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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준비
대공가에는 느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공의 결혼 후 찾아온 평화였다. 결혼 후 대공의 분위기가 많이 유해졌다는 평가가 돌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대공에게 영향을 받는다. 대공이 전처럼 일에만 몰두하지 않게되자 고용인들 역시도 부드러워졌다.
고용인들을 통솔하는 시녀장이 들어온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대공가에는 시녀장인 아이라와 부시녀장인 줄리 외에도 보좌관들과 일을 할 여러 인물들이 들어왔다. 아이라와 줄리가 엘쟈네스의 일을 함께 맡아 하고 시녀들과 하녀들을 교육하자 대공가의 안살림은 나날이 갈수록 훌륭해지고 있었다.
보좌관들과 업무관들이 늘어나자 일의 속도도 훨씬 더 빨라졌다. 그러자 대공부부의의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 일의 양은 같았지만 렌과 엘쟈네스가 단 둘이 했던 일을 여러 사람들이 나누자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처리되었다.
렌과 엘쟈네스가 할 일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공부부의 침실에서 둘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렌은 엘쟈네스를 안고 있었다. 둘의 기상시간은 자연스럽게 늦춰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눈이 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렌과 있으니 좋네요. 기분은 어쩐지 이상하지만."
"오래된 습관 때문일겁니다. 엘쟈. 팔을 약간 올리겠습니다."
렌이 엘쟈네스가 베고 있던 쪽의 팔을 약간 올렸다. 엘쟈네스가 불편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은 할 일이 없다는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겨울의 마법을 타고 태어난 렌은 하루에 몇 시간도 자지 않으면서 끝없이 무언가를 해도 지치지 않았다. 대공가에 렌과 집사 외의 다른 업무 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가가 별 문제 없이 돌아간 이유는 이런데에 있었다.
엘쟈네스 또한 일의 양 부분에서는 렌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막내이자 차기 크로커스 공작위를 이어받을 남동생 요하네스는 아직 어렸다. 크로커스 공작가에서는 후계자 후보를 뜻하는 네스라는 글자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사람만이 후계자의 업무를 맡아서 할 수 있었다.
이름에 네스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을 정하는 매체는 크로커스 공작가의 마법 등불이었다. 신비로운 빛으로 타오르며 뜨겁지 않은 불이 들어있는 이 등불은 후계자에 적합한 사람이 만져야만 붉은 빛으로 변하고는 했다.
후계자의 업무에 관심이 많았던 리리엘이 손을 뻗치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리리엘은 후계자에는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었으나 내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바빠진 것은 엘쟈네스였다.
임시 후계자로서 다른 귀족들과 입지를 다져놓는 동시에 크로커스 공작가의 내정 살림을 대부분 맡아서 해야했고 리리엘이 등한시했기에 엘쟈네스만큼은 사교계에 나가 입지를 다져놓아야했다.
몇 년간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일을 하는 습관이 들자 잠을 많이 자지 않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중 엘쟈네스가 가장 오래 잔 기간은 대공가에 온 직후부터였다. 조금 더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지만 엘쟈네스와 렌 모두가 새벽쯤이면 눈을 뜨고는 했다.
둘은 새벽에 일어나 서로를 안고 다시 잠들었다. 업무 인력들이 늘어 할 일이 거의 없어진 지금은 시간이 더 남아 그저 가만히 함께 있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둘에게 돌아오는 일의 양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나 몇 년 사이 빠르고 정확하게 어마어마한 업무를 처리하는 습관이 든 엘쟈네스와 렌에게는 없는 것과 다름없이 느껴졌다.
부부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한가한 시간들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을 하며 지내다보니 일 외의 별다른 취미는 없었다. 음주나 유흥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렌과 엘쟈네스가 서서히 고개를 겹쳤다. 엘쟈네스는 눈을 감았다. 달콤했다. 엘쟈네스를 안은 팔은 단단했다. 렌이 이어서 엘쟈네스의 손목을 잡았다. 밝은 빛 아래에서 품에 안긴 엘쟈네스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적갈색의 머리칼이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구불구불 늘어졌다.
우아했던 아내가 흐트러진채 렌을 올려다 보는 것은 놀랍도록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렌은 엘쟈네스의 손에 키스했다. 손바닥에서 하얀 손가락 사이사이로. 손 끝에 입술이 닿자 엘쟈네스가 움찔거렸다. 그의 아내는 그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렌은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울렸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참기가 힘듭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렌."
"지금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겁니다."
손가락에 이가 가볍게 닿았다. 엘쟈네스가 다시 움찔거렸다. 이 이상 엘쟈네스에게 손댄다면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렌은 얇은 란제리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어깨를 만지다 옷을 올려주고 손을 내렸다. 흐트러진 옷이 엘쟈네스의 어깨를 가렸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입을 맞추거나 엘쟈네스를 어루만질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렌은 엘쟈네스를 다시 안았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함께 있을때면 모든 걱정이 녹아내리는듯 느껴지고는 했다. 엘쟈네스는 렌에게 더 깊이 안겼다.
늦은 아침을 먹고 일을 하자 네 시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업무가 끝나버렸다. 렌과 틈틈히 나와 대공성 전체를 둘러본 일도 이미 끝이 났다. 그래서 엘쟈네스는 책 몇 권을 읽기 시작했다. 크로커스 공작가에서는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엘쟈네스는 렌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다. 외설적인 자세라고 생각하기 쉬웠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친밀감과 다정함이 있었다. 엘쟈네스가 읽는 것은 남녀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한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마법사의 꾐에 빠져 착용한 사람을 마법에 빠지게 만드는 아름다운 보석들을 걸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남쪽에 비해 북쪽의 삽화는 정교하고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소녀가 장신구들을 걸치고 보석으로 된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엘쟈네스가 삽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렌이 물었다.
"보석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해요.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것이 좋은걸요."
렌은 엘쟈네스가 좋아하는 것들을 언제나 해주고 싶었다. 엘쟈네스는 꽃을 좋아했다. 엘쟈네스는 알지 못했지만 렌은 이미 마음 속으로 엘쟈네스가 늘 꽃을 볼 수 있도록 정원에 유리 온실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보석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렌은 입을 열었다.
"내일 함께 나가시겠습니까."
"윈터나이트 영지로요?"
"네. 살 것들이 있습니다."
"보고서에 올라왔던 대공가 내부의 개편 이야기인가요?"
"그렇습니다. 대공가 내부를 꾸미는 것은 안주인의 권한입니다. 크게 바꾸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바꾸기를 원하는 부분만 바꾸시면 됩니다."
윈터나이트 대공비는 윈터나이트 내부를 새단장 할 수 있었다. 사실 윈터나이트는 엘쟈네스가 오기 바로 얼마 전 내부를 대대적으로 바꾼 상태였다. 렌은 그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엘쟈네스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에는 신부의 방과 대공의 방 정도가 바뀌었다는 식으로 쓰여있을 것이다.
저택 내부는 두 개의 방을 포함해 모조리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렌이 대공가 내부를 굳이 개편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엘쟈네스의 취향대로 꾸며지기를 바랐을 뿐만이 아니라 유리 온실을 자연스럽게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이어서였다. 또한 외출 역시도 목적이었다. 엘쟈네스는 잠시 고민했다.
"개편할만한 부분은 많지 않았어요. 다만 지금 달린 커텐들의 재질과 장식물 몇 가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저 장식물들은 주로 봄에 쓰는 것들이니까요. 곧 겨울인걸요."
"그렇군요. 생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내일 가서 고르면 될 것 같아요. 가구 몇 가지도 바꾸어도 될까요? 옷장의 나무가 튼튼하지만 습기를 다소 잘 먹는 종이거든요. 습기를 머금으면 광이 나지 않아요."
"엘쟈의 뜻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 것들을 파악하다니 눈썰미가 좋군요."
"크로커스 공작가에서는 늘 이런 일을 했었는걸요."
"안살림은 재능과 노력 둘 모두가 필요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렌은 담담하게 칭찬했다. 렌의 이런 점이 좋았다. 렌은 성별이나 귀함, 천함을 따져 어떤 일을 파악하는 법이 없었다. 렌은 누군가를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엘쟈네스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렌 역시도 사람을 존중하고 감사할 줄 아는 엘쟈네스의 장점들을 좋아했다. 저녁을 먹은 부부는 일찍 잠에 들었다. 윈터나이트 영지에 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엘쟈네스는 미약한 설레임에 렌의 손을 잡았다. 렌은 엘쟈네스의 손을 마주잡아주었다.
날이 밝았다. 아침을 먹은 둘은 준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화이트 기사단원이었다. 엘리나는 말을 탄채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룬델과 겨울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엘쟈네스를 죽게 만들뻔한 이후 렌은 엘쟈네스의 안전에 언제나 신중을 가했다.
이제 겨울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겨울을 위해 필요할 물건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노랗고 붉게 물든잎이 반절 이상 떨어진 나무들이 앙상해지고 있었다. 날씨는 이제 쌀쌀했다. 엘쟈네스는 가져온 솔을 더 넓게 둘렀다. 렌은 마차 안에 있던 담요를 덮어주었다.
"도착하면 춥지 않을겁니다."
대공성과 영지 사이에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다. 길을 달리고 달리자 마침내 도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벽은 컸다. 북쪽 건물은 대부분 커다란 편이었다. 마차가 커다란 성문을 통과했다. 거리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엘쟈네스는 렌에게 물었다.
"렌. 우리는 어디로 가고있나요?"
"장인의 거리가 있습니다. 본래 윈터나이트는 나무와 보석 등 좋은 재료가 많아 각 분야의 장인들이 많이 오는 편입니다. 장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에 가고 있습니다."
"기대되네요."
마차가 큰 길에서 우측 방향으로 움직였다. 엘쟈네스는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쪽과 다른 외형의 건물들과 옅은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곳의 사람들은 어두운 계열의 긴 외투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이내 마차가 멈추었다.
"각하. 비 각하. 도착했습니다."
화이트 기사단원이 말했다. 엘쟈네스는 먼저 내린 렌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우아하게 내려섰다. 엘쟈네스가 보았던 집들 중 동화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집들이 있었다. 붉은 지붕의 집들과 길다란 집들이 눈에 띄었다.
거리는 넓었다. 곳곳에 보이는 동상들마저도 모두 예술적인 것들이었다. 엘쟈네스는 집들의 앞에 걸린 나무 간판들에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쟈네스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은 커텐을 파는 집이었다. 대공가의 커텐들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엘쟈네스는 렌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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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일교차가 심함니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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