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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변화한다-6화 (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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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엘쟈네스

다음날 일어난 엘쟈네스는 자신이 한가하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크로커스 공작가의 일은 엘쟈네스가 맡아 하는 편이었다. 리리엘은 복잡한 업무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도 많았지만 리리엘이 돌아다니면서 갖은 일을 저지른 덕에 엘쟈네스는 두배로 더 바빴다.

이렇게 한가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대공비의 작위를 받으면 다시 바빠지겠지만 리리엘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것보다 보람찰 것이다.

엘쟈네스는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침실로 아침을 가져온 시녀가 점심부터는 황실의 의상 담당 시녀들과 수석 디자이너들이 찾아오기로 되어있다며 스케줄을 알린다. 엘쟈네스는 여유있게 아침을 먹었다. 과일을 가볍게 집는 손동작이 우아했다.

몇 년만에 여유를 부리는건지 모르겠다. 로벨리아 왕국에서는 늘 바빴다. 엘쟈네스는 리리엘이 하지 않고 미룬 일들과 리리엘이 친 사고들을 수습해야했다. 그 덕에 엘쟈네스가 나가야 할 사교행사들은 더 많아졌다.

리리엘은 사교계를 머리가 빈 귀부인들의 더러운 감정싸움 장소처럼 표현했다. 리리엘이 어울리던 기사들이나 남자들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교계를 엘쟈네스가 장악했던 덕분에 리리엘은 자선사업이나 빈민기부 등을 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엘쟈네스는 사교계를 싫어하지 않았다.

드레스와 보석을 좋아한다. 리리엘은 엘쟈네스가 사치스럽다고 말했지만 엘쟈네스는 자신이 드레스와 보석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엘쟈네스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아침을 먹고 쉬던 엘쟈네스는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다는 전갈에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웨딩드레스를 고를때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 본연의 얼굴을 보고 적합한 화장법과 어울릴 드레스를 유추해내기 위함이다. 귀족 영애들은 이 때를 결혼식 당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부의 평판이 결정되는 시간이다. 음주를 즐기는 영애들도 이 때만큼은 금주했다. 피부를 복구시키기 위해서였다. 엘쟈네스는 잘 관리를 받아와 맨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다급하게 맨얼굴처럼 보일 화장을 찾아내거나 비밀스러운 팩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한가했다.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은 집사가 맞을 것이다. 엘쟈네스는 그동안 시녀의 안내를 받아 걷고 있었다. 윈터나이트 성은 로벨리아 왕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컸다. 가운데에는 엘쟈네스와 렌이 머무르는 저택이 있다.

저택도 어마어마하게 넓었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도 컸다. 북부 특유의 고풍스러움이 담겨있는 것들이었다. 한 쪽은 기사들이 쓰고 한 쪽은 고용인들이 쓰며 별채는 주로 아마릴리스 황가나 외부 손님들이 내려올때 쓰인다는 말을 들으며 엘쟈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커다란 응접실에는 벌써 사람 여럿이 있었다.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수석 디자이너가 나와 엘쟈네스에게 인사했다.

"만나뵈어서 영광입니다. 도란 카렌이라고 합니다."

"엘쟈네스 크로커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도란 카렌의 이름은 엘쟈네스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릴리스 황실의 인척인데도 디자인에 뛰어들었다는 영애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었으나 그녀가 만들어낸 옷을 보고는 감탄만을 내뱉고는 했다. 로벨리아 왕가에도 도란 카렌의 옷이 있었으나 단 한벌뿐이었다.

아마릴리스 황가를 위해 존재하는 디자이너인만큼 도란 카렌의 옷은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디자이너가 엘쟈네스의 웨딩드레스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모든 드레스들은 도란 카렌이 청혼서를 보내던 날부터 엘쟈네스와 리리엘 둘 모두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했다가 신부가 엘쟈네스로 결정된 후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다.

응접실의 문이 닫힌 후 시녀가 엘쟈네스의 몸에 줄을 가져갔다. 엘쟈네스의 치수를 알고 있었지만 혹여나의 사태에 대비해 한번 더 치수를 재기 위함이었다.

"변함없음. 적어놔."

일을 시작한 도란 카렌은 냉철한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내심 엘쟈네스의 몸매와 초상화로도 담아낼 수 없었던 붉은 빛이 도는 적갈색의 머리칼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붉은 머리는 천박하다는 속설을 날려버릴만한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혹여나 머리색이 문제가 될까봐 드레스를 일부러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것들로 만들어보았지만 오히려 엘쟈네스의 외모 때문에 드레스가 묻혀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져온 것들 중 백여개를 목록에서 빼버렸다. 이것들은 신부의 돋보임을 망쳐버릴 수 있었다. 엘쟈네스는 치수를 잰 후 도란 카렌에게 설명을 들었다.

"엘쟈네스님은 어떤 색이든 어떤 디자인이든 소화 가능하실 것 같네요. 대략 몇 벌의 드레스를 보여드릴테니 그 중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다면 골라주세요. 그 위주로 보여드릴게요."

"알겠어요. 기대되는군요."

이내 시녀들이 옆방의 큰 대기실을 가득 채운 드레스 중 몇 벌을 가져왔다. 의류쪽은 확연히 여성이 유리했다. 비슷비슷한 남성 귀족들의 옷에 비해 여성 귀족들의 드레스는 유행에도 민감했고 그러다보니 주 고객층은 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를 맞추기 전 치수를 재거나 옷을 벗고 갈아입는 과정을 보아야하는만큼 남성은 의류쪽에 뛰어들기가 힘들었다. 실제로 황실 남성들의 옷을 전담하는 또다른 수석 디자이너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사람들이 여자일 정도로. 많은 의상 전담 시녀들이 응접실로 드레스를 가져다 날랐다.

엘쟈네스는 그제서야 이 응접실이 왜 이렇게 큰지를 알 수 있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작은 연회장 수준이었는데도 드레스가 옮겨지자 응접실의 빈 공간들이 금방 차버렸기 때문이다.

옆의 대기실과 이 응접실이 어마어마하게 큰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 것이었다. 고풍스러운 장식물들은 잘 닦여졌지만 오래되어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다. 장식물들이 벽에 붙어있는 것들을 보며 엘쟈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엘쟈네스의 가문인 크로커스 공작가도 이만큼의 드레스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대개의 귀족들은 오십개 내외에서 드레스를 골랐다. 도란 카렌의 드레스를 몇백개나 볼 수 있는건 대공이 황제의 혈족이었던데다 자신의 신부에게 최고의 것들을 선사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황족들은 이혼을 할 수 없다. 만일의 하나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 절차는 무척 까다로웠다. 그렇다보니 황족이면 결혼 상대방을 평생 함께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대공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은 정략결혼을 했을지언정 평생 함께 살 그의 동반자를 존중하고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했다. 신부를 맞는 과정과 대접이 세심하고 정중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도란 카렌은 드레스 몇 벌을 보여주었다.

"북쪽은 가을이 빨리 와 목을 덮거나 팔을 가리는 것이 유행이에요. 어머. 이것도 잘 어울리시겠네요. 지금은 가을이지만 늦여름까지는 이렇게 어깨를 드러내면서 팔 위쪽 부분과 가슴께 부분이 이어지고 얌전하게 내려오는 디자인이 유행이었어요. 올해 결혼식은 밋밋하고 단순해보이지만 세련된 것이 유행했거든요. 화장법에 따라 화려한 인상을 주시면 기억에 남으실거에요."

"이 디자인은 제 취향은 아니네요. 목을 덮거나 팔을 가리는 것도 피하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목부분과 팔부분의 선이 고우셔서 드러내는 편도 좋겠네요. 그러면 이런 화려한 디자인은 어때요? 2년 전부터 단순한 디자인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여름이 되며 단순한 디자인이 절정을 찍게 되었죠. 이제는 조금씩 복잡한 디자인이 선호되기 시작되었어요. 유행이 바뀌기 시작한거죠. 지금은 한창 레이스도 유행중이에요. 위는 자수와 레이스가 세밀하게 수놓여지고 가슴께가 살짝 드러나면서 허리 부근은 허리선이 잡혀있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화려하게 퍼지는 이런 드레스도 괜찮을거에요. 가장 대중적인 형태지만 이렇게 화려한 것이 어울릴 사람은 별로 없답니다. 엘쟈네스님이라면 완벽하게 소화해내실 수 있을거에요."

"좋네요. 이런 형태의 디자인은 몇개가 있죠?"

"오십개 내외네요. 미안해요. 북부에서는 붉은 머리를 낮잡아보는 관습이 있어서 붉은 머리의 신부들은 대개 머리를 위로 올리고 단순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선호하거든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머리칼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제 실수에요."

도란 카렌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엘쟈네스를 처음 본 순간 도란 카렌은 아름다운 색깔의 머리라는 생각을 먼저 했고, 그 다음으로는 북쪽에도 붉은 머리가 유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붉은빛이 도는 적갈색의 머리칼은 빛에 따라 붉은빛으로도 적갈색으로도 보였다. 이 빛깔을 본다면 북쪽의 사람들은 감히 붉은 머리를 낮잡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이나 엘쟈네스의 머리칼은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었다.

엘쟈네스의 잘 관리된 하얀 피부나 우아한 몸의 곡선 역시도 매우 아름다웠다. 엘쟈네스는 화장이나 옷에 따라 단정한 여인이 될 수도, 화려한 여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단정한 것도 아름답지만 보기 드물게 극단적으로 화려한 의상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이다.

그래서 도란 카렌은 더 미안함을 느꼈다. 북부의 붉은 머리 신부들처럼 머리를 틀어올리거나 땋아서 말아올려 최대한 시선이 가지 않게 하고 밋밋하고 긴 드레스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도란 카렌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였다. 엘쟈네스처럼 어떤 옷을 입혀도 잘 어울려 입힐 보람이 있는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건 수석 디자이너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상화가 아닌 실물을 직접 볼 것을 그랬다고 생각하며 도란 카렌은 시녀들에게 손짓해 말한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다. 엘쟈네스는 시녀들이 나르는 드레스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모든 드레스들이 아름답다. 역시 도란 카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나같이 화려한 디자인인데도 과도하게 화려하다거나 보기 싫은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화려함마저도 우아하고 고풍스러워보여 은근한 감탄이 나왔다. 시녀들이 드레스를 나르는 동안 도란 카렌이 물었다.

"피로연 드레스는 어떤 색을 생각하고 있으세요? 아니면 선호하지 않는 것들을 말해주세요. 그것들은 뺄게요. 가져온 것들이 워낙 많아서 저조차도 헷갈리네요."

"녹색이나 푸른색, 보라색은 빼주세요. 피하고 싶거든요."

도란 카렌은 영민했다. 녹색과 푸른색, 보라색은 엘쟈네스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었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과연 아마릴리스 황가의 인척인 귀족 출신 다웠다. 도란 카렌은 엘쟈네스의 말에 따라 가져온 드레스 목록 중 녹색 계열이나 푸른색 계열, 보라색 계열을 지워버렸다.

엘쟈네스는 녹색 옷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붉은빛을 띠는 적갈색의 머리칼과 흰 피부에 녹색의 드레스는 잘 어울렸지만 녹색은 리리엘이 가장 즐겨입고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리리엘의 추종자들은 리리엘을 부를때면 영롱한 녹색 눈동자를 부르짖고는 했다. 그 소리를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듣고 졸업해서 사교계 내에서 들었다. 심지어 리리엘이 엘쟈네스를 따라 녹색 드레스를 입었을때도.

엘쟈네스는 악녀라고 불리었으나 고귀하고 우아한 위엄이 깃든 공작 영애였다. 사교계에서 감히 엘쟈네스를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대신 엘쟈네스와 리리엘을 악녀와 성녀로 비유하는 소문이 따라왔을 뿐이다.

녹색 드레스에 큰 거부감은 없지만 한번 있는 결혼식에서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리리엘이 녹색 드레스만큼 즐겨입던 푸른색 드레스와 그 친우인 왕녀가 즐겨입던 보라색 드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좋아요. 이것들을 빼고 나니 드레스의 수가 확 줄어들었어요. 마침 웨딩 드레스가 거의 다 도착했네요. 한번 둘러보시겠어요?"

도란 카렌은 천천히 기다렸다. 엘쟈네스는 커다란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들을 살펴보았다. 연한 분홍빛이 도는 작은 레이스가 치마 끝마다 달린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새하얀 색이다. 주름이 잡힌 치마가 내려오며 겹겹이 물결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두개 다 엘쟈네스에게 잘 어울릴 것은 분명했다. 그 옆에는 은은한 분홍빛의 드레스가 있었다. 장미 모양으로 수가 새겨진 것이었다. 엘쟈네스는 드레스들을 둘러보았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할까.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크림색이 좋겠습니다."

검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들려온 목소리는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낮은 것이었다. 엘쟈네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늘한 미남자가 엘쟈네스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거 쓰는게 너무 재밌슴니다ㅇ<-< 둘이 곧 결혼식도 올리겠네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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