네요. 무섭도록 정교한 기술입니다. 이 정도면 서브를 주무기로 하는 빅 서버들 사이에서도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겠어요.]
[아…. 솔직히 더 이상 머레이에게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안타깝지만 이제 경기가 너무 기울었어요.]
[네. 기적이 일어나기엔 이미 중반부가 되었죠.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머리에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경기에 임하고 있네요. 뭔가 방법이 있는 걸까요?]
[설마요. 아마 상황이 상황이라 그럴 겁니다. 이미 승부가 결정된 상황이라도 그랜드슬램 결승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미련을 버리는 게 쉬울 리 있겠습니까. 우승할 가능성이 10%도 되지 않는다고 해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정상입니다.]
[하긴 대회의 숫자가 엄청 많은 ATP 250, 500과 다르게 그랜드슬램에 참가한 선수들은 대부분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긴 하죠.]
그들의 말대로 머레이는 이 지경이 되고 나서도 윔블던 우승 타이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언제까지 이대로 이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티 포티. 매치 포인트 리.]
결국에는 마지막 한 포인트만을 남겨둔 경기.
여기서 지혁이 위닝샷을 넣기만 하면 2013년 윔블던은 종료된다.
머레이는 드디어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건지 한숨을 크게 쉬고 공을 허공으로 토스했다.
쾅!!
이미 한쪽이 승부를 포기한 상황에서 랠리가 오래가긴 힘들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혁은 드라이브성 포핸드로 위닝샷을 넣을 수 있었다.
초반에 보여준 화려한 기술들과 다르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위력의 스트로크였다.
[게임 세트. 매치 리.]
우와아아아아!!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함성 소리.
마침내 위대한 기록이 새워지자 관중들과 해설들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포핸드 위너! 체어 엠파이어가 매치 포인트를 선언하네요! 윔블던 우승입니다! 마침내 이지혁 선수가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어요!!]
[세트 스코어 3-0, 정말 완벽한 승리네요! 역시 잔디 코트의 최강자다운 실력이었습니다. 올라운더의 장점을 극한까지 보여줬어요.]
[이전에도 대단했지만 이지혁 선수는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전설의 반열로 올라갔네요.]
[네. 지금 당장 은퇴하더라도 레전드로 남을 겁니다. 이번에도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만 19세에 논 캘린더 슬램이라니 이 기록은 절대 깨지지 않을 거예요.]
윔블던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지혁이 달성한 업적을 찬양하고 있을 때.
머레이는 패배의 여운을 어느 정도 추스른 건지 자신의 패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지혁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도 이번 윔블던 우승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경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언론에서 워낙 떠들어대서 모를 수가 없었다.
기록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서 다른 때보다 더욱 열심히 한 것이고.
“설마 빅4가 있는 지금 시대에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선수가 나올 줄이야…. 리, 축하해. 테니스 선수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얻었구나.”
“감사해요. 하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어요.”
“설마 다음 US 오픈까지 노리는 거야?”
“네.”
“…욕심이 많네. 그래도 오늘 경기를 해보니 가능성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너라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머레이는 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초창기 오픈 시즌의 로드 레이버 이후로 무려 40년 동안 나오지 않았던 캘린더 그랜드슬램.
지혁은 한 해의 그랜드슬램을 모조리 싹쓸이 하는 대업적을 노리고 있었다.
딱히 하드 코트에서 약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터무니없는 생각도 아니었다.
비슷한 환경을 가진 호주 오픈도 지혁이 우승을 했으니 말이다.
“조코비치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건 너도 알고 있지? US 오픈에서 우승하는 건 네 생각처럼 쉽지 않을 거야.”
지혁과 조코비치는 세계 랭킹 1, 2위라서 마지막 라운드에서 붙게 되겠지만 이번처럼 그가 중도에 탈락하는 행운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하드 코트의 절대 강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코비치였으니까.
“어차피 제가 랭킹 1위를 유지하려면 조코비치는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에요. 저는 오히려 그가 결승전의 상대가 되길 바라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게 더 의미가 있으니까요.”
“하…. 나랑 다른 선수는 안중에도 없구나. 하긴 결과만 두고 보면 할 말이 없긴 하네.”
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트로피를 들고 경기장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왔다.
윔블던의 시상식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지혁에게는 금색 트로피가 주어지고 머레이에겐 은색 접시가 건네졌다.
모두 대단한 영광이었지만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서인지 선수들의 표정은 확실하게 대비되었다.
[반전은 없었다. 세계 랭킹 1위의 이지혁, 윔블던 결승에서 머레이를 3-0으로 완파하고 논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
[탑랭커들, 지혁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호평을 쏟아내.]
[앤디 머레이, “이번 윔블던은 나의 완벽한 패배다. 리는 우승을 하는데 충분한 자격이 있는 선수.”]
[7개월 동안 유지되고 있는 이지혁의 전승행진. 과연 지금의 연승은 언제까지 지속 될까?]
[이제 캘린더 그랜드슬램까지 남은 건 두 달 뒤에 열리는 US 오픈. 전문가들은 하드 코트로 바뀐 환경이 가장 큰 변수가 될 거라고 보고 있어.]
***
지혁은 US 오픈이 개최되는 8월 말까지 마스터즈 오픈 한 번, ATP 500 한 번, 총 2개의 대회를 출전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지혁의 연승을 저지한 선수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승률 100%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탑랭커들은 지혁과 경기가 잡히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다.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패배하는데 누가 그런 상황을 반기겠는가.
아무리 지혁의 경기가 시청률이 높아서 테니스 팬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다지만 베이글로 망신을 당할 바엔 다른 선수를 만나는 게 훨씬 나았다.
US 오픈 일주일 전, 뉴욕.
지혁은 어플을 통해 두 달 동안 얻은 성과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지혁]
근력: 85 민첩: 85 체력; 85 신장: 188cm▲
서브(S), 포핸드(S), 백핸드(S), 풋워크(S), 외모(A+), 트릭샷(A+), 찰나(A+)
“준비는 완벽해. 불안정해진 밸런스도 거의 다 맞춰가고.”
이제 US 오픈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 그 시간이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연습 경기를 하면서 실전 감각이나 다듬으면 되겠네.”
마침 니시코리와 합동훈련 약속을 잡아놓았으니 잘 됐다.
더 실력이 뛰어난 선수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랭킹 7위보다 실력이 뛰어난 훈련 파트너를 찾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위는 빅4와 머레이밖에 없는데 그들은 지혁과 우승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선수들이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쿼터가 달라서 약속을 잡을 수 있었지 만약 니시코리가 지혁과 같은 상단 쿼터에 잡혔다면 무조건 거절했을 것이다.
빠르면 8강, 늦어도 4강에서 만나는데 전력 노출을 왜 하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결승전이 아닌 이상 만날 일이 없었기에 흔쾌히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니시코리가 지혁이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기로 약속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