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전승행진
[게임 페더러 3-4.]
페더러는 세트 초반에 브레이크를 당한 것치고 제법 끈질기게 버텼다.
그렇다고 지혁이 그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경기가 US 오픈 준결승전이라는 중요한 무대인만큼 모든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페더러가 여유를 부리면서 이길 정도로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허억…. 허억….
서비스게임이 끝나자 숨을 헐떡이며 벤치로 들어가는 선수들.
실질적인 랠리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지혁과 페더러의 피로도는 나달, 조코비치 같은 정상급 베이스라이너와 경기를 할 때보다 컸다.
원래 안정적으로 예상 범위 안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보다 급박한 상황에 맞춰 움직이는 게 체력 소모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음…. 이 정도면 5세트까지 충분히 버티겠는데? 지금 페이스로 계속 진행해도 되겠어.’
만약 예전의 지혁이었다면 언감생심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체력이 넉넉하게 느껴지는 것은 최근 피지컬이 크게 상승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페더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성기인 지혁과 쇠퇴기에 들어간 페더러의 기량 차이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그럼에도 경기가 평형을 유지하는 건 현재 그들의 집중력이 정점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올 테니 그때가 되면 위닝샷의 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기의 승자는 기본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뛰어난 지혁이 될 테고 말이다.
[세트 리.]
[세트 페더러.]
지혁은 무리를 하면 얼마든지 2세트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전략상 페더러에게 세트를 양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급반전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탕!!
[게임 리 3-1.]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여전히 경기 초반과 똑같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혁과 다르게 페더러의 경기력은 서서히 하락세를 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기가 중반부를 넘어가기 시작하니 슬슬 힘에 부친 듯했다.
하긴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탑랭커들 중 가장 공격력이 뛰어난 지혁과 2세트 넘게 난타전을 주고받았는데 상태가 멀쩡할 리 있겠는가.
그나마 페더러라서 여기까지 버틴 거지 탑10 이하의 선수였다면 진작에 밸런스가 무너져서 볼품없는 졸전을 펼쳤을 게 뻔했다.
“하앗!”
탕!!!
걸음이 부족한 탓인지 밸런스가 크게 무너진 자세로 스윙을 하는 페더러.
그는 스트로크가 반대편 코트로 넘어가서 인이 되길 바랐지만 역시 현실은 냉혹했다.
대각선으로 날아간 공은 사이드라인을 큰 차이로 벗어나 버렸다.
[아웃! 서티 러브.]
관중들은 페더러답지 않은 실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테니스에 대해 빠삭한 전문가들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여기를 기점으로 경기 분위기가 반전되겠네. 그래도 골든 보이를 상대로 나름 오래 버텼어. 적어도 US 오픈에서 유일하게 세트를 따낸 선수니까 말이야.”
“그래. 그냥 무난하게 이기겠네.”
처음부터 지혁이 준결승에서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러 분석 자료들과 경기 영상을 따져본 결과, 지혁의 연승을 저지할만한 대항마는 오직 무결점의 조코비치밖에 없을 거라고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골든 보이는 힘이 더 좋아졌네. 솔직히 이때까지 긴가민가했는데 스트로크가 뻗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어.”
“풋워크도 마찬가지야. 19살의 선수인 만큼 아직도 성장기라는 거겠지.”
“보통 성장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망주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인데, 이런 경우도 다 있네. 진짜 이것만 봐도 골든 보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요즘 같은 성적이 가능한 거겠지. 애초에 승률 100% 선수가 상식적인 범주 안에 들어가겠어?”
아마 다른 선수였다면 몇 달 사이에 피지컬이 눈에 띄게 상승한 것이 엄청난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혁은 믿기지 않는 성적과 신기록들을 밥 먹듯이 달성해서 이젠 전문가들이 어지간한 일로 놀라지도 않았다.
결국 이번 시대를 지배하는 건 지혁이 될 거라는 의견이 그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탓이다.
***
경기의 주도권은 균형이 한 번 깨지고 나니 엄청난 속도로 지혁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3세트의 끝자락이 되었을 때쯤, 승리의 추는 한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었다.
이젠 상황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게 불가능한 상황까지 도달한 것이다.
[세트 포인트 리.]
결국 지혁은 3세트의 마지막 위닝샷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세트 포인트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이제까지와 비슷한 모습으로 들어갔다.
굳이 승부수를 던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충분한데 오버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효율적으로 딱 필요한 만큼만 노력을 투자하는 게 어느 측면으로 보더라도 옳았다.
[세트 스코어 2-1. 이지혁 선수가 동점 상황에서 한 발자국 먼저 앞서 나갑니다. 이제 세트를 하나만 더 따내면 US 오픈 결승 진출을 확정 짓게 됩니다.]
[마지막 득점 장면을 생각하면 조코비치와 경기를 하게 될 선수는 이미 결정된 것 같네요. 플레이 타임이 길어져서인지 선수들의 경기력이 초반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사실 그것도 페더러에게만 해당되는 소리죠. 이지혁 선수는 아직도 쌩쌩하니까요. 정말 지칠 줄을 모르는 선수입니다. 그 사이에 체력적인 부분이 많이 보완된 모양이에요.]
해설들은 이미 경기가 끝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여기서 상황이 악화되면 더 악화되었지 기적적인 역전이 나오는 건 어려웠다.
실제로 4세트의 내용은 그 생각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체력이 고갈되고 스코어마저 궁지에 몰린 페더러가 1~3세트보다 훨씬 졸전을 펼친 것이다.
페더러는 아직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지혁이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다 이긴 경기를 내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페이스 조절을 완벽하게 성공한 영향으로 체력마저 멀쩡한 터라 반전이 나올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게임 리 1-0.]
[게임 리 2-0.]
[게임 리 3-0.]
─ 서비스게임 넘어가는 속도 보니까 끝났네;; 경기 초반하고 비교하면 시간이 거의 절반 이상 단축된 것 같은데.
─ ㅇㅇ 그런 것 같네. 지금 해설들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음.
─ 국내 말고 해외는 벌써 결승전에서 누가 우승하게 될지 분석하고 있다 ㅋㅋㅋ 얘들도 사실상 끝났다고 인정했음.
─ 그런데 정신 차리니까 경기가 끝나 있네. 오늘 페더러 컨디션 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의외임. 3-1로 털린 거 보니까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나 봄.
─ ㄴㄴ 네 생각이 맞다. 전광판에 찍힌 서브 속도나 경기에서 보여준 실력을 생각하면 올해 손에 꼽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그냥 이지혁이 잘한 거임.
─ 나도 윗 댓이랑 똑같은 생각이다. 슈퍼 플레이 같은 화려한 샷들의 비중이 적어서 그렇지 가장 기본적인 기술들의 완성도가 차원이 달라졌거든.
[게임 세트. 매치 리.]
지혁이 마침내 결승 진출을 확정 짓자 팬들은 역시 이럴 줄 알았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테니스 커뮤니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의 주제로 떠들썩하게 변했다.
─ 이제 캘린더 그랜드슬램까지 1경기만 남았네 ㄷㄷㄷㄷ 진짜로 여기까지 올 줄이야 ;;;; 시즌 중반만 해도 절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너희들 아직도 이지혁 연승 안 깨진 거 알고 있음? 이번 시즌 한 번도 안 졌다.....
─ 어? 9월인데 아직도 무패라고?? 조코비치, 머레이, 나달, 페더러 전부 한 번씩은 붙었잖아.
─ 와..... 결승만 이기면 한 시즌 무패 기록하고 캘린더 그랜드슬램 같이 달성하겠네. US 오픈 끝나고 마스터즈가 2개 남아있긴 해도 오늘 경기하는 거 보니까 이지혁이 다른 선수한테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음 ㅋㅋㅋ
─ 조코비치가 연승을 저지하는데 실패하면 아무도 못 막는 거지. 랭킹 3, 4, 5위가 주르륵 다 털렸으니까 사실상 얘가 마지막 보루임.
─ 부디 1월보다 실력이 발전해왔으면 좋겠네. 그때하고 달라진 게 없으면 절대 못 이긴다....
[US 오픈 결승전에서 만난 두 라이벌. 페더러를 꺾은 지혁과 나달을 탈락시킨 조코비치 중에 과연 누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역사적인 대기록이 걸려있는 단두대 매치가 성사되어 많은 테니스 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
[노박 조코비치, “기록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가진 모든 전력으로 골든 보이의 연승을 저지할 것.”]
[캘린더 그랜드슬램과 무패 시즌의 달성이 걸려있는 슈퍼 매치 덕분에 US 오픈은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 기대돼.]
[멈추지 않는 지혁의 행보에 엄청난 광고효과를 얻고 있는 스폰서들, 모든 기업들이 벌써부터 계약 연장을 요청하고 있어.]
[만약 US 오픈에서 우승한다면 이지혁의 올해 예상 수입은 800억.]
[테니스 팬들은 결승전 티켓을 구하기 위해 전쟁 중. 암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음에도 물량은 완전히 씨가 말라버렸다.]
이번 경기의 결과에 따라 테니스 역사가 다시 쓰일 수도 있었기에 US 오픈은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만들어냈다.
뉴스에서 다른 스포츠의 소식들을 테니스가 전부 뒤덮고 언론들은 지혁과 조코비치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
그 덕분에 테니스의 인기는 몇 년 전과 비교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급상승했다.
한 명의 슈퍼 스타가 가지는 파급력이 다른 탑랭커들의 영향력을 전부 합친 걸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은 테니스를 잘 몰라도 골든 보이의 이름은 모두 한 번쯤을 들어봤다.
그렇게 종목을 뛰어넘는 스타가 등장하자 US 오픈은 이전에 없었던 관심이 한 번에 집중되었다.
이번 US 오픈에서 우승한다면 지혁은 테니스의 아이콘이자 역사상 최고의 스타인 페더러를 뛰어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지혁이 과거로 회귀하고 괜히 최종 목표를 캘린더 그랜드슬램으로 잡아 놓은 게 아니었다.
그 페더러조차 은퇴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한 대업적을 달성한다면 레전드를 넘어서 테니스 종목을 상징하는 심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 당시 지혁은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성공한다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은퇴를 하더라도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룰만한 것이 없는 종착지를 밟았는데 어떤 후회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지금 같은 기회가 몇 년이 지나서야 올지 모른다.
실력이 상승해도 천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는 게 캘린더 그랜드슬램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번 경기를 놓치지 않아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