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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엘쟈네스
대공은 리리엘이 외쳤듯 괴물도 아니었고 기사들이 표현한 것보다도 미남이었다. 리리엘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잘생겼다고 생각했으나 대공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마차에서 내리는 엘쟈네스의 손을 잡아준 대공의 손은 단단했다. 검을 잡은 남자의 손이다. 엘쟈네스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예의를 갖춘 간략한 인사를 건넸다.
"크로커스가의 엘쟈네스 입니다. 엘쟈네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루카르엔 윈터나이트입니다. 엘쟈네스."
대공은 정중했다. 엘쟈네스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신부를 직접 맞는 남자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한다면 신부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신부를 미친듯이 원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일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비웃음과 조롱을 사기도 했다.
대공의 검은 눈을 본 순간 엘쟈네스는 알 수 있었다. 대공은 엘쟈네스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있다면 곧 아내가 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에 불과할 것이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엘쟈네스를 직접 맞이하는 것일까. 대공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뒤에 서 있던 집사를 손짓해서 불렀다.
"엘쟈네스. 머물 방은 여기 있는 집사가 안내해줄겁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먼 길을 와 피로할테니 쉬는게 좋겠군요. 저녁에 뵙겠습니다."
대공은 레이디에 대한 예를 취하고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이 시선에 깊이 박혔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엘쟈네스는 알 수 있었다. 대공은 기사들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중을 나온 것은 엘쟈네스에 대한 호의였을지도 몰랐다. 그 증거라면 대공이 인사를 나누자마자 바로 자리를 뜬 것이 있었다.
대화를 길게 나눌 수 있었지만 대공은 먼 길을 와 수고했다는 말과 통성명을 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비켜주었다. 엘쟈네스가 피로한 것을 염두에 두었을 뿐만이 아니라 먼 길을 와 거의 치장하지 못했을 귀족 영애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는 행동이었다. 남편이 될 대공이 저런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집사가 엘쟈네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엘쟈네스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방은 이 쪽입니다.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집사가 안내해준 엘쟈네스의 방은 좋은 곳이었다. 대공의 성도 좋았지만 엘쟈네스의 방은 전체적으로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마차도 그렇고 이 방도 그렇고 대공이 준비한걸까. 엘쟈네스는 생각에 잠겼다.
대공을 처음 본 순간 엘쟈네스는 알 수 있었다. 대공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였다. 성격을 말하는게 아니다. 사랑. 남녀간의 감정에 대해 대공과 자신의 생각이 비슷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엘쟈네스는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리리엘을 사랑하는 남자들은 친구라는 이름을 달고 어떻게든 리리엘의 주변을 맴돌만큼 리리엘에게 푹 빠져있었다. 엘쟈네스의 원 약혼자인 백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은 가문간 이득이 되는 조건을 내세워 엘쟈네스에게 청혼했다.
리리엘은 그 소식에 자신과 친한 친구인 백작이 자신의 언니인 엘쟈네스와 결혼한다는게 무척 기쁘다는듯한 반응을 취했다. 리리엘은 엘쟈네스를 보러 온 백작이 자신과 시간을 더 보내는 것과 자신에게 줄 꽃 등을 들고오는 것에 대해 단 한번의 의문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백작은 양호한 편이었다. 리리엘을 극단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엘쟈네스를 증오하다시피했으니까.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었다. 리리엘의 주변에 있던 남자 중 과격한 남자가 있었고 엘쟈네스는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이 사건 이후로 리리엘과 엘쟈네스가 더욱 더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엘쟈네스는 사랑에 대한 미련을 없애버리게 되었다. 엘쟈네스가 아는 사랑은 리리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에 의한 것 뿐이었다. 리리엘에 대한 사랑에 취한 사람들은 눈이 멀어 한치 앞도 보지 못했다.
조용한 성격이었던 엘쟈네스가 이런 우아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사랑하는 사람인 리리엘의 말을 믿고서 엘쟈네스에 대한 편견의 시선을 쓰고 엘쟈네스를 바라보는 그들이 싫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기로.
대공은 엘쟈네스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보였으나 그 이상 마음을 내주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엘쟈네스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엘쟈네스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단 마음을 주거나 그 사람을 사랑할 생각은 없었다.
백작과의 약혼을 받아들인 이유도 그런데에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없는 엘쟈네스에게는 누가 되었든 결혼상대로는 별다를게 없었다. 엘쟈네스는 대공의 검은 눈을 떠올렸다. 그 눈에는 분명한 선을 긋는 무언의 태도가 실려있었다. 대공은 엘쟈네스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엘쟈네스가 그렇듯이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엘쟈네스님. 물의 온도를 좀 더 높일까요?"
"아니. 지금이 좋구나."
생각이 끝난 후 엘쟈네스는 대공이 보낸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는 중이었다. 대공이 보낸 시녀들 역시도 영민했다. 시녀들은 엘쟈네스의 작은 제스쳐에도 엘쟈네스가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했다.
시녀들이 엘쟈네스의 하얀 피부를 보며 감탄한다. 리리엘은 바깥을 다녀도 피부가 타지 않았다. 엘쟈네스도 피부가 덜 타기는 했지만 리리엘만큼은 아니었다. 리리엘이 관리받지 않아도 타고난 아름다움을 빛내던데 비해 엘쟈네스는 늘 관리가 필요했다. 잘 관리한 하얀 피부가 백조처럼 아름다웠다. 시녀들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마님은 정말로 아름다운 분이었다. 북쪽에서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천하다는 오명이 떠돈다. 그러나 엘쟈네스의 붉은 빛이 도는 적갈색의 머리칼은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북쪽에서 금발이나 백금발은 흔했으나 이런 아름다운 빛깔의 머리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옅거나 푸른 계열이 아닌 진갈색의 눈동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엘쟈네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남쪽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북쪽에서는 이런 귀족다운 사람을 우상시하는 면이 있었다. 시녀들은 엘쟈네스의 시중을 들며 계속해서 속으로 감탄했다.
대공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엘쟈네스는 간단한 화장을 했다. 옷은 대공이 직접 보낸 녹색의 실내 드레스였다. 대공 각하는 먼 길을 온 신부가 힘들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옷을 가져온 시녀가 미소지었다.
간단한 장신구를 걸친 뒤 그리 굽이 높지 않은 구두를 신었다. 이제 곧 대공을 만나러 간다. 마지막으로 붉은 빛이 도는 적갈색의 머리의 앞쪽 부분을 뒤로 넘겨 묶자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쟈네스님. 문을 열까요?"
"그래."
노크를 한 것은 집사였다.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다. 신부가 먼 곳에서 오는 경우 결혼 당사자들은 저녁 식사를 통해 대화를 하고 서로를 알아가는게 관례였다. 예상치못하게 대공이 마중을 나와 놀랐지만 제대로 된 인사는 이 때 하게 되는 것이었다. 엘쟈네스는 집사의 말에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둘러보며 엘쟈네스는 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엘쟈네스는 로벨리아 왕실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곳은 아니었다. 제국이라 그런 것인지 규모가 크고 왕국의 건축물에 비해 좀 더 세련된 느낌이 크다. 간간히 보이는 장식품들은 가격을 매길 수도 없을만큼 귀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주위를 구경하며 걷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이 곳이 식당입니다."
집사가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엘쟈네스는 천천히 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식당의 안쪽인 테이블의 상석 부근에 대공이 앉아있었다. 검은 머리칼. 단정하게 입은 가벼운 정장. 검은 눈이 엘쟈네스를 향했다.
엘쟈네스는 식기가 준비된 곳에 앉았다. 대공과 바로 마주보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된 요리가 식탁에 올려진다. 결혼당사자들이 이야기하게 되는 저녁 식사 자리는 두 사람의 대화가 최대한 방해가 없도록 식어도 맛이 변하지 않는 요리가 빠르게 올라오는 것이 관례였다. 집사가 정중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간다.
엘쟈네스는 뜨겁지 않은 한 입 크기의 음식을 우아하게 입에 넣었다. 처음 보는 요리였다. 거위와 비슷하면서도 식감은 조금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도 미지근한 편인데 기름이 생긴다거나 굳어버리는 일이 없다. 그 위에 소스를 뿌리고 옆에 볶은 야채를 둔 요리였다. 엘쟈네스는 이 이름모를 요리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잠시의 맛을 보는 시간이 지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대공이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네."
"다행입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한 것은 없으셨습니까."
"각하가 염려해준 덕분인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렌."
"렌?"
"북쪽 발음으로는 루카르엔을 루카렌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부르시던 애칭입니다. 당신이 렌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합니다. 엘쟈네스."
"저는 엘쟈라고 불러주세요. 렌."
대공. 렌은 처음으로 웃었다.
"귀여운 애칭이군요."
의아해하는 엘쟈네스에게 그는 북쪽에서 겨울숲에 사는 요정의 이름이 엘쟈라는 내용의 동화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숲에서 눈이 오는 것은 작은 엘쟈가 눈이 들어있는 마법의 나뭇가지를 흔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쟈네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움이 담긴 웃음소리가 식당에 울려퍼졌다. 그것을 보며 렌은 놀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신부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공. 렌이 황제에게 결혼을 명령받은 것은 불과 몇 주 전의 일이었다. 그는 잠시 그 날을 회상했다. 윈터나이트 대공가는 대대로 북방 끝의 영지에 머무른다. 윈터나이트 가문의 핏줄에 깃들어져 내려오는 겨울의 마법 때문이었다.
따라서 후계를 가지는 것은 윈터나이트 가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렌은 북쪽 사교계의 영애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 중 누가 렌의 결혼상대가 되는지는 렌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렌은 영애의 춤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신청하는 일도 없었다. 그나마 렌이 춤을 신청하는 상대는 혈육인 황녀들 뿐이었다.
이런 렌을 보다못한 황제가 결국 상대를 찾아온 것이다. 로벨리아 왕국의 리리엘 크로커스는 렌과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나 그와 다르게 같은 여성 귀족들의 마음마저 홀릴 정도로 검술과 승마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선한 성품을 지녀 다른 사람을 돕기를 망설이지 않아 로벨리아 왕국의 사람이라면 리리엘 크로커스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했다.
렌은 자기 자신의 조건을 잘 알았다. 황제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기에 황제에게 일이 생긴다면 황위 계승권은 렌에게 돌아가게 된다. 유서깊은 대공가였기에 재력도 넘쳐났다. 그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렌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영애들은 넘쳐났다.
하지만 결혼상대로서의 렌을 꺼려하는 영애들도 많았다. 꽃 이름을 주로 넣는 고위 귀족들은 윈터나이트라는 성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거기에 렌은 귀족들이 말하는 야심이란게 없었다. 황제의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다. 정치를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렌이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렌은 한번도 무언가를 원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이 서늘한 미남자는 결혼상대가 바뀐 것을 보고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렌에게 있어서는 리리엘 크로커스나 엘쟈네스 크로커스나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교계의 소문이 사실이어서 엘쟈네스가 정말 악녀라면 밝고 찬란한 여동생에 비해 이 곳의 생활을 잘 견디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렌의 눈 앞에 있는 엘쟈네스는 상상과 전혀 다른 여자였다.
붉은 빛이 아름답게 도는 적갈색의 긴 머리카락. 귀족다운 우아함이 깃들었던 무표정한 얼굴이 즐거워하는 빛을 띤다. 진갈색의 눈동자는 렌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 머무는 것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렌은 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와전시킬 수 있는지 알았다.
엘쟈네스는 여동생에게 손찌검을 할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또한 소문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영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엘쟈네스는 단호하고 합리적인 편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겨울숲에 사는 요정인 엘쟈의 일화에 웃는 것은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렌은 그답지 않은 충동에 이끌려 입을 열었다.
"결혼이 싫지는 않으십니까."
"만족하고 있어요. 나쁘지는 않으니까요. 렌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렌은 사교계 경험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사람들은 대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늘 그에게 다가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렌은 누군가의 눈치를 긴밀하게 살피는 부분은 부족했다. 렌의 말에 엘쟈네스의 진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엘쟈네스는 그가 할 말을 맞출 수 있었다. 렌의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말에는 이성적 호감이 없었다. 그것은 엘쟈네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쟈네스는 천천히 말했다.
"사랑은 기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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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로판이 처음임니다. 쓰는건 처음이고 읽은건 있는데 많지가 않아요. 취향이 독특합니다ㅠㅠㅠㅠㅠ 참고할겸 분위기 파악용으로 몇 화 볼뿐... 그래서 잘 모르는게 많아요! 그러고보니 일반인도 빨리 써야하는데;ㅆ; 걱정되는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