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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리아로
갑작스러운 저녁 식사 초대장이 날아왔다. 약혼식을 이틀 남긴 날이었다. 크로커스 공작은 아예 공작가에 발조차 들이지 못했다. 크로커스 공작가를 압박하기 위해 아마릴리스 사절단의 여러 인물들이 별채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저택을 수색하지 못한 것은 공작가의 가주인 크로커스 공작이 저택에 없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계속해서 핑계를 대며 며칠째 왕궁에 머물고 있었다. 친우를 만나러 간다던 요하네스 크로커스는 소식이 없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크로커스 공작이 아들을 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았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크로커스 공작이나 공작 부인, 리리엘조차도 요하네스가 간 곳을 몰랐다.
엘쟈네스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공작 부인이 요하네스의 행방을 절박하게 물을때서야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며칠동안 왕가와 크로커스 공작, 아마릴리스 사절단의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저녁 식사 초대장을 들었다. 정식 초대장은 아니었다. 사적인 자리에 초대할때 받는 이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보낸 종류의 초대장이었다. 렌이 물었다.
"엘쟈. 크로커스 저택 본채에서 온 것이 맞습니까."
"맞아요. 여기 어머니의 직인이 찍혀있으니까요. 그런데 렌. 왜 이제 와서 우리를 초대하는걸까요?"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릴리스 사절단 측에서도 별다른 일은 없다고 말했었고요."
초대장을 보낸 곳은 크로커스 저택의 본채였다. 본래라면 귀빈을 맞이한 후 이틀 안에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초대를 할 시기는 지났다. 엘쟈네스는 기대하지 않던 상태였다.
세 영애는 크로커스 공작 부인과 약혼식의 당사자인 리리엘 크로커스에 대한 냉소적인 평가를 하고는 했다. 영애들은 크로커스 공작가에 문제가 생겨 아마릴리스에서 온 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아도 대강 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 공작 부인측에서는 다행일 것이라는 말을 했다.
엘쟈네스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상태였다. 그 정도로 공작 부인은 세 영애와 엘쟈네스, 렌을 껄끄러워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손님들을 잘 모시기는 했으나 엘쟈네스를 피했고 렌의 눈에는 띄지 않으려고 애썼다. 리리엘이 해온 말이 있던 것이다.
엘쟈네스는 그들이 고용인으로서의 업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로벨리아를 떠나면 다시 보지 않을 이들이었다. 이 일은 아마릴리스에 돌아갔을때 정식 항의서에 쓰여져 보내지게 될 것이다.
엘쟈네스는 렌의 무릎 위에 앉은 상태였다. 그는 엘쟈네스의 머리칼을 손 끝으로 어루만졌다. 엘쟈네스는 크로커스 저택의 본채에서 그들을 굳이 부를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 며칠 내내 묻고 싶었던 것에 대해 물었다.
"렌. 아마릴리스 황실은 왜 에너지석의 소유를 제재하나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마릴리스 황실이 에너지석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리 절박하지는 않다고 알고 있어요. 에너지석을 이용한 기계들 중 이제는 에너지석의 도움 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많고요. 이번 일을 보다 깨달았어요. 아마릴리스가 에너지석이 나는 땅을 손에 넣는 것은 에너지석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 국가가 가지는 것을 경계해서라는걸."
"맞는 말입니다. 엘쟈. 황제 폐하는 아마릴리스가 아닌 다른 나라가 에너지석을 가지는 것을 무척 경계합니다."
"왜인가요? 에너지석에 그만한 힘이 있나요?"
"아닙니다. 아마릴리스가 에너지석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세계가 멸망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쪽은 에너지석이 그리 많이 나지 않았다. 또한 난다 해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엘쟈네스는 아카데미 시절 에너지석에 어떤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있지 않을까 연구했으나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궁금했다. 아마릴리스가 다른 나라의 에너지석 소유를 막는 이유에 대해. 렌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두들 마법 전쟁에 대한 것을 배웁니다. 마법이 눈부시게 빛나던 시절 마법 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세계는 황폐화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마법 문명의 모든 것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는걸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겁니다. 그러나 마법 전쟁때 세계가 황폐화 된 것은 마법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아마릴리스와 아마릴리스의 인척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세계는 에너지석에 의해 멸망 직전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마법 전쟁때 당시의 마법사들은 에너지석을 이용한 대전쟁을 펼쳤습니다."
"그 당시에는 에너지석에 마법적인 힘이 있었나요?"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에너지석에는 어떤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과 그 후손의 피가 에너지석의 기운에 저항하기에 모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법 전쟁 이전에는 모든 지배자들이 에너지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릴리스에 전해져 내려오는 에너지석의 가공과 사용법 등의 기술은 그 일부입니다. 로벨리아와 크로커스는 아마릴리스의 기술을 어설프게 가져갔습니다.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은폐되고 아는 자들의 입에서만 전해져 내려온 정보이리라. 엘쟈네스는 아마릴리스 황가의 이능이 기억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단순히 에너지석의 소유권과 에너지석 기술에 대한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렌의 말처럼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엘쟈네스의 단호한 진갈색 눈이 어떤 기억에 닿았다.
"이것도 아룬델과 관련 있는 일까요. 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릴리스의 보안을 뚫고 들어올 정도의 스파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노린걸까요? 왜 로벨리아일까요."
"가설은 많으나 잘 모르겠습니다."
"리나가 보고했죠. 로벨리아에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던 어떤 거슬리는 미약한 마법이 있다고. 그러나 그것이 아룬델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마법이 반응하고, 아룬델의 마법을 계승한 제가 알았을거에요. 요하네스가 사라진 것도 이상하고요. 그 애는 리리엘의 추종자들과 언제나 함께 다녔거든요. 그러나 그들 모두 요하네스의 행방을 몰라요."
"만일 요하네스 크로커스 공자의 곁에 있는 것이 아룬델이라면, 이 곳으로 올겁니다. 엘쟈. 제가 있습니다."
"이제는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렌."
엘쟈네스가 웃었다. 렌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보면 좋다고 느꼈다. 겨울의 마법 때문에 그의 감정의 폭이 크지는 않지만 정의를 붙인다면 이것이 행복이리라. 렌은 엘쟈네스의 손을 잡았다. 함께 있어 다행이었다. 또한 엘쟈네스의 고향으로 함께 와 다행이었다.
결국 엘쟈네스는 저녁 식사 제의에 대해 수락하기로 했다. 엘쟈네스의 말을 들은 세 영애 역시도 수락의 답을 보냈다. 엘쟈네스는 저녁 식사에 대한 준비를 했다. 크로커스가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치장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엘쟈네스는 드레스 중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녹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렌 역시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의 정장을 입었다. 평상복과 비슷한 모양의 옷이었다. 크로커스 공작 부인과 리리엘의 뜻은 참석을 하면 알 수 있으리라.
세 영애는 먼저 저택으로 출발한 후였다. 대공 부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엘쟈네스는 차가운 외모와 달리 눈을 찡긋거리던 세실리아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들을 안내하던 시종은 부부의 모습을 흘끔거렸다.
윈터나이트 대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떠난 첫째 공녀를 보는 것도 일 년 만이었다. 시종은 계속해서 엘쟈네스가 이렇게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리리엘과 어느정도 비슷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적갈색의 머리에서 붉은빛이 아름답게 빛났다. 간혹 보이는 우아한 미소는 예전과 다르게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마침내 시종이 식당 앞에서 멈추었다.
"이 곳입니다."
"고마워요."
관례적인 칭찬이었다. 다른 나라에 온 귀빈으로서 한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종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리리엘 크로커스를 볼 때보다도 더 아찔한 느낌이었다. 시종이 정신을 차린 것은 옆에 선 서늘한 남자를 보면서였다.
윈터나이트 대공은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압박감이 있었다. 그의 큰 키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대공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으나 시종은 윈터나이트 대공이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침내 엘쟈네스와 렌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긴 테이블에는 크로커스 공작 부인과 리리엘, 세 영애가 앉아있었다. 식사가 나오기 시작한 후였다. 엘쟈네스는 공작 부인에게 인사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
"저녁 식사를 이렇게 함께하게 되어 기쁘구나."
공작 부인은 미소지었으나 그 미소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공작 부인이 원해서 부른 것은 아니다. 엘쟈네스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리리엘은 아름다웠다.
엘쟈네스는 리리엘과 함께 지내며 리리엘의 외모에 대해 많이 무감각해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명 아래에서 긴 금발이 빛났다. 리리엘은 평소와는 달리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답답한 것을 좋아하지 않던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영롱한 녹색의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움직였다. 리리엘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는 세 영애마저도 눈부시게 빛나는 리리엘을 바라볼 정도였다. 엘쟈네스는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리리엘."
"네. 그러네요. 언니."
리리엘의 태도는 이상했다. 리리엘은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대답할 뿐이었다. 엘쟈네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리리엘이 떠올리는 것은 엘쟈네스가 아닌듯 했다.
엘쟈네스는 리리엘을 주시했으나 곧 포기해버렸다. 리리엘은 엘쟈네스와 너무나도 다른 인물이었다. 대화를 시도하다 마찰하게 되면 손해이리라.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리는 모두 훌륭했으나 식탁에 앉은 사람 중 음식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방장에게 찬사를 건넬 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식당은 조용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말을 잇는 사람은 없었다.
후식을 먹을 차례였으나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탓에 요리사는 후식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공작 부인이 엘쟈네스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엘쟈. 중대하게 물어볼 것이 있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니? 십 분 정도면 다시 식당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단다."
"대공비 각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면 저희도 함께 가는 편이 좋겠네요. 저희의 입은 무거우니 비밀은 보장하죠. 그게 아니라면, 비 각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삼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레이라가 말했다. 그녀는 웃지 않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세 영애를 눈에 띄게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어색한 목소리로 허가했고, 세 영애와 엘쟈네스는 공작 부인을 따라 나갔다. 식당 안에 남은 것은 렌과 리리엘 뿐이었다.
리리엘은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대공이 이미 결혼했고 그 상대가 엘쟈네스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대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모두들 나가버렸네요."
"그렇군요."
"후식을 먹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 아내 또한 괜찮다고 생각할겁니다."
대공은 리리엘에게 정중하고 의무적인 답변을 건넸다. 리리엘이 어떤 일을 해도 대공의 눈은 리리엘에게 제대로 향하지 않았다. 리리엘은 대공의 눈길이 엘쟈네스가 앉아있던 자리에 닿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에 반면 검은 눈은 리리엘을 무심히 담아낼 뿐이었다.
리리엘은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에 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내내 대공에 대한 생각만을 해왔다. 리리엘은 애타는 마음으로 다시 말을 걸었지만 대공은 정중하게 선을 그을 뿐이었다.
마침내 리리엘은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대공은 리리엘의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왜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걸까. 리리엘은 애가 타 대공에게 물었다.
"제가 아름답지 않나요? 빛난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제 눈에는 오로지 아내만 빛납니다."
검은 눈이 리리엘에게 닿았다. 대공은 처음으로 리리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사실 리리엘은 현실 세계의 인물 여럿을 참조했슴니다. 픽션과 설정상 리리엘에 대한 것이 과장되었으나, 많은 여러 가지가 사실 기반(...)임니다. 그러해요^0^!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남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이상한 점을 잘 눈치채지 못하고 밝고 활기차고 거기다 예쁘기까지 하니까 리리엘과 닮은 사람을 동경한다는 것이 있겠네요!
눈내린어느날님, M.K님, jung59님, NikeTa님, 동동22님, 에반게이온님, 으뉴H님, 미르☆”님, 마른땅수준님, 사히린님, 뚱이님♡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