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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변화한다-39화 (3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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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준비

음악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한 번의 마지막 연주를 끝으로 음악은 완전히 멈추었다. 렌은 엘쟈네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엘쟈네스는 드레스 자락 끝을 잡고 우아하게 화답했다.

"수고했어요. 렌."

"처음 보는 춤이었는데 따라가기 어렵진 않았습니까."

"전혀요. 렌이 이끌어준 덕분이에요."

마음을 자각하자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엘쟈네스의 붉은빛이 도는 적갈색의 머리칼은 세상의 어느 보석보다도 아름다워보였다. 엘쟈네스의 단호한 진갈색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설레는 감정이 느껴졌다.

렌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윈터나이트로 태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떨림을 들켰을테니까. 엘쟈네스가 렌의 손을 잡았다.

"이제 우리도 들어가야죠. 다음 순서는 아이들의 춤인거죠?"

"그렇습니다. 연인들이 먼저 춤을 춘 다음에는 아이들이 춤을 춥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까부터 아이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거든요. 추측했을 뿐이에요."

"눈썰미가 좋은 편이군요."

"그렇지만도 않아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걸요."

칭찬에 엘쟈네스가 웃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그녀와 어떻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일까. 엘쟈네스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고 있던 것일까.

렌은 엘쟈네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엘쟈네스는 춤을 추던 순간부터 렌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렌의 검은 눈은 지금까지의 것과 다른 어떤 감정을 담고 있었다. 렌의 손이 엘쟈네스에게 닿았다.

둘의 옆으로 아이들 몇이 꺄르르 웃으며 뛰어갔다. 아이들은 축제의 분위기에 신이 나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둘 사이의 분위기가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달라진 것은 렌이었다. 렌이 엘쟈네스에게 서서히 가까워졌다.

"렌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나요?"

"어릴 적 신부를 맞이하면 축제의 첫 춤을 반드시 함께 추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생일마다 그런 소원을 빌었습니다. 윈터나이트에는 13살 이전의 나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여운 꿈이었네요. 더 좋은 소원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후회했거나?"

"지금 이루어졌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렌이 고개를 숙였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엘쟈네스는 처음 느껴보는 묘한 설레임을 담은 긴장감에 렌에게 말을 했지만 곧 말을 멈추었다. 이내 엘쟈네스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사람들은 축제의 흥겨움에 휩쓸려 둘을 보지 않았다. 둘의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 역시도 이 연인들을 굳이 주목하지 않았다. 첫 춤을 춘 후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연인은 많았기 때문이다.

축제의 등불은 황홀하도록 밝았다. 붉은 열매와 금빛의 리본이 달린 전나무 아래에서 엘쟈네스와 렌은 한참 서 있었다. 불빛이 일렁였다. 엘쟈네스는 눈을 떴다. 렌은 엘쟈네스를 다시 이끌었다. 둘은 천천히 걷고 있엇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엘쟈를 보고 있습니다."

"머리색 때문일까요."

"엘쟈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렌은 스쳐지나가며 엘쟈네스를 흘끔흘끔 바라보는 남자들을 지나치지 않았다. 남자들은 엘쟈네스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렌 역시도 남자이기에 알 수 있었다. 엘쟈네스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이 엘쟈네스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옆에 선 렌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엘쟈네스를 가둬두고싶다는 어두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한 번 가볍게 든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엘쟈네스의 삶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쟈네스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렌은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독점욕이 강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엘쟈네스를 바라보던 남자들은 렌의 서늘한 눈을 마주하고 눈을 돌렸다. 엘쟈네스는 렌의 팔을 잡고 있었다. 렌은 엘쟈네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순간 이상하게도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엘쟈네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둘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멈추었다. 엘쟈네스는 느껴지는 지금까지와 다른 감정에 렌을 바라보았다. 렌에게 던진 물음은 엘쟈네스답지 않은 솔직한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질투하나요?"

"엘쟈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이. 지금 제가 어떤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는지. 결코 모를겁니다."

렌의 목소리는 낮고 매혹적이었다. 엘쟈네스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둘이 함께 선 광장의 바깥쪽은 작은 등불과 붉은 열매, 금빛 리본이 달린 작은 나무들이 많았다. 사람은 없었다. 대개가 광장의 중앙으로 가 축제를 즐기기 때문이었다.

황홀한 광경이었다. 밤은 깊어져 있었다. 엘쟈네스와 렌은 마주 본채 서 있었다. 엘쟈네스는 렌의 눈에 담긴 감정을 직면했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호감이기라기에는 깊은 것이었다.

나비가 나는 법을 자연스럽게 깨닫듯,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엘쟈네스는 깨닫고 말았다. 엘쟈네스는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말이 흘러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를 사랑하는군요. 렌."

"그렇습니다."

그는 인정했다. 사랑에 빠진 순간 엘쟈네스는 절대적인 강자가 되었다. 렌은 누군가에게 단 한번의 패배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그 어떤 학생보다도 성적이 우수했다.

그 누구도 검으로 렌을 꺾을 수 없었다. 렌이 베어낸 무수한 악한 것들은 렌의 발치에조차도 미치지 못했다. 엘쟈네스가 원한다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안겨다 줄 것이다. 엘쟈네스가 묻는다면 그 무엇이라도 답해줄 것이다.

엘쟈네스는 렌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렌은 엘쟈네스에게 그 어떤 경계도 두지 않았다.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다른 사람에게 하듯 선을 긋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사랑에 대해 떠올렸다. 리리엘을 사랑하던 남자들은 리리엘의 아름다운 외양에 이끌려 리리엘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사랑이 되었다. 리리엘의 밝고 명랑한 성격에 반한 사람도 있었다. 리리엘의 검술을 보고 리리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리리엘의 주변에 있던 고위 귀족의 자제들처럼 멀쩡한 사람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리리엘의 외양에만 이끌린 이들은 리리엘에게 어떻게든 손을 뻗치려고 애썼다. 리리엘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대신 선택한 것은 엘쟈네스였다. 엘쟈네스가 사교계에서의 장악력을 키운 것은 그런 이유였다.

리리엘에 대한 욕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이들은 엘쟈네스에게 감언이설과 갖은 물질적인 것들을 보냈다. 리리엘이 보석과 드레스를 혐오하는 원인 중 하나는 이런 선물들을 많이 받았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엘쟈네스의 거절에 그들은 무척 분개해했다.

리리엘의 주변에 있던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라고 딱히 다를 것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충족시키기 위해 엘쟈네스를 깎아내리려고 애썼다. 리리엘의 사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엘쟈네스에게 여러번 강요하기도 했다.

리리엘은 늘 엘쟈네스와 잘 지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들의 노력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순수한 열망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누구도 엘쟈네스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엘쟈네스의 삶은 리리엘을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어지러워졌다.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리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의 눈을 멀게했다. 크로커스 공작 부부는 늘 리리엘만을 위했다. 누구도 엘쟈네스의 의견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결국 사랑을 환멸하게 되었다.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다른 사람을 짓밟게 하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눈 앞의 렌이 엘쟈네스에게 진중하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엘쟈."

그 서늘한 잘생긴 얼굴에는 한 점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랑에 대한 엘쟈네스의 편견이 깨져나갔다. 엘쟈네스는 더 이상 사랑을 환멸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조금씩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엘쟈네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 하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 역시도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게 한 것은 렌이었다.

어느새부터 렌이 엘쟈네스에게 스며들어있었다. 엘쟈네스는 세상의 색채가 은은히 렌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내쉬는 삶의 숨결 하나하나에도 렌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 작품 후기 ============================

으아 이번주 금요일이 학술제라 춤에 수화에 이제 발표과제해야하는데 미쳤써요!;ㅁ;

오늘은 리코멘을 받슴니다. 선착 7분! @을 붙이고 말해주시면 되어요^0^!

민트맛토피님, 아베미하님, 물고기풍경님, 유카짱님, 소영씨님, M.K님, 암흑속에사는뱀님, Endn님, 키워드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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