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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밝은 아침 햇살이 침대 위를 비추었다. 이내 엘쟈네스가 눈을 떴다. 엘쟈네스의 기척에 렌도 눈을 떴다. 엘쟈네스는 렌이 누군가의 기척에 민감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윈터나이트 대공가로 처음 오던 길에 엘쟈네스의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 중 하나가 대공은 자신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며 웃던 것이 생각났다. 엘쟈네스는 렌을 불렀다. 둘은 아직까지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렌."
"네."
"검을 잡나요?"
"어릴 적부터 잡아왔습니다."
"그렇구나. 오면서 렌이 윈터나이트 대공가의 기사들보다도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국에서 저보다 강한 이는 없을겁니다."
사실이었으나 렌은 어쩐지 민망함을 느꼈다. 엘쟈네스의 진갈색 눈동자가 그를 신뢰하는 빛을 띤채 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엘쟈네스가 다칠까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엘쟈네스는 가녀린 편은 아니었으나 렌에게는 한없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렌의 이야기를 리리엘이 들었다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남자만은 리리엘의 곁에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따뜻한 체온을 나누고 있어서일까. 렌의 팔에 누운채로 엘쟈네스는 물었다.
"어떻게 강해질 수 있었는데요? 수련을 열심히 했나요?"
"그것은 제가 윈터나이트 대공이기 때문입니다."
엘쟈네스는 렌이 이 이상을 말하기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렌은 이 시간이 좋았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엘쟈네스가 그에게 안겨 있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생각은 간혹 들기는 했지만 지금 엘쟈네스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 이제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다.
이 시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엘쟈네스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렌이 주저한다는 사실만을 깨달은 엘쟈네스는 렌의 반응을 모른척하며 빙긋 웃었다.
"어제 일찍 잤더니 배가 고프네요. 아침 식사를 하는게 좋겠어요."
"줄을 잡아당기면 시녀들이 식사를 내올겁니다."
엘쟈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쟈네스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렌도 일어났다. 렌은 엘쟈네스가 잡아당기기 전 먼저 줄을 잡아당겨 주었다. 곧 시녀들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아침 식사를 나르기 시작했다.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침실 안에 설치되었다. 엘쟈네스는 음식이 놓여지는 동안 렌에게 침실에 있는 양 옆의 문에 대해 물어보았다.
"렌. 왼쪽의 문은 뭔가요?"
"욕실입니다. 저 곳에서 씻으면 될겁니다."
"오른쪽의 문은요?"
"드레스룸입니다. 왼쪽 방은 엘쟈가, 오른쪽 방은 제가 쓰게 되어있습니다."
"집무실은 여기서 먼 편인가요?"
"많이 멀지는 않습니다. 식당과는 가까운 편입니다."
이내 아침 식사가 다 차려졌다. 시녀들은 식사를 마치면 불러달라는 말을 하고 나가서 문을 닫았다. 엘쟈네스와 렌은 식사를 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생선과 매콤한 양념을 넣은 스튜였다. 자칫 잘못하면 비린내가 나거나 너무 맵기 쉬웠지만 매콤한 맛이 나면서도 감칠맛이 감돌았고 고소한 버터향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함께 나온 빵은 부드러워 달콤한 사과잼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렌에게 문득 궁금해 물어보았다.
"대공가의 음식은 원래 이렇게 훌륭한 편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맛있었으나 엘쟈가 온 이후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원인은 엘쟈네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는 주방의 고용인들이었다. 렌은 그들을 치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빵에 잼을 조금 발랐다. 엘쟈네스가 맛있게 먹는 것이 좋았다. 아침을 먹으며 렌은 엘쟈네스의 일정에 대해 알려주었다.
"엘쟈의 업무는 이틀 정도 후부터 시작될 예정이기에 공식 일정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은 윈터나이트 기사단에 인사를 하러 가야합니다."
"윈터나이트 가문만의 관례인가요?"
"비슷합니다. 윈터나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은 기사단입니다. 이들에게 새 대공비가 주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엘쟈는 가문의 일원으로 자리잡게됩니다."
"특이한 관례네요. 인정은 어떤 식으로 받나요?"
"기사단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 곳은 아직 어려울 것 같고, 다른 곳에 가서 인사를 주고 받은 뒤 그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받아오면 됩니다. 다른 한 쪽은 어려우나 이 쪽은 이미 엘쟈를 인정하고 있을겁니다."
"저 혼자 가야하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개입하면 엘쟈를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지는게 되어버립니다."
"그렇구나. 잘 하고 올게요."
식사를 마친 뒤 렌은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나갔다. 엘쟈네스는 그를 배웅한 후 혼자 씻고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남자의 옷은 대개 혼자 입기가 쉬운 것들이다.
그런 점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를 입는 것은 좋았지만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불편했기 때문이다. 엘쟈네스의 옷이 가득 있는 방은 넓었다.
엘쟈네스는 결혼식때 입지 않은 드레스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새 드레스들까지 모조리 거기 걸려있음을 발견했다. 다 입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들었지만 하루하루 새 드레스를 입는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오늘은 푸른 드레스를 입기로 결정했다. 엘쟈네스는 옷을 갈아입은 후 시녀에게 물었다.
"내 일정은 보통 누가 알려주는거지?"
"전속 시녀입니다. 마님."
"그렇구나. 내게 배정되는거니?"
"그렇지 않습니다. 마님이 직접 누군가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시녀들은 벌써부터 마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어하고 있었다. 누가 전속 시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군가는 정말 행운아일 것이다. 시녀는 마음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전속 시녀가 오기 전까지는 집사가 엘쟈네스의 일정을 관리한다고 했다. 오늘은 집사 대신 집사가 보낸 예비 집사 과정을 밟고 있는 소년이 오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집사의 집안은 대대로 윈터나이트를 모셔왔다. 그러나 집사의 아들은 집사를 하기를 원치 않아했다. 집사가 나이가 들도록 이 집안을 혼자 쭉 관리해 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보통은 노집사와 그 아들인 집사 둘이 집안을 관리해오고는 했다. 집사의 손자는 집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오늘 엘쟈네스의 일정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엘쟈네스는 침대에 앉아 소년을 기다렸다. 이내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시녀가 문을 열었다. 엘쟈네스는 밖으로 나왔다. 집사와 어렴풋이 닮은 소년이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님. 오늘 하루 마님을 모시게 되었어요. 오늘은 블랙 기사단에 인사를 하러 가고 일정이 마무리됩니다."
"블랙 기사단? 다른 기사단의 이름은 무엇이지?"
"화이트 기사단이에요! 블랙 기사단은 누구나 생각하는 기사들의 업무를 하고 화이트 기사단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직까지 화이트 기사단에 대해서는 자세한 교육을 받지 못했거든요. 할아버지는 알고 계실거에요. 제 뒤를 따라와주세요."
소년은 밝고 명랑했다. 엄숙하고 기품있던 집사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그래도 복도를 지나며 고용인들의 업무를 눈여겨보거나 무언가를 적는 태도는 제법 집사다워보이기도 했다. 기사단의 건물은 대공 부부가 쓰는 저택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소년, 율리히는 명랑한 태도로 엘쟈네스를 안내해주었다. 엘쟈네스는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대공가의 정원과 북쪽의 나무들을 보며 소년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기사단의 건물이 곧 눈에 들어왔다. 말을 탈 수도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며 산책하듯 걷고 싶었기에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소년 예비 집사는 엘쟈네스에게 말했다.
"저 곳이에요. 마님!"
"두 기사단은 건물을 같이 쓰니?"
"네."
율리히가 어린 편이었기에 엘쟈네스의 말투도 상냥해졌다. 소년은 헤헤 웃었다. 이내 둘은 기사단의 건물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운데에 있는 입구에서 양 쪽으로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두 개의 복도였다.
예비 집사 소년은 당황하고 말았다. 기세 좋게 마님을 데리고 왔지만 어느 쪽이 블랙이고 어느 쪽이 화이트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던 것이다. 나이든 집사가 율리히에게 분명 일러주었었지만 마님을 모시는 중대한 업무를 한다는 생각에 들떠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았다. 율리히의 얼굴이 금세 울상으로 변했다. 뒤에서 따라가던 엘쟈네스가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지?"
"저 쪽이에요! 마님."
율리히는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밝고 명랑하게 웃는 얼굴로 오른쪽을 가리켰던 것이다. 집사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데에 대한 할아버지의 꾸중과 마님의 실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율리히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엘쟈네스는 기사단을 만나면 할 대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율리히의 그런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 길에서부터는 집사가 따라갈 수 없다. 엘쟈네스는 율리히가 가리킨 방향으로 우아하게 걸어가버렸다.
소년은 엘쟈네스가 향한 오른쪽이 제발 블랙 기사단의 것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불운하게도, 소년의 마님이 걸어간 방향은 화이트 기사단이 있는 곳이었다.
============================ 작품 후기 ============================
빨리 방학 왔으면 좋겠어오;ㅅ; 이거보다 용량도 늘리고 연참도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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