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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나기
"어머, 레오 오라버니. 왜 이러고 있는거야? 루카르엔 오라버니. 오랜만이에요."
그 때 마차에서 내린 아나스타샤 황녀가 나타났다. 아나스타샤 황녀는 레오드릭을 이끌고 대공 부부에게 다가갔다. 아나스타샤는 렌에게 인사한 후 엘쟈네스에게 인사도 없이 가깝게 다가갔다.
라시아의 속내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그녀는 남의 눈치를 전혀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녀는 아름다운 붉은빛을 보자마자 손뼉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감탄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초면이지만 엘쟈네스라는 이름을 허락해주시겠어요? 난 예쁜게 좋아요. 그래서 비 각하가 마음에 들어요. 인사는 지금 할게요. 아나스타샤 아마릴리스에요."
"영광입니다. 황녀 저하. 엘쟈네스 윈터나이트입니다."
라시아가 입술을 약간 더 깨물었다. 아나스타샤 황녀는 제멋대로였다. 그렇기에 라시아 블렌시아를 친우로 삼고 남작 가문이었던 블렌시아를 자작 가문으로 승격시켜주었지만 반면 라시아가 하려는 일을 종종 의도치 않게 방해하고는 했다.
아나스타샤 황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았다. 그 누구도 황녀를 통제할 수 없었다. 아직 발라디미르 황자와 결혼하지 않은 라시아는 그녀에게 어떤 충고나 조언도 할 수 없었다.
황실의 어리광쟁이 막내인 그녀가 많은 호감을 표시하자 황족들은 엘쟈네스를 조금 더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엘쟈네스는 우아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옆에 선 레오드릭에게도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군요. 황자 저하."
"오랜만입니다. 엘쟈네스... 윈터나이트."
레오드릭은 어정쩡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레오드릭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적었고,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는 리리엘 크로커스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과만 다녔기에 그의 사교술은 부족한 편이었다. 그의 부족한 대인관계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레오드릭은 아카데미에서 나쁘게 헤어졌던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를 몰라 그저 쩔쩔맬 뿐이었다. 그는 어설펐다. 반면 엘쟈네스 크로커스는 완벽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에 대한 호의 비스무리한 감정이 있었다. 황족의 일원에게 표하는 존경과 호의였다.
대공 부부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이 순간 라시아 블렌시아의 존재감은 둘의 존재감에 묻혀져버리고 말았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입술을 티나지 않게 깨물며 가져온 드레스와 보석들을 생각했다. 예비 황자비에게 황실에서 내리는 물품들은 모두 아름답고 진귀한 것들이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외모나 분위기만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다닐 시절 꾸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의 여왕인 루이자 바이올렛보다 더 아름다웠다는 것은 얼마나 유명한 사실이던가. 윈터나이트 대공은 그녀를 바라보지조차 않고 있었다. 서늘한 미남자는 집사에게 시간을 듣고는 모두에게 말했다.
"집사와 시녀장들이 여독을 풀도록 도와줄겁니다. 저녁식사는 별장의 연회장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며칠 후부터는 식사에 참여하겠습니다."
황족들은 그의 말에 대답하고 가벼운 인사를 건넨 후 집사를 따라 이동했다. 며칠 후부터 함께 하겠다는 말은 사람에게 지친 황족들에게 며칠의 휴식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겠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여름이면 반복되어온 작은 관습이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바라보았다. 렌의 눈이 아마릴리스 황녀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엘쟈네스를 보려던 그의 눈이 라시아 블렌시아의 눈과 마주쳤다. 몇 초가 지났다. 그는 라시아 블렌시아를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검은 눈은 깊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릴 수 있을텐데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내 라시아 블렌시아를 외면하던 그가 황족들이 떠나는 순간에 그녀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옆에 선 대공비는 그의 이런 시선을 모를 것이리라. 라시아 블렌시아는 대공이 몇 년 사이 더 수려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쪽에서 대공만한 미남자가 없을 것이다. 검술과 재력 또한 그랬다.
그가 권력에 조금이라도 더 욕심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런 점이 아까웠다. 그녀는 돌아서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걸었다. 대공이 쳐다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렌. 무슨 생각을 하나요?"
엘쟈네스는 라시아 블렌시아를 바라보는 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타인을 대할때 그의 선은 정중하고 명확하게 그어진다. 그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그가 선 안에 들여놓는 대상은 엘쟈네스 뿐이었다. 엘쟈네스를 바라보는 렌의 눈에 다시 엘쟈네스를 향한 애정이 깃들었다. 렌은 말했다.
"정말 이상합니다."
"무엇이요? 라시아 블렌시아와 관련된건가요?"
"그녀를 보면 마음이 아프거나 불쾌하고 부끄러울 줄 알았습니다. 혹은 고통스러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군요."
"아카데미의 일과 그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저 지난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엘쟈가 가장 중요합니다. 황제 폐하가 앞에 있는데도 엘쟈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그랬는걸요."
엘쟈네스는 렌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웃는 엘쟈네스가 사랑스러웠다. 부부는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황족들이 며칠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별장과 그 주변에는 타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렌은 그 사실에 기쁘다며 엘쟈네스의 귓가에 나직히 엘쟈네스를 안고 싶다는 말을 속삭였다. 엘쟈네스는 렌에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그러고 싶노라고. 부부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별장에 도착한 라시아 블렌시아는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나. 세상에."
"라시아. 마음에 들어?"
"너무나도 아름다워요. 발."
라시아 블렌시아의 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럴 때의 그녀는 순수해보이고는 했다. 발라디미르는 라시아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윈터나이트의 별장은 대대로 황족들이 사용했기에 극도로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지어져 있었다.
윈터나이트의 본 저택보다 더 큰 별장은 하나의 성과 다름없는 내부를 갖추고 있었다. 황성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윈터나이트만의 디자인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욕조와 발코니에 있는 아름다운 커텐, 바깥의 아름다운 녹음을 보던 라시아는 끊임없이 감탄했다.
그녀의 감탄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윈터나이트 별장의 화려한 내부와 아름다운 세공품들, 바깥의 호수와 윈터데이 꽃밭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아름답기도 했으나 황실에서 쓰는 물품들보다도 훨씬 좋았다.
단점이라면 윈터나이트의 영지가 북쪽 끝이기에 사교계와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수도에 비해서는 지루하고 따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이번 휴가에 따라온 자신의 전속 시녀를 불렀다.
"아니타. 가져왔던 팩들을 모두 풀어놔. 오늘부터 사용할테니까."
"알겠습니다. 아가씨."
"라시아. 여기 와서도 관리를 계속하려고?"
"당신에게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단 말이에요. 발."
라시아는 발라디미르 황자에게 살며시 몸을 기대었다. 미녀인 그의 약혼녀가 기대자 그는 허술한 얼굴을 했다. 라시아 블렌시아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라시아는 타인이 자신보다 외모로써 주목받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무기가 바로 그녀의 순진하면서도 퇴폐적인 미모였기 때문이다.
또한 윈터나이트 대공을 의식해서도 있었다. 그녀가 이번에 가져온 화장품들은 아나스타샤 공주가 쓰는 것보다도 좋은 것들이었다. 이것들을 사느라 엄청난 무리를 했으나 상관없었다. 이것들이 그녀를 빛나게 해줄테니까.
윈터나이트 대공마저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발라디미르 황자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척 넌지시 물었다.
"발. 누군가가 발에게 상처를 준다면 발은 어떻게 할건가요? 용서가 최고의 복수라는 말이 있잖아요."
"최근 사교계에서 일어난 라일락 영애의 사건을 말하는거지? 나라면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상처는 결코 잊을 수 없지. 라시아. 나도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들의 몫이야."
"고마워요. 발."
가르쳐주어서. 그래. 윈터나이트 대공이 그녀를 완전히 잊었을리 없었다. 라시아 블렌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남긴 상처를 그가 쉽게 극복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진채 태어난 자들은 한 번 추락하면 그 충격에 빠져 다시 올라오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대공이 그녀를 바라본 사실에 대해 몇 가지 유추를 할 수 있었다. 루카르엔 윈터나이트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이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의 상처와 그녀에 대한 감정이 그에게 고스란히 남겨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앞에 라시아가 나타난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는 그녀에게 가운을 입히고 여러가지 팩들을 늘어놓는 시녀에게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며칠 후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윈터나이트 대공은 그녀에게 다시 흔들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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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더 재미있는 법이죠!^0^♥ 미션이 있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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