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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엘쟈네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또한 그것을 바라니까요."
엘쟈네스는 대답했다. 렌의 서늘한 검은 눈이 엘쟈네스를 향했다. 이 순간 둘은 미묘한 유대감을 쌓고 있었다. 둘은 누군가와 연인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사랑에 대한 서로의 의견이 일치한 순간 동질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보면 둘의 모습을 기묘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곧 결혼식을 올릴 두 남녀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저녁의 식탁에 앉아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정중하게 나누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말했다.
"아내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겠어요. 하지만 사랑의 감정으로 렌을 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마찬가지입니다. 엘쟈. 원한다면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 대공 영지도, 보석들도, 재화와 권력마저도 드리겠습니다. 사랑을 제외한 모든걸 당신이 원하는대로 줄 수 있습니다."
렌은 자신의 아내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엘쟈네스와 마찬가지로. 두 남녀는 배우자 외의 다른 이성과 외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과 결혼 생활을 충실히 할 것이라는 대화를 서로 주고받았다. 엘쟈네스는 렌을 마주보았다. 검은 머리칼. 서늘한 느낌의 잘생긴 얼굴. 엘쟈네스를 보는 검은 눈.
둘은 좋은 배우자가 될 것이다. 이 순간 렌마저도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났다. 렌이 테이블 위의 종을 세 번 흔들었다. 둘의 대화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이내 저녁식사가 시작되며 나갔던 집사가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디저트 접시가 식탁 위로 올라왔다.
윈터나이트 영지처럼 차가운 영지에서만 자라는 산딸기의 한 종류가 있다. 왕실 연회때 본 적이 있기에 엘쟈네스는 그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새하얀 셔벗 위에 그 산딸기가 올라가 있었고 그 위로 얇은 초콜릿의 띠가 둘러져 있었다. 위에 뿌린 시럽은 꽃과 함께 숙성시킨 종류인듯 했다. 한 입을 떠 입에 넣자 표현할 수도 없을만한 향과 맛이 혀 위를 감돌았다. 먼길을 온 신부를 위해 주방장이 혼신을 힘을 다해 만든 디저트였다.
문득 엘쟈네스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당연히 먼 곳에서 온데다 다른 나라의 공작 영애이기에 이렇게 세세한 것들도 신경써주는 것이겠지만 로벨리아 왕국에서는 단 한번도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이 없었다.
엘쟈네스는 언제나 알아서 자신의 입지를 잡고 이득을 보는 편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입지를 잡게 된 후의 결과에서도 엘쟈네스를 이렇게 신경써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엘쟈네스는 늘 스스로 모든 것을 요구하고 받아내왔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져다주던 리리엘과는 달리.
정략결혼인데도 서늘한 인상의 대공은 엘쟈네스를 세심하게 신경써주었다. 잠시간 렌이 신경쓰였지만 그것은 찰나일 뿐이었다. 엘쟈네스는 식사를 마치고 렌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황실의 의상 담당 시녀들이 웨딩드레스를 가져올겁니다."
"웨딩드레스와 피로연에서 입을 드레스는 새로 맞추는게 아닌가요?"
"황실의 일원의 경우 황실측에서 드레스를 만들어 보냅니다. 황실의 신부에게는 고귀한 옷을 하사해야 합니다. 이미 엘쟈를 위한 드레스가 몇백벌은 있을겁니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그 중 원하는 것들을 고르시면 됩니다."
"제가 다 고른다면요?"
"그것들 모두가 당신을 위해 준비된 것들입니다. 엘쟈."
농담처럼 던진 말에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시종이 렌에게 급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렌은 능력있는 대공이라는 평을 듣는 편이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자식에게 대공위를 물려준 순간 대공의 부모는 대공의 영토를 떠나게 된다.
결혼식을 총 검토하는것도 렌의 몫이었다. 결혼식 전후 며칠간 하지 못할 일들을 몰아서하자니 쉴 틈도 없을 만큼 바빴다. 렌이 엘쟈네스를 마중하러 나가고 저녁식사를 함께 한 것은 사실 무리에 가까웠다. 그 사실들을 유추해낸 엘쟈네스는 렌에게 싱긋 웃으며 치마 한쪽 자락을 살짝 들어보였다.
"내일의 저녁식사도 기대되네요. 그러면 내일 뵈어요. 렌."
"감사합니다. 엘쟈."
렌은 엘쟈네스를 혼자 두는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는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해주리라 생각했었다. 먼 길을 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을 엘쟈네스를 살펴주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예의였다.
엘쟈네스는 그런 렌에게 호감을 느꼈다. 좋은 남자다. 렌을 배려해 렌을 먼저 보내는 엘쟈네스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답지 않은 충동을 한번 더 느꼈다. 엘쟈네스의 웃는 얼굴을 본 그는 엘쟈네스의 손등에 정중하게 키스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엘쟈네스의 손등에 키스하는 남자는 있었지만 정치적 목적이 없는 입맞춤을 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엘쟈네스는 자리를 뜨는 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딘가 이상해진듯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드레스를 맞추려면 일찍 자두어야 할 것이다. 엘쟈네스를 위해 꾸며진 방은 안락했다. 엘쟈네스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윈터나이트 대공. 그와의 결혼생활은 나쁘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왔다.
============================ 작품 후기 ============================
비축분이 업서서... 비축분을 좀 쌓고 오겠슴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