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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변화한다-20화 (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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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기사단원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뭐야..."

바닥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공간은 잿더미가 되거나 죄다 뭉그러져 있었다. 싸우던 두 단원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파괴의 마력이 둘 사이를 정확히 갈라놓으며 지나간 자리를 모조리 파괴해버렸으까.

그들은 강하다고 자부했으나 저런 힘에 휘말려 살아남을 자신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간발의 차이로 피한 것이 다행이었다. 엘쟈네스의 단호한 진갈색 눈동자는 별다른 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화이트 기사단원들은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검술과는 연관이 없어보이던 대공비가 순식간에 벌인 참사에 기사단원들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그들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화이트 기사단은 산전수전 구를대로 구른 자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런 화이트 기사단도 대공비의 경악스러운 마법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괴의 속성을 타고 태어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이런 힘을 발휘해놓고서 대공비처럼 태연한 이는 없었다. 기사단장은 은근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힘이 전쟁에서 발휘되었다면 모두가 다 죽었을 것이다.

로벨리아 왕국에서 대공비를 신부로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힘을 놓치기는 싫었으나 감당하기는 어려워서였으리라. 또한 이런 중요한 무력인원을 보냈다는 것은 동맹국인 아마릴리스 황국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대공은 대공비가 허튼 짓을 할 시 즉시 베어낼 사람이다. 렌과 엘쟈네스가 함께 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한 기사단장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 엘쟈네스의 앞에 한 여기사가 섰다.

"대공비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대공비는 대공과 거의 동일한 권한과 위치를 가진다. 대공과 비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사단장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하대를 해야했다. 엘쟈네스의 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사, 엘리나 블루벨은 엘쟈네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 평생의 절대적인 서약을 비 각하께 바치고 싶습니다."

엘리나 블루벨은 북쪽 특유의 옅은 긴 금발과 신비로운 파란 눈을 가진 여기사였다. 화이트 기사단에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닌 강함이다. 기사단원들은 엘리나를 강한 기사로 대접했다.

엘리나는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 다음으로 강한 기사였다. 기사단원들은 곧 엘리나가 두번째가 될 것이라고 종종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러나 엘리나가 부기사단장이 될 일은 없었다. 엘리나는 대공에게 맹세의 서약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세의 서약은 보통의 기사들이 행하는 충성의 맹세와는 질이 달랐다. 대공에게 서약을 바친 순간부터 화이트 기사단원들은 대공에게 깃든 겨울의 마법을 조금씩 얻는다. 엘리나는 겨울의 마법을 얻지 못했다.

대공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겨울의 마법을 제외한다면 이 기사단에서 엘리나를 검으로 따라올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강함에 반해 엘리나를 기사로 맞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엘리나는 모두를 거절했다.

단 한번도 끌림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나 블루벨의 기준에서 주인이 될만한 자는 적어도 엘리나를 단번에 매료시킬 수 있을만한 존재여야했다. 아니면 엘리나를 끌리게 하거나.

그러다 오늘 나타난 것이 엘쟈네스였다. 엘리나는 엘쟈네스가 들어온 그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특이한 진한 빛깔의 적갈색 머리칼 때문일까. 아니다. 귀족적인 우아한 자태와 부드러운 말씨도 원인이 아니었다.

엘리나에게는 엘쟈네스를 평가할만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엘리나는 난생 처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평생 꿈꿔오던 것을 찾은 아이처럼 호흡은 가빠졌다. 엘리나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엘쟈네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절대 서약을 바치고 싶다는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 여태껏 살아왔던 나날 중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엘쟈네스가 화이트 기사단에게 먼저 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요정처럼 신비로우나 무뚝뚝한 이 여기사는 엘쟈네스에게 처음 서약을 바치는 기사라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 엘쟈네스는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릴리스의 기사들은 모시는 주인의 소유가 되고 수족이 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엘리나 블루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리나는 엘쟈네스의 무심한 모습마저도 완벽한 주인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엘쟈네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여기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절하지."

"어째서입니까."

엘리나는 애가 끓었다. 늘 냉담했던 그녀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엘리나는 자신을 거절하는 주인에게 간절함을 담아 애타게 말했다.

"저는 엘리나 블루벨로 화이트 기사단에서 세번째로 강합니다. 육체의 힘과 빠름을 제외하고 순수한 검술로만은 대공 각하께도 뒤지지 않습니다. 제 평생의 서약은 지켜져 대공비 각하를 지킬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기사가 필요 없단다."

엘쟈네스는 이번에는 엘리나를 달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말의 어조는 단호했다. 엘쟈네스의 마력은 기사들보다 훨씬 더 강했다. 엘쟈네스가 원한다면 무수한 것들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계에 다다라본 적은 없었다. 엘쟈네스에게 깃든 파괴의 마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엘리나는 엘쟈네스를 설득했다.

"대공비 각하께서 가장 무방비한 순간에도 제 검이 각하를 지킬 것입니다. 각하가 모르시는 암습 또한 제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럼 무엇입니까."

"나는 기사를 원하지 않는단다. 그저 화이트 기사단의 맹세의 서약을 받으러 왔을 뿐이야."

엘리나는 처음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지고한 여기사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거절당하고 충격 받은 얼굴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엘쟈네스는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런 엘쟈네스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웠다. 최고의 기사인 엘리나를 거절하는 그 모습마저도 엘리나의 눈에는 완벽할 뿐이다. 화이트 기사단장은 엘리나에게 명령했다.

"그만. 그리고 대공비 각하. 각하는 우리의 시험을 통과하셨소. 우리는 각하를 인정하오. 각하는 돌발적인 상황에서 바로 판단을 내렸소. 마법을 쓰더라도 쉽지 않은 결정이지. 나는 기사단장인 렉더 마이어요. 화이트 기사단은 각하를 주인으로 모시겠소."

"겨울의 심장이 그대와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외침과 동시에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울린 목소리는 엄숙했다. 엘리나 또한 예를 표했다. 대공에게 맹세의 서약을 바치고 겨울의 마법의 일부를 얻은 화이트 기사단은 오로지 대공과 배우자, 그 사이의 자손들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었다.

그 서약을 어기고 다른 누군가를 주인으로 삼으면 피에 깃든 겨울의 마법이 기사의 목숨을 앗아갔다. 엘리나는 자유로웠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주인으로 섬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주인은 엘리나를 원하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나가기 위해 문 앞에 섰다. 화이트 기사단원 하나가 아까와는 다른 존중하는 태도로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나는 엘쟈네스가 나가기 직전에 물었다.

"제가 기사이기에 원치 않으신다는겁니까?"

"그래. 나는 기사를 믿지 않는단다."

엘쟈네스는 화이트 기사단의 문을 나왔다. 엘쟈네스의 기억 속에 있는 기사들은 언제나 엘쟈네스를 은근히 깔아보고는 했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귀족답지 않은 시원시원한 면모를 가진 리리엘에 비하여 엘쟈네스가 까탈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쟈네스는 기사들의 무거워보이는 입 안에 감추어진 혀가 얼마나 날카로울 수 있는지를 알았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기사들이 엘쟈네스와 리리엘을 비교하고 평가한 것은 소문의 살까지 덧대어져 엘쟈네스의 귀로 들려오고는 했다.

엘쟈네스는 그들이 말한 것처럼 까탈스럽지도 않았고 독설가도 아니었다. 동생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편견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가.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의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쟈네스의 머릿속에 평생의 서약을 바치겠다던 여기사가 떠올랐다. 기사에게는 미안했지만 엘쟈네스는 좋은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기사를 불신했으니까. 기사가 누구이든 마찬가지였다. 엘쟈네스가 떠난 후 엘리나는 기사단장인 렉더 마이어에게 요청했다.

"마이어경. 겨울이 오기 전까지 휴가를 가지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비축분이 떨어졌슴니다;ㅁ; 저는 다시 주말에 달림니다. 다다음주가 시험이라 비축분을 써놓고 다음주는 편히 공부해야하기에...;ㅆ;

쿠로오님 팬아트 감사합니다! 한예희님 서평 감사합니다!

행복e님, ke11y님, 8은아현8님, 하얀베리님, 라엘린님, pink고양이님, orangered님, 미즐다님, 달밤이언니님, 뽐부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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