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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대공 부부가 검은 늑대들을 베어내는 동안 화이트 기사단은 아룬델의 건물 바깥으로 나가려는 검은 늑대들을 베어냈다. 대공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검은 보통 인간들보다도 강했다.
화이트 기사단의 새하얀 늑대들은 기사들과 호흡을 맞춰 검은 늑대를 입에 물고 파괴시켜버렸다. 검은 늑대들의 수는 그 어느때보다 많았으나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빨랐다.
엘쟈네스의 마법이 아룬델의 상공 위를 가득 채웠다. 엘쟈네스는 느낄 수 있었다. 늑대들이 직접적으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 마법을 엘쟈네스 역시도 어느 순간부터 쓸 수 있었다. 엘쟈네스의 의지에 겨울의 공기들이 공명했다.
푸른 거대한 마법이 문양을 그리며 펼쳐졌다. 마법진은 엘쟈네스가 펼친 것이 아니었다. 겨울의 땅에 깃들었던 파괴의 마법 중 어떤 것이 떠돌다 엘쟈네스의 마법에 내려앉았던 것이다. 엘쟈네스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강해졌다. 그러자 렌의 경지가 보였다.
아룬델의 건물을 가득 메웠던 늑대들은 겨울의 마법에 의해 모조리 파괴당했다. 파괴되지 않은 것들은 렌과 화이트 기사단의 검에 의해 스러져버렸다. 남은 것은 겨울 바람 소리가 울부짖는 황량한 소리처럼 들어오는 빈 아룬델의 건물 뿐이었다.
엘쟈네스는 손을 내밀었다. 렌이 손을 잡았다. 엘쟈네스의 장갑은 날아간 후였다. 겨울의 땅에 깃들었던 마법이 엘쟈네스의 마법과 어우러져 발현되는 순간부터 엘쟈네스는 장갑을 벗어던졌던 것이다.
"손이 찹니다."
"렌의 손도 찬걸요."
"장갑을 끼고 있기에 괜찮습니다."
부부의 곁으로 화이트 기사단이 다가왔다. 엘쟈네스는 늑대들이 스러진 자리에 남은 새하얀 조각들을 보았다. 빛나는 새하얀 조각들은 화이트 기사단에 의해 주워졌다. 검은 늑대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았던 검은 잔재들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엘쟈네스는 기사단이 가져온 빛나는 하얀 조각들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겨울의 파편이다. 겨울의 마법이 본능에게 속삭였다. 새하얀 겨울의 파편은 날카롭기도 했고 뭉툭하기도 했다. 어떤 퍼즐의 일부 같기도 했고 엘쟈네스가 보지 못한 모양 같기도 했다. 말로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모양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이것을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렌은 모든 겨울의 파편들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신비한 푸른빛이 겨울의 파편들에게서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추위를 모아놓은듯한 극심한 냉기가 자리를 메웠다.
파편들에게서 혹독한 추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겨울의 마법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 얼어죽었을 것이다. 엘쟈네스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파편들은 이제 공중에 떠올라 기하학적인 어떤 형태로 맞추어지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옆의 엘리나에게 물었다.
"엘리나. 저것들이 다 맞추어지면 어떻게 되니?"
"겨울이 완성됩니다. 비 각하."
투명한 푸른색이 섞인 빛이 새하얀 겨울의 눈보라를 감으며 일렁거렸다. 파편들이 점차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맞추어지는 순간. 빛이 아룬델의 건물으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렸다. 옛 아룬델가의 본관이었다.
저것이 겨울이다. 겨울은 아룬델의 본관 안의 어딘가에서 완성될 것이다. 엘쟈네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렌과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늑대들이 멈추었다. 그들은 말했다. 이 곳에서는 그들을 탈 수 없다. 아룬델의 건물 안은 아룬델만의 마법으로 가득 채워져있었기 때문이다. 윈터나이트에 관련된 것들은 어느정도의 제약을 받았다.
새하얀 늑대들은 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그들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호위를 해줄 수는 있었다. 그들은 아룬델의 거대한 화려한 문을 열었다. 오래된 건물의 문은 무거웠다.
그러나 시간이 멈춰있었기에 모든 것이 아직도 관리된 것과 같았다. 문은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다. 문을 열때 나는 쇠 특유의 흔한 마찰음 하나 없었다. 모든 많은 일행들이 아룬델의 건물 안에 진입했다.
처음 나타난 것은 화려하고 냉막한 복도였다. 건물은 크고 웅장한 느낌을 주었으나 어딘지 모를 스산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복도에 걸린 그림에는 모두 겨울 풍경이 그려져있었다. 성과 마을들에 겨울이 찾아온 풍경을 아름답게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지나치던 엘쟈네스는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얼핏 겨울 날의 풍경처럼 보이기 쉬웠으나 연작으로 보이는 커다란 그림에 사람이나 건물의 불빛 하나 없었다. 아룬델이 추구하는 것은 겨울에 의해 온 세상이 얼어붙어 멸망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성과 마을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눈과 얼음이 사람의 키만큼 쌓여있는데도 치워진 흔적은 없었다. 옛 사람들은 이 그림에 담긴 뜻을 몰랐을 것이다. 그 다음의 초상화에 그려진 하얀 눈 위에서 눈을 감은 여인 역시도 아름다움보다는 죽음의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엘쟈네스는 물었다.
"렌. 아룬델은 어째서 겨울로 인해 세상이 얼어붙기를 바라나요?"
"윈터나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런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어 죽는다는 것에 대해 환희와 희열을 느낍니다."
엘쟈네스는 대답할 새도 없이 곧이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쓰인 문 앞에 다다랐다. 겨울의 마법이 이 안에 겨울이 있다고 거세게 요동치며 알렸다. 잠금장치가 있었다. 어떤 암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형태인듯 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암호를 알 수 없는데다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기사 몇이 문고리쪽을 파괴했으나 오히려 문이 더 단단히 잠겨버렸다. 현재의 인류에게는 없는 잠금 기술이었다. 엘쟈네스는 손을 들어올렸다.
새하얀 늑대들 중 몇몇이 의아한 눈으로 엘쟈네스를 바라보았다. 엘쟈네스의 마력에 문이 사그라들듯 소멸되었다. 저 앞에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화이트 기사단 중 몇은 말을 잃었다.
"엘리나. 따르렴."
"알겠습니다. 비 각하."
엘리나의 얼굴에는 엘쟈네스를 향한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어떻냐고 하며 대공비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 무언의 표현을 기사단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화이트 기사단은 동의했다. 대공비는 그럴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문 안으로 향했다. 문 안은 별 것이 없었다. 복도와 저 멀리의 커다란 연회장이 있었을 뿐이다. 저 멀리에 겨울이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 곳에서 겨울이 빠져나갈 수는 없다.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중 엘쟈네스가 발길을 멈추었다. 모든 화이트 기사단 역시 발길을 멈춘 것은 마찬가지였다. 엘쟈네스는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연회장이 얼마 남지 않은 중간의 복도 양 옆에는 투명한 유리관들이 설치되어있었다.
유리관 안에는 투명한 옅은 푸른 액체가 체워져있었다. 벽에서 어떤 에너지 공급을 받는듯한 모습이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엘쟈네스가 놀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렌. 모두가 붉은 머리에요."
유리관의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다양했다. 작은 소녀도 있었고 다소 거친 인상의 중년 사내도 있었으며 젊은 청년과 특이한 인상의 미녀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붉은 머리였다. 엘쟈네스는 문득 북쪽의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은 이것 때문이었군요. 아룬델들은 모두 붉은 머리였나요?"
"맞습니다. 아마릴리스가 옛 땅에서 옮겨오며 그 기록들은 모두 말소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렴풋이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아룬델과 윈터나이트의 역사가 깊게 새겨져있었다. 북쪽의 사람들 중 엘쟈네스의 붉은 머리를 유독 거부감 어린 눈길로 보던 이들은 모두 귀족들이었다. 그 귀족들은 자신들의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아룬델은 아마릴리스 다음으로 큰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귀족들 사이에서도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기록은 말소되었지만 귀족들의 기록은 조금씩 내려져왔을 것이다.
붉은 머리에 대한 교육은 어렴풋이나마 계속해서 대를 이어 내려져온 것이리라. 엘쟈네스가 대화했던 귀족들 중에서도 붉은 머리에 대해 왜 좋지 않은 속설이 떠돌고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현재는 아룬델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다. 엘쟈네스가 만났던 베스 아룬델 역시도 붉은 머리가 아니었다. 엘쟈네스는 물었다.
"현재는 붉은 머리의 아룬델은 남아있지 않나요?"
"순혈 아룬델은 남아있지 않을겁니다. 아룬델은 이제 거의 멸문한 가문입니다."
"이들이 깨어날 가능성은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이 곳의 시간은 멈추어버렸습니다. 아룬델의 후손이 도착하지 않는한에야 어려울겁니다."
엘쟈네스는 복도를 걸어나갔다. 대연회장이 보였다. 화려한 샹들리에는 눈부시게 밝게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은 연회가 시작될 무렵만 화려하게 켜진다. 시간이 멈추기 전 이 곳에서 연회가 일어났던 것일까.
윈터나이트의 기사들과 그들을 수호하는 새하얀 늑대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엘쟈네스는 렌의 옆에 서서 바로 앞의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오자 알 수 있었다. 그 곳에서 겨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들 왜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이 극단적으로 있냐, 엘쟈를 돋보이게 해주는 장치 치고는 과하다고 하셨지만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은 애초부터 '후에 아룬델을 부각시키기 위한' 요소였슴니다^0^!♥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 기뻐요!
M.K님, 낭만사자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