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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변화한다-95화 (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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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식

리리엘과 칼레스 왕자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약혼식을 치르는 것은 평생을 상대와 함께 하겠다는 뜻이었다. 많은 이들 앞에서 결혼 전 두 사람의 인연을 알리기에 약혼식은 결혼보다도 신성하게 여겨졌다. 그렇기에 크로커스가는 이른 새벽부터 들뜬 상태였다.

가문의 모든 고용인들과 시종, 시녀들은 칼레스 왕자가 보내온 수많은 꽃들을 보며 왕자와 리리엘의 영원한 사랑과 낭만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던 리리엘이 아가씨가 되어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크로커스의 집사는 남몰래 눈물을 조금 훔쳤으나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윈터나이트 기사단에게의 패배로 한동안 풀이 죽어있던 크로커스 기사단마저 오늘만은 들떠 있었다.

조용한 곳은 별채 뿐이었다. 물론 별채에도 꽃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약혼식의 신부의 앞날을 축하하는 의미였다. 바깥의 날씨는 가을이었으나 크로커스의 건물 안에는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엘쟈네스는 방안 가득 장식되어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꽃을 좋아했으나 방 안 가득 꽂힌 꽃들은 취향이 아니었다. 꽃들 대개가 리리엘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엘쟈네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단추를 채우던 렌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 애가 많이 충격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 말입니까."

"네. 보통 때였다면 리리엘은 꽃을 거절하고 대신 그 돈으로 다른 선행을 베풀기 위해 애썼을테니까요. 이렇게 조용한게 오히려 이상하네요. 일 년 사이 그 애가 바뀐걸 수도 있겠지만요. 물론 조용하니 좋긴 하네요."

엘쟈네스는 우아하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치장을 하고 있었으나 엘쟈네스와 렌, 화이트 기사단은 제복과 정장, 드레스 안에 무기를 감추는 중이었다.

아직도 에너지석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검의 소지 또한 제한되었다. 왕족에 대한 위협을 없애자는 요지도 있었지만 아마릴리스의 사절단에 포함된 기사단이 검을 들고가는 것은 정치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화이트 기사단은 옷 속에 단검을 교묘히 감출 수 밖에 없었다. 아룬델은 왕가에 있다. 엘쟈네스는 간혹 왕궁에 있는 아룬델의 상념을 읽을 수 있었다. 아주 간혹의 순간이었다.

아룬델은 대개 무감정한 상태로 있었으나 황홀한 감정을 느낄 때도 있었다. 겨울을 떠올릴 때였다. 아룬델은 늘 약혼식만을 기다렸다. 엘쟈네스는 어느 순간부터 아룬델이 고의적으로 엘쟈네스에게 의지를 흘려보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엘쟈네스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룬델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익혔으리라. 그러나 엘쟈네스는 아니었다. 엘쟈네스는 강대한 마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차원의 마법 뿐이었다. 엘쟈네스는 말했다.

"리나는 로벨리아에 도착하자 이상한 것들이 느껴졌다고 했어요. 아룬델은 아닐거에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뭘까요. 며칠 사이 점점 더 기운이 강해졌어요. 렌. 느껴지나요?"

엘쟈네스는 엘리나가 말한 미묘한 감각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극도로 미세하고 잘 느껴지지 않는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희박한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로벨리아 전역에 깔린 기운이 점점 불안정한 폭으로 흔들리기 시작해서였다.

안개처럼 로벨리아의 전역에 스며들어있던 무언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법은 아니었다. 마법이라기에는 두서가 없었다. 마치, 아룬델의 마법처럼. 로벨리아의 사람들은 기운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엘쟈네스 또한 처음에는 이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엘쟈네스가 떠나기 전부터 존재했는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이것을 눈치챈 자들은 윈터나이트의 일원들 뿐이었다. 렌은 손 끝을 들어 공기를 만져보았다.

"떨리는군요."

불안정하게 파르르 떨리는 미세한 기운이 흩어졌다. 렌에게 해를 끼칠 종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윈터나이트의 일원들이 가진 겨울의 마법에 닿는 순간 너무나도 쉽게 소멸했다.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자세한 것은 약혼식에 참석하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엘쟈네스는 렌에게 다가갔다. 엘쟈네스가 입은 드레스는 화사한 크림 색상으로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렌은 거울앞의 탁자에 놓여있던 목걸이를 뒤에서 걸어주었다.

엘쟈네스의 목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렌은 그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엘쟈네스의 손을 들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입을 맞추었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름답습니다."

"렌. 사실 크림색 드레스와 다이아몬드 장신구가 취향인거죠?"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실 엘쟈는 어떤 모습이든 늘 아름답습니다."

렌은 말하며 엘쟈네스의 목걸이 줄을 약간 당겨 모양을 고쳐주었다. 엘쟈네스는 렌의 정장의 매무새를 다듬어주다 웃어버렸다. 렌이 속삭인 농담 때문이었다. 가을이었기에 장갑은 낄 필요가 없었다. 장갑을 끼는 것은 약혼식의 주인공인 여성 혼자여야했다.

이내 두 사람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약혼식은 정오에 있었다. 출발할 시간이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들뜬 음성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많은 고용인들이 공작 부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 왕궁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혹은 일찍 휴식을 취하러 갔거나.

크로커스와 사이가 좋지 않을지언정 아마릴리스는 엄연한 친목의 성향을 띤 사절단이었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든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한 낯을 해야했다.

세 영애는 먼저 황궁으로 출발해 사절단과 합류한다고 했다. 엘쟈네스와 렌은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주변에는 화이트 기사단이 있었다. 그들은 윈터나이트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블랙 기사단이 대외적인 자리에서 입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식 제복에 당황한 화이트 기사단은 옷이 구겨질까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시골 농부 출신인 기사 중 하나는 제복의 안에 넣은 단검 때문에 옷이 찢어질까 염려하고 있었다. 엘리나가 그에게 무어라 말하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엘쟈네스는 마차의 창을 통해 그 광경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웃고 있었으나 모든 이들이 긴장한 상태였다. 전대 화이트 기사들은 전대 대공과 함께 무수한 아룬델들을 죽여왔다. 그들마저도 해친 아룬델이 있다.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적이었기에 싸움의 승패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히려 더 의연한 태도를 취했다. 윈터나이트의 기사들도 마차에 올랐다. 이내 마차가 왕궁으로 향했다.

크로커스에만 있던 엘쟈네스는 알지 못했지만 로벨리아의 젊은 귀족 중 많은 인원들이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격한 반응을 한 것은 리리엘 크로커스의 추종자들이었다.

리리엘 크로커스는 겉보기에는 여전히 완벽했다. 리리엘은 보는 사람을 녹아내리게 할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성격 또한 다른 영애들과는 달랐다. 그러면서도 검을 잘 썼고 검을 내려놓으면 밝고 활발해졌다.

그녀에 대한 나쁜 소문이 잠시 돌았지만 칼레스 왕자와의 약혼식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여론이 바뀌었다. 많은 이들이 리리엘 크로커스와 칼레스 로벨리아 왕자의 약혼을 축하해주었다.

귀족들은 리리엘 크로커스가 나오기 한 시간 전부터 커다란 왕궁의 홀에 모여있었다. 화려한 넓은 공간은 백합과 하얀 로벨리아로 장식되어있었다. 순결과 영원을 의미하는 꽃들이었다. 화려한 문양과 금실로 수놓아진 레이스 길은 아름다웠다.

귀족들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아마릴리스 사절단으로 전환되었다 엘쟈네스 윈터나이트에게로 넘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엘쟈네스에 대한 악감정은 희미하게 지워졌다.

눈 앞에서 사라지자 더 이상 전처럼 큰 관심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하네스 크로커스보다 나이가 적은 호기심 많은 영애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영애들. 아마릴리스의 사절단이 왔을때의 모습을 보셨나요?"

"정말로 아름다웠죠. 결혼이 그녀를 꽃피게 한걸까요?"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름다워진다고도 하잖아요. 하지만 전 생각이 달라요."

"뭔데요, 영애?"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와 엘쟈네스 윈터나이트 대공비 각하는 자매잖아요!"

"아... 그렇긴 하죠. 두 사람이 너무나도 다르지만요."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저는 두 사람이 같은 피가 흐르는 자매기에 둘 다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본 엘쟈네스 윈터나이트 대공비 각하는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에게 견주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는걸요."

"그런걸까요?"

"당연하죠! 본래도 아름다웠지만 대공비 각하는 나이가 들며 그 아름다움이 나오는 분이었던거에요."

공상을 많이 하는 영애가 밝은 어조로 말했다. 영애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느정도 납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리리엘 크로커스의 자매다. 생각하자 비정상적으로 매혹적으로 빛나던 그 모습을 납득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로벨리아의 많은 이들이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단지 먼 발치에서 구경만 했을 뿐이지만 엘쟈네스 윈터나이트가 나타났을 때 그 압도적인 분위기와 시선을 끄는 빛나는 아름다움에 많은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리엘 크로커스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충격적인 느낌이었다. 어린 영애들이 다소 시끄럽게 이야기를 할 때 리리엘 크로커스의 추종자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리리엘 크로커스의 결혼에 충격을 받아서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한 구석에 모여있던 리리엘 크로커스의 추종자들은 피로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한 영식이 입을 열었다.

"결혼을 해서도 우리의 상황은 달라지는게 없겠죠."

"듣는 귀가 많습니다."

"지금은 듣지 않을겁니다. 거기에 틀린 말도 아니지요. 타인에게만 말하지 않는다면 칼레스 전하께서도 눈감아주실겁니다."

그들은 일 년간 리리엘 크로커스에게 시달려왔다. 리리엘 크로커스가 요구하는 일을 했고, 리리엘 크로커스의 수습을 했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한 시기는 봄 쯤이었다.

그 때부터 왕이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왕은 그토록 반대했던 리리엘 크로커스와 칼레스 왕자와의 결혼을 쉽게 허가했다. 본래였다면 왕은 혁명 사상에 물든 백성들과의 타협을 위해 리리엘 크로커스를 비로 들이는 대신 많은 지참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추종자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리리엘 크로커스의 금발만 봐도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요하네스 크로커스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크로커스라는 가문 자체가 끔찍했다. 모인 영식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억지로 움직이니 반발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영식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솔직히, 저는 엘쟈네스 크로커스. 아니. 이제는 엘쟈네스 윈터나이트라고 해야겠군요. 그녀가 왜 리리엘 크로커스와 친하지 않은지에 대해 늦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

영식 중 몇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힐끔 눈치를 보았다. 추종자로 모인 영식 중 엘쟈네스 크로커스가 떠난지 일 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엘쟈네스 크로커스를 흠모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식들이 있었다.

사실은 엘쟈네스 크로커스에게 끌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뒤늦은 사랑을 고백하는 영식도 있었다. 이들은 쉽게 누군가를 우상시하려는 면모가 있었다. 그들은 엘쟈네스 크로커스를 배척하던 것 중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엘쟈네스 크로커스를 그리워했다.

입을 열려던 이들은 한 구석에 서 있는 란제크 카멜리아 백작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란제크 카멜리아 백작은 오만하고 완벽한 남자였다. 또한 권세 높은 가문의 가주였다. 사람들은 그가 리리엘 크로커스의 약혼식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추종자 영식들 사이에서는 엘쟈네스 크로커스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었다.

란제크 카멜리아가 엘쟈네스 크로커스를 함부로 부른 이들에게 반드시 난동을 부렸기 때문이다. 영식들은 입을 다문채 다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홀 안에는 많은 귀족들이 모여있었다. 저 멀리 크로커스 공작 부인과 공작이 보였다.

수많은 고위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은 윈터나이트 대공 부부였다. 커다란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윈터나이트 대공 부부와 그 뒤의 윈터나이트 기사단이 들어오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장엄하게까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리리엘 크로커스의 추종자였던 영식들마저도 넋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 순간 엘쟈네스 크로커스가 진짜 보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리엘 크로커스는 얼핏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난 돌에 불과했다. 돌처럼 보였으나 그것을 깎아내자 마침내 빛나는 보석이 된 것은 엘쟈네스 윈터나이트였다.

진짜는 엘쟈네스 크로커스였다. 그들은 보석을 내버려두고 돌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리리엘 크로커스를 숭상하던 영식들은 엘쟈네스 윈터나이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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