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전승행진
[포티 올. 듀스.]
결국 지혁은 경기를 순탄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다.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조코비치에게 약간이나마 여지를 줘버린 것이다.
이제 둘 중에 먼저 포인트를 연속해서 얻는 사람이 게임을 가져가게 된다.
사실상 서브권을 가지고 있는 지혁이라고 해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조코비치가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네요. 최강의 베이스라이너 다운 실력입니다.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아마 이지혁 선수는 이 상황이 정말 답답할 겁니다. 아무리 이기고 있어도 추격당하는 입장이 되면 멘탈 관리가 쉽지 않거든요. 스코어 차이가 크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경기의 승패가 종이 한 장 차이에 달려있습니다. 얼마든지 브레이크가 나올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설들이 중계 화면을 보며 걱정스러운 멘트를 하고 있을 때.
정작 경기의 당사자인 지혁은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충분히 예상 범위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조코비치의 활약은 분명 대단했지만 절대 극복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솔직히 정신만 제대로 차린다면 얼마든지 위닝샷을 넣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출혈을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음…. 찰나 한 번으로 서비스게임을 뒤집는 건 어렵겠는데.’
현재 집중력이 최고조에 도달한 조코비치의 경기력이라면 슈퍼 플레이도 막아낼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다면 연계 플레이를 연속해서 때려 박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세계 랭킹 2위에게 통할 법한 빌드업의 난이도가 낮을 리 있겠는가.
‘쯧. 여러 번 사용할 수밖에 없겠네.’
굳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승률은 50% 이상이겠지만 확실한 방법을 두고 모험을 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현재 상태를 생각하면 딱히 감수해야 할 손해가 큰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페이스라면 경기가 5세트까지 가더라도 체력이 부족해서 탈진할 일은 없을 테니까.
쾅!!!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다시 서브를 시작하는 지혁.
절묘하게 T존을 때리는 타구는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여전히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관중들은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지혁의 멘탈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경기 내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탕!! 탕!! 탕!! 탕!!
포인트 하나에 세트의 승패가 걸려있자 조코비치는 원래의 기량을 뛰어넘는 실력을 발휘했다.
이 같은 장점이 그를 세계 랭킹 2위이자 빅4로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상금이 많고 건곤일척의 승부가 걸린 중요한 경기일수록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놓았기에 테니스 종목의 슈퍼 스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랜드슬램을 휩쓴 선수들은 대부분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앗!”
탕!!!
위닝샷을 넣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지혁은 기습적으로 강력한 포핸드를 때렸다.
페이크가 섞여있어서 상대의 역동작을 유도하는 샷이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조코비치는 임팩트가 되자마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풋워크의 방향을 급격히 꺾었다.
보기만 해도 무릎에 큰 부담이 가는 동작이었다.
아마 탈인간급 피지컬을 가진 조코비치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넘어졌겠지.
퉁!
워낙 스트로크의 속도가 빠른 탓인지 그저 라켓을 갖다 대기만 했는데 공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네트를 넘어왔다.
대체 저 찰나의 순간에 어떻게 방향을 고려한 건지 지혁에게서 가장 멀고 까다로운 위치로 스트로크가 날아간다.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했을 때, 아마 바운드가 되고 스윙을 할 쯤이면 조코비치는 이미 센터 마크에서 밸런스를 회복하고도 남을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나름 자신감을 가지고 친 샷은 완전히 허사로 돌아가버렸다.
에이스에서 얻은 이점을 날려버린 것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이걸 걷어낸다고?’
이럴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설마 진짜로 그렇게 될 줄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제까지 했던 것과 차별점을 두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안일한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소중한 체력만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10구, 15구, 20구.
그렇게 위험한 순간이 지나가자 스트로크의 횟수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연속해서 모험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선수들이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다시 빌드업을 쌓아가며 절호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측면도 있었다.
운이 따라준다면 상대가 알아서 자책을 할 수도 있었고.
베이스라인에서 특별할 것 없는 랠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관중석에서 그 상황을 지루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워낙 중요한 순간이었던 만큼 경기장 내부에선 숨통을 조이는 분위기가 흘렀다.
결국 먼저 인내심이 바닥나서 승부수를 던진 건 조코비치였다.
언제 지혁의 슈퍼 플레이가 나올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상황에서 마냥 수비만 고집하는 것은 어려웠으니.
게다가 앞선 경기에서 보여준 괴물 같은 코트 커버력을 다시 재연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탕!!
라인 근처를 노리며 더욱 날카로운 각도로 날아오기 시작한 조코비치의 스트로크.
지혁은 안정적이던 경기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지자 당황하기는커녕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무리한 플레이를 하네. 자기가 알아서 무덤을 파는구나.’
저렇게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면 위닝샷을 넣을 가능성은 더 높아지겠지만 그만큼 수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조코비치의 촘촘한 수비를 도저히 뚫어내지 못했는데 이제야 기다리던 기회가 주어졌다.
이제 반격의 순간만 기다리면 된다.
‘가장 큰 빈틈을 드러내는 건 위닝샷을 노릴 때야. 그때 바로 맞불을 놓으면 돼.’
탕!! 탕!!!
그렇게 다운 더 라인을 노리는 조코비치에게 오히려 기습적인 발리를 선물하는 지혁.
관중들은 설마 베이스라인에서 랠리를 유지하는 것도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지 몰랐는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만큼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샷이었다.
조코비치는 얼마나 다급했는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라켓을 뻗었다.
퉁!
카운터가 완벽하게 들어간 상황에서 스트로크를 따라잡아서 끝내 라켓에 맞출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의 실력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미 기울어진 승부를 뒤집는 건 많이 어려웠다.
쿵!!!
지혁은 마치 로브처럼 네트 위를 넘어오는 공을 전력을 다해 스매쉬를 때렸다.
서브 못지않은 위력으로 떨어지는 공을 코트 밖에 있던 조코비치가 따라잡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어…… 어….
과정은 복잡했지만 공방 자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었기에 관중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청한 목소리만 내고 있었다.
아마 지혁도 찰나를 동원하지 않았다며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드벤티지 리.]
우와아아아아아!!!
뒤늦게 체어 엠파이어의 판정이 떨어지자 거대한 환호성으로 가득 차는 경기장.
위닝샷이 떨어진 위치도 여유로워서 조코비치는 주어진 결과에 불복하고 챌린지를 요청할 수도 없었다.
라인 위를 걸치다시피 해야 그나마 아웃이라고 주장하는 게 가능하니 말이다.
그렇게 어드벤티지를 가져간 지혁은 다음 서브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포인트를 따내었다.
조코비치와 피지컬이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온 지혁이 찰나까지 동원했으니 질래야 질 수가 없었다.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는 뜻이다.
[세트 리.]
***
조코비치는 지혁의 슈퍼 플레이로 1세트를 빼앗긴 것에 적잖은 타격을 받은 것인지 2세트에서 경기력이 약간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사실 멘탈이 아무리 단단한 선수라도 흔들릴 만큼 경기의 내용이 충격적이긴 했다.
잘하더라도 상식 범위 안에서 잘해야지 방금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실력이었으니까.
[세트 리.]
─ 2-0 ㅅㅅ 이제 3세트만 이기면 3-0으로 끝난다 ㅋㅋㅋ 전문가들이 5:5라고 하더니만 완전 헛소리였네 보수적으로 잡아도 6:4는 돼 보이는 듯
─ ㅇㅇ 내가 생각해도 걔들이 이지혁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음. 뭐, 결승까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 그런데 조코비치가 이렇게 당할 정도면 이제 사실상 라이벌이 없는 거 아니냐? 나머지 빅4들도 실력이 비슷하거나 아래잖아.
─ 그게 맞지. 앞으로 빅4들이 각성하지 않는 이상 세계 랭킹 1위는 계속 유지될 걸.
─ 와.... 요즘 같이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황금기에 랭킹을 독식한다고? 솔직히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 나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데, 올해 초반부터 호주 오픈에서 우승하는 걸 보고 진작에 조짐을 느꼈거든. 지금 상대 전적으로 서열 매기면 이지혁>조코비치>>>나달>페더러>=머레이 이 순서임. 2강 1중 2약. 이지혁 현재 나이랑 성장 속도 생각하면 앞으로 격차는 더 벌어지면 벌어졌지 좁혀질 가능성은 거의 없음.
─ 이번에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하고 나면 진정한 이지혁의 시대가 펼쳐지겠네 ㄷㄷㄷ
테니스 팬들은 조코비치마저 경기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지혁을 진정한 일인자로 인정했다.
그랜드슬램 우승을 저지하던 유일한 브레이크가 사라진 이상 이제 그를 막을만한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약점이 없는 무결점의 선수도 이기지 못하는데 누가 지혁의 억제기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내년부터 메이저 대회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뻔했다.
[게임 조코비치 2-2.]
멘탈이 흔들렸던 조코비치는 궁지에 몰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많이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이대로 US 오픈의 트로피를 내주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경기력이 눈에 띄게 회복되자 더 이상 위닝샷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직 수비적인 플레이에 집중한 조코비치는 지금의 지혁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선수였다.
‘지금이 아니라 2세트에서 정신을 차렸다면 그나마 역전할 가능성이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 늦었어.’
지혁이 바보도 아니고 다 이긴 경기를 내어줄 리 없었다.
승승패패패를 당한다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무시해야 나올 법한 결과였으니까.
‘원래 역사에서 그의 엄청난 위상을 10년이 넘도록 겪었는데 잠깐 유리하다고 내가 조코비치를 얕볼 리가 없지.’
지혁은 조코비치가 역사상 최강의 선수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서 돌아왔기에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약간의 여유만 주어지면 역전을 만들어내는 게 빅4였기 때문이다.
3세트를 반드시 가져가겠다는 두 선수의 생각이 일치한 덕분인지 경기의 수준은 점점 올라갔다.
설마 경기 중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스트로크의 위력이 더 올라갈 줄 몰랐는지 관중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는 조코비치의 역전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대등하게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 템포가 빨라진 경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스코어가 점점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