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변화한다-59화 (59/105)

0059 / 0105 ----------------------------------------------

여름 나기

레오드릭은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리리엘 크로커스의 마냥 밝은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기품이 여자에게 있었다. 적갈색의 머리는 윈터나이트의 햇빛에 아름다운 붉은빛을 내며 빛났다. 옆을 향하는 진갈색의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빛이 실려있었다.

여자는 옆의 윈터나이트 대공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만개한듯 웃었다.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윈터나이트 대공은 무어라 소곤거리는 여자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레오드릭은 잠시 멈추었다. 먼저 그들의 앞에 도착한 아마릴리스 황제에게 대공과 여자가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황제 폐하를 위하여."

틀림없었다. 우아한 태도로 예를 취하는 여자는 엘쟈네스 크로커스였다. 그녀가 입은 여름용 드레스의 하얀 자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레오드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엘쟈네스의 외모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엘쟈네스의 표정은 부드러웠고 눈빛에는 스스로를 향한 확신이 넘쳤다.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보였다. 단지 그 차이인데도 엘쟈네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황제가 말을 건넸다.

그것을 들은 엘쟈네스가 렌에게 무어라 말하며 웃었다. 레오드릭은 그녀가 웃는 것을 처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그 엘쟈네스 크로커스가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가만히 선 사이 마차에서 뒤늦게 내린 니콜라이 황태자가 황후를 부축하며 내렸다. 황후는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마차가 흔들리며 그녀의 고질병인 두통이 더 심해졌던 것이다. 윈터나이트의 서늘한 바람을 맞자 그녀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둘은 대공 부부에게 인사했다. 대공 부부는 그들에게 화답했다. 문득 엘쟈네스 크로커스의 눈이 레오드릭에게 향했다. 엘쟈네스 크로커스 역시 그를 알아본 듯 했다. 약혼녀의 손을 잡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온 발라디미르 황자가 물었다.

"레오드릭.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아닙니다. 형님."

"아나스타샤는 드레스 끝자락을 다시 정리한다더구나."

"그렇군요."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음을 가장하며 둘과 함께 발걸음을 올렸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그의 태도가 무성의해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저 편을 다시 바라보았다. 엘쟈네스 크로커스의 말에 황제가 즐거운 얼굴을 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황후마저도 엘쟈네스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랬기에 대공 부부의 모습은 황제 부부와 니콜라이 황태자에 의하여 가려지고 말았다. 그랬기에 라시아 블렌시아는 대공 부부의 모습을 보지 못한 터였다.

"무슨 일이 있나요, 황자님?"

"알던 얼굴을 오랜만에 만나니 낯설게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마차에서 엘쟈네스 크로커스에 대한 나쁜 평가를 내리던 레오드릭은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그것이 대공 부부가 눈 앞에 있어서라고 짐작했다. 그는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과 험담을 나누지는 못하는 유형이었다.

레오드릭은 머리가 좋았으나 몸이 병약했던 탓에 떠받들어져 다소 거만한 면이 있었다. 대신 그만큼 단순하고 알기 쉽기도 했다. 두 형들에 비해 다양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라시아 블렌시아를 시골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표현하던 레오드릭이 라시아 블렌시아에게 고분고분해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라시아의 처세술이 좋기도 했지만 레오드릭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라시아는 말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 몇 년만에 만나시는거라고 했나요?"

"네. 그럴겁니다."

엘쟈네스 크로커스가 그를 기억해주었다면 말이다. 레오드릭은 리리엘 크로커스의 가장 절친한 후배로 엘쟈네스 크로커스를 자주 적대했다. 이 곳에 도착해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레오드릭은 그녀가 그에게 어떤 유감이나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레오드릭이 그녀를 적대시하고 독설을 퍼부었던데 비해 그녀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었다. 레오드릭은 그녀가 거만해서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레오드릭의 존재를 보고 약간 놀란 빛을 담은 진갈색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엘쟈네스는 단지 그가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레오드릭은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엘쟈네스에게 있어서 어떤 가치도 없었다. 옆의 렌에게 부드럽게 새처럼 지저귀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넌지시 물었다.

"기분은 어떠셨나요, 황자님?"

"잘 모르겠습니다."

"몇 년만에 만나면 그 전의 감정은 쉽게 잊혀지고는 하지. 미움이라면 더더욱. 라시아. 레오에게 너무 신경을 쓸 필요 없어. 라시아는 너무 상냥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발라디미르 황자가 라시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라시아 블렌시아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녀가 윈터나이트 대공을 망신준 일은 모든 이들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묻혀졌다.

아카데미의 일원들은 귀족이었다. 높은 지위에 앉아 패배한 적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누군가에게 뒤쳐진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하는 법이다. 니콜라이 황태자와 발라디미르 황자만 해도 그러했다.

그들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루카르엔 윈터나이트에게 모든 면에서 뒤쳐지자 결국 그 패배감과 열등감을 완벽히 떨쳐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윈터나이트 대공에게 저열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보고 싶지 않아했다.

라시아는 그것이 우스웠다. 질투심과 열등감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똑같았다. 높은 귀족들도 그랬다. 루카르엔 윈터나이트에 대한 그 일을 제외하고 라시아는 완벽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긋나긋 상냥했고, 그녀의 염색한 긴 금발과 푸른 눈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했다.

얼핏 순진해보이기 쉬웠으나 눈 밑의 점과 어딘지 모를 유혹적인 분위기가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 분위기 덕에 본래 미녀였던 라시아 블렌시아는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여자로 보일 수 있었다. 라시아는 대답했다.

"발. 당신의 동생인걸요. 가족끼리 가깝게 지내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외동인 덕에 형제가 많은 발이 늘 부러웠는걸요."

"라시아. 그런 얼굴은 반칙이야."

"그런 얼굴이라니요?"

라시아는 모른척 의아한 얼굴을 하며 발라디미르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금빛 머리칼 몇가닥이 그녀가 움직이는대로 사르르 내려왔다. 발라디미르 황자는 못말리겠다는듯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라시아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 가지에만 특화된 미인에 금세 질리기 마련이었다. 과도하게 유혹적인 여인에게 그러했고 과도하게 청순한 여인에게 그러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자신의 순진한 아름다운 얼굴과 눈 밑의 점으로 인해 나오는 어딘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남자들을 안달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라디미르 황자 역시도 오랜만에 만나자 그녀에게 금세 다시 빠져들어 여행을 오기 전 그녀를 안고 또 안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루카르엔 윈터나이트는 그녀에게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레오드릭이 말했던 것처럼 매력없는 여자가 아내라면 더더욱. 윈터나이트 대공을 만날 일이 기대되었다.

라시아와 발라디미르 황자가 대공 부부에게로 가자 니콜라이 황태자가 약간 비켜주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했다. 거울을 보며 수백번 수천번을 연습했던 표정과 각도였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아직 황족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윈터나이트 대공 각하와 대공비 각하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라시아 블렌시아."

예상과 다른 기품이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드릭이 말한 것처럼 딱딱하고 고지식한 전형적인 귀족과는 전혀 다른 음성이었다. 라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른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았다.

윈터나이트 대공비는 하얀 여름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얼핏 가벼워보이기 쉬운 옷이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대공비의 머리칼은 아마릴리스 황녀가 말했던 것처럼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붉은빛을 띤 적갈색이었다.

대공비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우아했고 라시아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녀와 함께 선 순간 라시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이 윈터나이트 대공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옆에 선 윈터나이트 대공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대공의 검은 눈과 라시아의 푸른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공은 그저 그 자리에 있는 무언가를 보듯 라시아를 한번 보고 다시 그의 아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을 대하는 눈빛이 현저하게 달랐다. 라시아를 향한 눈이 전과 다른 서늘하고 무기질적인 것이라면 그의 아내를 향한 눈은 다정하고 깊었다. 그는 몇 년 사이 더 남자다워져 있었다. 무어라 말하는 대공의 음성은 낮고 매혹적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라시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고의적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신경쓸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라시아는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아카데미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패배감이었다.

============================ 작품 후기 ============================

^0^!

낙화유수(落花流水)님, M.K님, 아베미하님, 루시퍼서기님, jung59님, 비타민달력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Crimson rose님 팬아트 감사합니다!(너무 늦게 확인했어요;ㅆ;)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