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는 초점을 혜미에게 맞추고 찍었다.
"저기 하나양 부탁이 있는데… 사진 좀 찍어주면 안될까요? 사미와 같이 찍고 싶어서
그러거든요."
"아! 그거라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하나는 흔쾌 혜미가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고마워요."
"고맙긴 뭐가 고마운 거예요? 안 그래도 그런 말하지 않고도, 제가 그 말하려고 그랬
는데요.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언니."
그렇게 말하니 혜미는 기분 좋은 듯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자∼ 여기 사진기…."
"응, 고마워."
사미에게 사진기를 받자마자 그녀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고, 사미는 혜미에게 다가
갔다. 하나는 제자리에 쭈그려 앉으며 한쪽눈을 찡긋 감고서 카메라 들고 두 사람을
보았다. 하지만 금방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뭐 하는 거야? 자매 둘이서 나란히 서 있으면 어떡해? 친하게 보여야하지 않겠어?
무슨, 생판 모르는 남이라는 둥 그런 뻘쭘한 모습이라니!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팔짱이라도 끼라고!"
어색한 듯이 가만히 부동자세로 서 있는 둘을 보며 하나는 버럭 소리쳤다.
"헤헷… 그, 그렇게 보였니? 미안."
혀를 쏙 내밀며 배시시 웃고는 사미는 찰싹 혜미의 팔짱을 껴서 다정하게 섰다. 하나
는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됐어. 그제서야 사이좋은 자매로 보이네. 그렇게 서 있어."
다시 카메라를 들고 초점을 그녀들 사이에 뒀고, 셔터를 눌렀다.
"아리아양 그렇게 서있지 말고, 와서 같이 사진 찍어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아리아를 향해 혜미는 손짓을 했다.
"같이 찍어줄 테니 가보라고."
"후훗, 그럴게요."
쫄래 쫄래 아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효연이
가 하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하나도 가봐요. 자고로 졸업식답게 단체로 찍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
"아! 그래주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나는 카메라를 넘겨주고 그녀들 곁으로 향해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혜
미의 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날 추억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효연이는 마음이 든든하게 풍족했다. 사미나 혜미의 졸업식엔 언제나 효연이 자신 밖
에 없었다. 애들의 친구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배경 때문에 외톨이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 때문에 언제나 미안한 감이 있었다.
혜미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진짜로 기쁘고 행복한 듯이 말이다. 효연이는 마음이 놓
였다.
아직도 효연이는 혜미의 유치원 졸업식 때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혜미의 유치원 졸
업식 때는 무척 단졸 했다. 주위에 또래는커녕, 무서워서 울먹일 정도의 외모들로 가
득한 인간밖에 없었다.
그때 주위 또래아이들은 첫 졸업이라는 의미로 잔치를 열거나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
께 어딜 놀러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혜미는 혼자서 졸업식을 치렀다. 과연 유치원 졸
업식에는 왜 왔는지 알 수도 없게 혜미는 그저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오로지 멀리서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 누구도 혜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
네는 인간은 없었다. 심지어 유치원 선생님조차도 혜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혜미
곁엔 오로지 친모인 효연이 밖에 없던 것이었다.
한창 또래 아이들과 놀때였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 아이들은 성격이 바로바로 표정
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혜미는 자신의 위치이자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불평한
번 하지 않고, 도리어 축하해주는 효연이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하지만 졸업식 때 보여준 표정은 겉 표면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웃고 있
는 표정 속엔 분노와 괴로운 슬픔이 혼합되어 졸업식 때 받은 졸업장이 구멍이 날 정
도로 구깃구깃해지는 것을 효연이는 봤기 때문이다.
떼를 쓸 나이 때라 마음에 안 들면 바로바로 화를 내야 하는 성격일텐데 혜미에게는
그것이 자신에게 부질없고,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자신의 마음을 죽였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혜미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었다. 걱정이 되어 혜미가 좋아하는
맛있는 간식을 싸 들고 방으로 올라갔었지만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
다. 남몰래 오열을 터뜨린 혜미의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7살짜리가 그런 것을 알고 그런 경험을 해야만 했는지 괴로웠다. 보통 다른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 가슴이 아팠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기분을 느껴야만 했고, 첫 번째인 만큼 효연이는 아직도 그 날
혜미 표정은 상처로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지난날과는 달랐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행복한 표정으로 혜
미는 웃고 있던 거였다.
"…다행이구나…."
효연이는 그제서야 그 날의 괴로웠던 일이 아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슬슬 백성군을 찾으러 갈까요? 오늘은 제 졸업식이 아닌, 민지양도 졸업식이
니까요."
어느정도 기념사진을 찍은 혜미는 선뜻 카이란을 찾으러 가자고 제의했다. 자신만이
아닌, 민지도 졸업이었으니 축하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요. 사미양도 찬성이죠"
"물론이죠. 응, 언니 그렇게 하자."
그녀들은 그렇게 결정을 짓고 카이란을 찾으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
만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우뚝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찾아요?"
처음 사진을 찍은 곳은 교실이었다. 하지만 사진 찍을 때 꼭 한곳에서 찍으라는 법과
보장은 없다. 지금 그녀들이 있는 곳은 운동장 한 가운데였다. 그러니 카이란을 찾기
란 하늘의 별 따기요 백사장에 자갈 찾기다.
"글쎄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가는 길에 뜻이 있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
니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죠. 언제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고
하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 중 백성군이 포함 될 수 있잖아요."
쉽게 말해 무작정 돌아다니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가 보다. 어찌보
면 혜미 다운 발언이라 하나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번뜩!! 여기서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이가 있었으니… 그 정체는 숲의 종족인 아리
아였다! 아리아는 정령술을 부릴 수 있다. 아직은 미흡한 마력과 마나라 어줍잖은 실
력이지만 살아있는 생명체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들어 자신의 존재감과 자
신에게 있어 정령술은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 우울한 참이었다. 그러니
그런 우울한 것을 떼어버리고 빛을 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제, 제가… 찾을……!"
"여어! 여기들 있었네."
느닷없이 카이란이 불쑥 손을 들며 그녀들 앞으로 다가온다.
"……."
"어머? 백성님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됐네요."
"어? 그래? 그런데… 아리아는 왜 그래?"
그녀들 곁에 도착한 카이란은 한구석에서 쭈구려 앉은 채 우수가 드리워진 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표정은 전혀 아무것도가 아니었지만 카이란은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뭔가… 자신이
잘 못한 것 같았기에…….
"오셨어요, 어머니."
카이란 뒤에서 오고 있는 민지와 부모님을 발견하고 혜미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
넸다.
"졸업 축하해요. 이거 받아요."
어머니가 축하한단 말과 함께 큰 꽃다발을 혜미에게 건네줬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버님."
"그래, 혜미양 졸업 축하해요."
덩달아 아버지도 축하의 말을 건넸다.
"백성님 우리 사진 찍어요. 민지도 같이."
카이란의 팔짱을 끼며 사미는 재촉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카이란은 흐느적흐느적 거리며 그녀의 재촉에 응해줬다. 처음엔
졸업하는 혜미와 민지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기 시작해서 그 다음부턴 있는데로 마
구마구 찍어댔다. 순서랄 것도 없이 한 사람이 사진기를 들고 있으면 기본 언어는 '
붙어' 이 한마디는 꼭 들어갔다.
"후훗! 아이들이 참 예쁘네요."
효연이였다.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효연이는 옆에서 똑같이 그들
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이름을 붙여줘야 할까요? 좀 이상‥ 클럭‥)에게 말을 걸었
다.
"그렇네요. 하지만 특히 제 딸보단 그쪽 딸이 더욱 아름답게 보여서 좀 위축이 되네
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쁘게 키울 수가 있었나요?"
"호호∼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하지만 저야말로 그쪽 딸이 더욱 아름답게 비쳐
서 오히려 제 딸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인걸요?"
"후훗! 설마 그럴리가요. 저렇게 보여도 엄청나게 말괄량이에요. 저를 얼마나 속썩이
는데요.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애랍니다."
"그래요? 하지만 저 애도 만만치 않아요. 태평할 정도로 느긋하죠, 뭐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죠, 건망증까지 곁들고 있어서 보는 사람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한데요.
오늘도 보세요, 고교생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졸업식도 잊은 상태로 놀러갔
다 왔잖아요. 부모 입장에선 그게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세요?"
"후훗! 뭘‥ 그거 가지고 그러세요? 쟤는 어떤데요. 천방지축이죠. 말썽쟁이에 한번
삐지면 무섭도록 처절하게 복수하는 애라니깐요. 그리고 저 녀석도 오늘 자기 졸업식
도 잊은 상태였는 걸요. 얘기를 들어보면 오늘 졸업식이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이 혜
미양이 먼저라고 하던걸요?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호호호∼ 에이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세요. 그래도 부인은 애 키우는 재미가 있었
겠네요. 저 애는 애 키우는 재미가 없답니다. 뭐든 철두철미하니까 뭐라고 잔소리하
는 재미가 없는 애예요. 오죽하면 말썽 좀 부려라 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라니깐
요."
"그렇지만 공부 잘하니 좋잖아요. 저애는 천방지축도 모자라 공부까지 못하니 뒷감당
이 얼마나 힘든데요. 중간정도라도 하면 말도 안 해요. 차마 등수를 말하기가 부끄럽
기까지 하답니다."
"그래도 기대감이 서려서 좋잖아요. 쟤는 어떤데요. 만날 전교 20등 안에만 들어서
어떤 성적표를 가지고 올지 기대도 안 해요. 언제나 거기서 거기인 성적이니 재미가
없거든요. 성적한번 보면 언제나 거기서 거기니 오죽하겠어요? 처음이야 잘했다 라고
말 할 수 있만 그것도 한두번이죠. 그걸 계속 유지하면 부모입장에선 시시해지거든요
."
"후훗! 어찌보면 제 입장에선 상당히 배부른 소리라는 느낌도 드는 걸요. 저 애는 공
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요리까지 못하는 걸요. 아무리 가르쳐 줘봐야 구태의연 소귀
에 경읽기가 되어 버리니 얼마나 답답한데요. 보통은 태우거나 말아먹거나 하는 경운
데, 저 애같은 경우는 가히 연금술 영역까지 침범할 정도라 국가적인 미스터리로 발
탁할 정도죠."
"호호호∼ 연금술 영역이라니… 말을 재미있게 하시네요. 그렇지만 가르치는 재미도
있잖아요. 저애는 어떤데요. 습득력까지 좋아서 한번 가르치면 끝이에요. 그것도 실
수도 없이 단 한번만에 배워버리니 가르쳐주는 입장에선 얼마나 허무한데요. 가르쳐
줄 의욕이 치솟지 않다고나 할까요."
"에이… 그래도 수다 수다 수다 수다 수다 수다 험담 험담 험담 헌담∼"
"호호호… 역시 수다 수다 수다 수다 수다 수다 수다 험담 험담 험담 험담∼"
등…
등…
등….
호호호호호∼ 완전 동내 아줌마 수다 와드쇼 하는 모습답게 주절주절 말도 참 많았다.
"……."
모든 사진을 다 찍은 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까 전부터 그녀들의 대화를 지켜
보고 있었다.
"이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가만히 지켜보면서 대화에 끼지 않았던 아버지가 민지를 향해 소감을 물었다.
"얼핏보면 정답게 대화하는 것 같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덧붙였다.
"…어쩐지 싸우는 것 같기도 해요."
그 둘은 왠지 모를 신경전을 버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하필
팔불출 딸자식 자랑이 아닌, 결점만 내뿜으며 싸우는 것은 처음 본 일이고, 가히 미
스터리로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것에 대해 공감하는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 요리가 연금술 영역이라니… 엄마 정말 너무 한다."
민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긴 받았는지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손가락으로 땅이
나 낙서를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런 그녀를 위해 사미, 아리아, 혜미, 하나는 위
로하기 위해 땀을 빼야 했다.
그녀들은 수다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겉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효연이 만큼은 즐겁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
고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그들은 못 알아 챈 것이다.
졸업식도 했고, 졸업장도 받았으니 이제는 집에 갈 일만 남았다. 사진도 어느정도 찍
었으니 여운이 없을 정도로 거창한 졸업기념을 보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는 돌아가서 외식을 하거나 파티를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
아직은 웅성웅성 하객들과 졸업생들도 많았다. 다들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와 선생님
과 함께 즐거운 표정으로 단체 사진을 찍거나 주소와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혜미는 그 광경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부러워요?"
왜 혜미가 그런 광경들을 보고 있는지 카이란은 눈치를 대강 채며 그녀에게 말을 걸
었다.
"아… 봤나요?"
"안보고 싶어도 보게 되죠."
"그랬나요, 미안해요."
"아니, 미안 할 것 까지는 없어요. 선배가 뭘 보든 그것은 선배 마음이지 타인이 강
요할 것은 아니잖아요."
"후훗! 그렇네요."
"그런데 왜 저런 것이 부러운 거예요?"
"글‥쎄요…. 왜였을까요?"
지금 현재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끌렸다. 어쩌면 자신도 친구를 가
지고 싶어했는지도 몰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속에 끼지 못한 점이 안타까웠기 때
문일까? 또한 저속에 끼어있는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에 씁쓸해서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저런 광경이 이렇게
부러울 리가 없었다.
"흐음…."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카이란도 마찬가지였다. 왜 부러운 표정으로 저런 광경을 보
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 어쨌든, 그녀의 소원을 풀어줘야겠다고 생
각하고 카이란은 말했다.
"그럼 저 인간들 데리고 와서 같이 찍자고 하죠, 뭐."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단체 사진 찍는 인간들에게 향하려고 했다.
"잠깐, 백성군."
하지만 혜미는 그런 카이란은 놔두지 않고 다시 불러 세웠다.
"왜요?"
"괜찮아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요."
"정말요?"
"네, 정말이에요."
"하지만 부러워했잖아요."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진심은 그렇기야 하지만 저들이 자신과 사진을 같이 찍어줄 리가 없었다. 카이란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좋게 얘기하고 올테니까요."
"좋게 어떻게 말 할 건데요?"
"당연히 제 방식대로 얘기 해야죠. '이 썩을 인간들아 저기 있는 혜미 선배가 보자고
하니 좋은 말 할 때 따라 오라고' 라고 말하면 오겠죠, 뭐."
"……."
보통 여자에게 저런 험상궂은 말을 듣노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혜미는 잠시간 상상
에 잠겨봤다. 지금 자신의 위치는 조폭계 두목의 딸… 그리고 저들은 일반 평민녀들
… 그런 그녀들에게 다가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어이! 우리 아
가씨가 보자고 하잖아. 조직의 쓴맛을 보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따라 오라잉!' 라는
소리와 일관하게 드릴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역시 무서워서 벌벌 떨지 않을까 라
는 대답과, 그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는 끔찍 최악으로 치닫으며 하락하겠지.
"만약 그래도 오기 싫다고 하면 백성군은 어떡하실 건데요?"
답은 나와있지만 그래도 한번 다시 한번 질문해봤다.
"그야… 당연히 강제&협박으로 데리고 와야죠. 어딜 감히 내 명령에…!"
카이란은 버럭 인상을 썼다. 감히 한낱 인간에 불과한 것들이!! 카이란은 자신의 말
을 안 듣는 것 자체가 용서가 되질 않았고, 가히 상상조차도 가질 않았다.
"만약에 그렇게 해도 안 오겠다면요?"
드래곤 아이로 단 한방에 보낼 수 있는 그의 힘이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
다시 질문을 해봤다. 카이란은 가볍게 대답을 했다.
"당연히 패야죠."
덧붙여 '인간은 패야 말을 잘 듣는 잖아요' 라고 한마디 더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 말까진 오바라는 생각이 들어 입밖에 내진 않았다.
"……."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이 너무나도 그 말을 쉽게 내뱉는 그를 본다면 기가 막히
기 마련이지만, 역시나 혜미는 그런 말이 내뱉을 줄 알았다는 듯이 포커페이스로 일
관하며 가볍게 그를 향해 대답했다.
"만약 저들을 데리고 오면 알아서 해요."
"……."
알아서하다? 알아서 하면 뭐 해줄 건가? 그 의미가 뭔 의미인지 카이란은 묻고 싶었
지만 천사처럼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 속에 무언의 압박이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 그럼 슬슬 집에 가서 졸업기념 파티나 해요!"
손을 번쩍 들며 민지가 외쳤다.
"그렇게 하죠, 부인도 같이 가시죠. 남에게 보여드리기엔 부끄러운 요리 실력이지만
파티라는 것은 같이 즐기는 것이 좋잖아요."
"초대해주신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민지의 말을 찬성하는 의미에서 어머니는 효연이에게 같이 갈 건지를 권유하자 그녀
는 기꺼이 응낙했다.
"자, 그럼 갈까요."
다들 그렇게 결정하고 발걸음을 뒤로했다.
막상 이렇게 발걸음을 떼려고 하니 서운한 감이 몸 속에서 감돌았다. 그래서인지 발
걸음이 가볍지만은 않고,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힘에 겨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눈
이 뒤로 돌아가졌다. 아무래도 아쉬운 감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교문앞에 다다랐을 때쯤 한 20미터 정도 남겨놓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다시
금 뒤를 돌아보며 한동안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로써 마지막이 되는 고등학교 생활을 청산하는 혜미… 이대로 교문 밖을 나가면 이
제 다시 안와도 될 장소다. 지난 6년간(중학교도 여기서 다녔음) 좋은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최근 1년 동안은 이들을 만난 덕분에 무척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