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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식
대공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중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 중 몇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고 말았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그제서야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볼 수 있었다.
잠시나마 흐릿했던 초점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엘쟈네스를 보는 동안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란제크는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과 아마릴리스 황실의 예복. 대공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와 엘쟈네스를 주목하고 있었다. 란제크답지 않은 짓이었다. 사람들의 눈과 입은 작은 일도 부풀려 큰 실수처럼 퍼뜨리고는 했다. 란제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주목마저도 모른채 엘쟈네스를 붙잡고 있던 것이다.
늦게서야 깨달은 사랑은 오만한 백작을 침식시켰다. 손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엘쟈네스 뿐이었다. 그러나. 카멜리아 백작은 엘쟈네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귀족이었다. 그것이 패인이었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윈터나이트 대공과의 신분 차이마저 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공이 카멜리아 백작에게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대공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몇몇 귀족들은 소문을 속삭이는 것도 잊은채 숨을 죽이고 대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은 가장 먼저 대공비에게 물었다. 검은 눈은 고요했다.
"괜찮습니까."
"아프지 않아요. 렌."
란제크 카멜리아를 향할때와는 현저히 다른 태도였다. 대공은 대공비를 위해 차분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다정한 곳이 있었다. 엘쟈네스는 렌의 손 위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진갈색 눈동자에는 신뢰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읽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카멜리아 백작과 엘쟈네스 윈터나이트의 추문에 관심이 많았다. 란제크 카멜리아 백작이 이상해질때부터 소문에 민감한 무리는 저열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것이 기정사실화 되려는 순간이었다. 몇몇 이들은 대공이 주먹을 날리는 식의 천박한 대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양각색의 이들이 모이는 남쪽 사교계의 특성 상 치정으로 인해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고위 귀족의 아내에게 수작을 거는 일만큼 고위 귀족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보다 흥미진진한 일은 없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은 재미없는 반응이라는 말을 했으나 윈터나이트 대공 부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결혼한 부인들은 대공비만을 바라보는 대공의 모습에 은근한 부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쪽의 남자는 다 저러냐는 은근한 들뜬 질문을 하는 영애들도 많았다. 델피늄으로 인해 정세가 혼란스러워지게되며 여성의 인권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전쟁이나 내란이 자주 일어나며 남성의 무력이 중요시 되었기 때문이다. 이능을 받은 여성은 대우받았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델피늄의 불완전한 혁명으로 인해 도리어 찾아오게 된 수많은 부작용 중 하나였다.
대공은 대공비를 자신과 동등한 상대로 대우하며 철저히 존중했다. 또한 대공비를 위했다. 대공이 카멜리아 백작에게 다가간 것은 엘쟈네스 윈터나이트에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사람들은 대공이 화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북쪽의 사람이기에 반려자에게 접근하는 남성 귀족에 대해 둔감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대공이 인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대공이 란제크 카멜리아를 불렀을 때였다.
"란제크 카멜리아 백작. 고하십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란제크 카멜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대공은 고요했다. 그러나 란제크는 대공의 압박감에 눌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다. 렌은 눈 앞의 남자를 보았다.
렌은 란제크 카멜리아를 알고 있었다. 엘쟈네스에 대해 렌이 모르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는 엘쟈네스의 전 약혼자였으며 동시에 엘쟈네스의 주변에 가장 오래 머문 남자였다. 그러나 렌이 그를 명확히 인지한 것은 로벨리아 왕궁에 도착한 후 그의 눈빛을 보면서였다.
카멜리아 백작은 엘쟈네스를 강렬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엘쟈네스를 미련과 집착이 가득한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몰랐다. 엘쟈네스는 사랑스럽게 웃었으나 렌은 그 순간 란제크 카멜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렌은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렌이 묻는 것에 대해서는 란제크 카멜리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고하라는 하대의 표현에 반박하지 못한 것이 그 증거였다. 심리전의 패자는 정해져있었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을 답을 생각했지만 떠올릴 수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대공을 올려다보며 상냥한 얼굴을 하던 엘쟈네스를 본 순간부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정치적 사회적 시선에 맞춰 행동했으나 충동대로 행동하고 말았고, 엘쟈네스에게 다가갔으나 대중의 시선을 완전히 신경쓰지 않고 행동하지 못했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자신이 듣기에도 머저리같기 그지 없었다.
"잠시 옛 인연에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란제크 카멜리아를 굴욕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를 고고한 백작으로 보던 사교계의 많은 이들은 그를 흥밋거리로 보고 있었고, 신분의 차가 났기에 엘쟈네스를 데려간 대공에게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가장 처참한 사실은 엘쟈네스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였다는 것이 아닌, 엘쟈네스가 대공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서로를 향한 신뢰만이 가득했다. 엘쟈네스는 행복해보였다.
그는 그 앞에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대공과 엘쟈네스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다. 그가 개입할 틈은 없었다.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란제크였다면 동일한 상황이 일어났을때 당장 엘쟈네스에게 접근한 이에게 보복했을 것이라는걸. 대공은 엘쟈네스의 안전을 우선으로 살폈다. 그것이 그와 대공의 차이였다. 란제크는 절대 대공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대공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비에게 별 이상이 없던 것에 감사하십시오."
카멜리아 백작은 정말로 운이 좋았다. 이 순간 그것을 가장 강하게 느낀 이는 란제크 카멜리아 본인이었다. 대공의 검은 눈에 비치던 새파란 빛을 기억했다. 대공은 타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지 않았으나 란제크 카멜리아를 몰락시켰을 것이다.
여자 하나 때문에 그런 판단을 했다는 세간의 비난은 대공에게 고려할 가치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서늘해 인간미가 없던 대공이 유일하게 인간다워지는 것이 엘쟈네스의 앞에 설 때였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 본인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 본능이 원초적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리리엘 크로커스의 다른 추종자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신분적인 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숙이는 것이 아니면 내려가지 않던 고개가 자의로 미약하게 떨리며 내려갔다.
"감사합니다. 각하."
에너지석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시점이다.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란제크 카멜리아는 패배감을 그렇게 포장했다. 쓰디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렌은 카멜리아 백작이 고개를 드는 동안 엘쟈네스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엘쟈."
엘쟈네스는 렌의 손을 잡았다. 부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렌에게 깃든 겨울의 마법은 로벨리아의 많은 이들에게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심었다. 로벨리아의 귀족들 중 엘쟈네스를 함부로 흘끔거리는 이들은 이제 없었다.
렌은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소유욕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엘쟈네스는 렌의 유일한 반려였다. 그 누구도 엘쟈네스를 감히 탐낼 수 없었다. 렌의 눈을 본 로벨리아의 많은 남자들은 고개를 돌렸다.
엘쟈네스는 그의 것이다. 그가 엘쟈네스의 것이듯. 렌은 엘쟈네스에게 말했다.
"누군가 엘쟈를 건드린다면 말하십시오."
"말하면 어떻게 되나요, 렌?"
"큰일이 납니다."
마지막 속삭이는 말에 엘쟈네스가 렌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렌의 말은 반쯤 진담이었다. 엘쟈네스는 렌을 올려다보았다. 일 년 사이 로벨리아의 사람들이 변하듯 엘쟈네스도 변했다.
엘쟈네스는 이제 의미없는 사람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그 변화의 시작에는 렌이 있었다. 렌이 변했고 엘쟈네스가 변했다. 엘쟈네스는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렌."
엘쟈네스는 서늘한 얼굴의 렌이 만족스러워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공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나는 갑작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동처럼 무언가가 지나갔다. 순식간에. 곧 왕궁의 시종이 들어와 큰 소리로 외쳤다.
"식의 주인공들이 입장합니다!"
신성하게 여겨지는 약혼식이었기에 로벨리아 왕가의 일원들에 대해 따로 알리지는 않았다. 엘쟈네스의 눈에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이미 시집을 간 셋째 공주가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크로커스 공작 부인 역시 다소 피로에 지친 얼굴로 앉아있는 상태였다.
상석에 놓여진 화려한 의자에는 왕비가 앉아있었다. 옆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왕은 축복을 위해 가장 마지막에 등장할 것이다. 어느새 홀의 앞쪽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홀의 앞쪽으로 쏠렸다.
시녀들에 의해 순백의 카펫이 놓여졌다. 단 한 번도 밟지 않은 순결을 뜻하는 하얀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곳곳에 꽂힌 백합들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정절을 뜻하는 백합이 피어나 만개했다. 마법을 가진 이들의 산물이었다.
이내 관례에 따라 칼레스 왕자가 먼저 등장했다. 리리엘이 나타난 것은 칼레스 왕자가 나타난 직후였다. 리리엘은 새하얀 드레스에 하얀 베일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순결한 약혼식의 주인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엘쟈네스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겨울의 마법을 받은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홀 안에서 아룬델의 마법과도 닮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엘쟈네스와 렌은 리리엘을 보았다.
사람들이 리리엘을 향해 환호하면 환호할수록 그것이 짙어지고 있었다. 아룬델. 얼어붙는듯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날려먹은게 이번화 다음화인데 다음화 생각이 도저히 안나서 절반정도까지 썼어요 ㅇ<-< 내일 아침 7시 전후에 올리겠씀니다 ;ㅆ; 기적은 없었어요!
+)혹시나 싶어서 근황 올리자면 안녕하세요! 작가에오! 하루하루 퇴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0^♥! 제가 뭘 하는 중이냐면 1월 말 내로 전체 절반 정도의 퇴고분을 출판사쪽에 넘겨주어야해서 수정하고 수정하고 고치고 있슴니다.
조아라 연재본이랑 달라지는건 조아라는 아무래도 웹에 일일연재다보니 진도를 빠르게 빼야한게 있거든요. 그래서 욕조씬 등 에피소드가 많이 들어간다는거...? 이제 어머니가 주인공들을 기억하니 중복 서술 중 다수가 빠질거에요.
그리고 초반부터 sf인걸 감추기 급급한게 많이 보여서 이제는 아예 드러내놓고 쓰고 있슴니다. 물론 그는 마법을 전해줬다 라고 쓰고 그는 자가증식형 생체나노캡슐을 나누어주었다 이렇게는 쓰지 않을거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