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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델
시종들은 축복을 의미하는 금빛 종을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에서는 백합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성스러운 약혼식과 같았다.
모든 이들이 이 순간만큼은 한 마음이 되어 성스러운 약혼을 올리는 두 주인공을 축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은 아수라장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두 주인공에게서 과할 정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 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화이트 기사단이 하나둘씩 대공부부를 호위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홀 앞쪽의 두 주인공에게 실려 있었다. 그들은 마치 홀린 사람들 같았다.
엘리나가 엘쟈네스와 렌에게 가 고개를 숙였다. 엘쟈네스는 엘리나의 보고를 계속해서 받았었다. 이것이 엘리나가 말하던 묘한 감각일까. 엘쟈네스는 손을 들어올렸다. 실체화되지 않은 마법들은 엘쟈네스의 손을 쉽게 빠져나갔다. 마력은 분명하게 만져졌다. 뿐만 아니라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리나. 자꾸만 느껴진다는 감각이 이것이니?"
"네. 마님."
엘리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겨울의 마법은 잠잠했다. 감각에 걸리는 마법은 엘리나를 위협하지 않았다. 또한 해가 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겨울의 마법은 침묵한채 잠든 상태였다. 엘쟈네스를 지켜야한다. 엘리나는 어딘가에 적이 있는 것처럼 새하얀 홀을 바라보았다.
약혼식보다는 마치 거대한 종교의 집회를 보는 것 같았다. 리리엘의 새하얀 드레스는 어딘가 인위적인 성스러움을 띠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하나가 되었다. 리리엘의 금빛 머리칼은 황금을 녹여 만든듯 찬란했다. 영롱한 녹색의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에도 비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리리엘 크로커스의 동작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그녀를 경배하고 찬양했다.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의 약혼식을 축복하는듯 보였으나 군중의 분위기는 어딘가 뒤틀린데가 있었다. 사람들은 리리엘 크로커스를 여신처럼 섬기고 감동하고 들떠했다.
로벨리아의 많은 귀족들이 이 분위기에 동조했다. 그들이 신도처럼 리리엘을 숭배하는데도 아마릴리스의 사절단은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면 동조할수록 마력이 짙어졌다.
그 마력을 들이마신 아마릴리스 사절단의 사람들마저도 이제는 넋을 잃고 리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허공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간의 믿음이 곧 힘이 되리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엘쟈네스는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려왔던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 아니었으나 여자의 것도 아니었다. 사악했으나 어딘가 애타듯 간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엘쟈네스 뿐이었다. 렌과 화이트 기사단은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이 모여 외칠수록 우리의 힘은 커지리라.]
[사랑은 복종을, 복종은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
목소리와 함께 홀 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리리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엘쟈네스가 로벨리아에서 늘 봐왔던 광경이었다. 그러나 리리엘의 아름다움은 만들어진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엘쟈네스에게만 들려오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겨울 아룬델의 저택에 들어갔을때 들려오던 것들. 엘쟈네스는 멈칫했다. 수많은 아룬델들의 아우성을 합친다면 그런 목소리가 될 것이다.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믿음과 힘. 아룬델. 엘쟈네스는 렌에게 물었다.
"렌. 빠르게 대답해줘요. 아룬델은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나요?"
"제가 어릴적에는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엘쟈네스의 말에 대답하던 렌은 앞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지금까지 있던 일들이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리리엘을 추종하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리리엘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일들은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엘쟈네스는 말했다.
"크로커스가의 선조는 겨울의 땅으로 가 아룬델의 마법을 훔쳐왔어요. 전성기 당시의 아룬델은."
"옛 아마릴리스가 실존할 당시 그들은 수도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윈터나이트를 배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렌. 아룬델은 하나의 종교였나요?"
말을 이은 렌에게 엘쟈네스가 물었다. 아룬델이 다루는 마법은 차원의 마법처럼 정신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겨울을 숭상하는 무리는 겨울로 인해 다가올 죽음에 대한 달콤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온 힘과 열성을 다해 아룬델을 섬겼다. 아룬델의 힘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전대 대공부부가 무리 중 다수를 베어내기 시작하면서였다. 아룬델의 힘은 무리의 숫자가 많아야 비로소 생긴다는 추측을 했었다. 그 힘의 기반은.
엘쟈네스는 대답을 듣는 대신에 말했다.
"인간의 믿음이 곧 힘이 되리라. 그들이 모여 외칠수록 우리의 힘은 커지리라. 사랑은 복종을, 복종은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
"아룬델의 수단은."
"맞아요. 믿음일거에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건 마법이겠죠."
"지금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가 쓰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까."
"확신하고 있어요."
목소리에 대해 말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까지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하나 똑똑히 다가왔다. 엘쟈네스는 선조가 훔친 아룬델의 마법을 물려받았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던 것은 엘쟈네스가 마력에 특화된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엘쟈네스에게 깃든 아룬델의 마법은 윈터나이트 영지에 도착하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쟈네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울이었으나. 엘쟈네스는 결혼식 무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릴리스의 사람들은 엘쟈네스를 홀린듯 바라보았다. 엘쟈네스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던졌으며 엘쟈네스에게 다가왔다. 많은 이들과 쉽게 가까워진 것은 이 덕분이었다.
겨울이 끝나 아룬델의 마법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때 엘쟈네스는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워졌다. 윈터나이트에 도착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마법은 차원의 마법만이 아닐 것이다. 자꾸만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은 이제 리리엘을 보던 것처럼 엘쟈네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릴리스의 많은 이들이, 로벨리아의 많은 이들이 엘쟈네스를 홀린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리리엘에게 깃든 아룬델의 마법에 매료되었던 로벨리아의 귀족들은 엘쟈네스를 보자 태양을 처음 본 사람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엘쟈네스는 리리엘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마법이 전신에 휘감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아룬델의 또다른 마법이었다.
매혹의 마법은 엘쟈네스의 머리칼에 도는 붉은빛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것이 아룬델의 마력이 흐른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룬델의 마력에 노출된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엘쟈네스의 머리칼은 아름다운 적갈색이었으나 사람들을 홀리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이 마법이라면. 엘쟈네스는 손을 움직였다. 아룬델의 마력은 엘쟈네스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지 않겠다는듯 정체되어있었다. 겨울의 마법 때문이었다.
승자는 엘쟈네스였다. 엘쟈네스의 손짓에 고집센 마력은 눌린채 수그러들었다. 리리엘의 것과 같은 종류. 그러나 아니었다. 엘쟈네스는 앞을 바라보았다. 리리엘의 마법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리리엘의 마법은 날뛰고 있었다.
리리엘은 엘쟈네스보다 마법에 있어서 뒤떨어졌다. 리리엘은 이만큼의 마력은 쓰지 못했다.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리엘이 쓰는 것은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위험한 힘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통제불능의 힘에 이끌려 리리엘에게 매여 있었다. 그 옛날. 겨울을 숭배하는 무리들이 아룬델을 찬양했듯이. 렌은 말했다.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가 어릴적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리리엘은 몸이 약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나아지기 시작했고요."
그렇다면 리리엘은 아룬델과 관련이 있는가? 쉽사리 결론을 내놓지 못했다. 아룬델과의 접촉이 있다기에는 리리엘의 마력의 순도가 떨어졌다. 또한 겨울의 마법이 반응하지 못했다.
특이한 것은 리리엘의 마력이 추종자의 수를 늘리며 점점 증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쟈네스는 마력을 퍼뜨려보았다. 로벨리아의 수도. 로벨리아의 지방. 그리고 어쩌면. 엘쟈네스는 말했다.
"리리엘이 로벨리아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요."
마력은 두텁게 로벨리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느낀 것은 엘쟈네스와 렌, 화이트 기사단 뿐이었다. 로벨리아의 모든 이들은 리리엘 크로커스를 사랑했다.
그들이 리리엘을 사랑한 것이 먼저인지, 리리엘의 마력이 그들을 잠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리리엘을 사랑했다.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관심을 가졌다.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리리엘은 로벨리아의 신과도 같았다. 많은 이들의 믿음이 리리엘의 마력을 점차 더 키우고 있었다. 엘쟈네스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워할만한 수준이었다. 엘쟈네스는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빠진 것이 많았으나 렌은 엘쟈네스가 말한 것들을 곧바로 이해했다.
곧 약혼식의 주례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리리엘은 천천히 걸어 마침내 칼레스 로벨리아 왕자의 옆자리에 위치했다. 사람들은 순결한 약혼식의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리리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옆에 서 있던 칼레스 왕자가 물었다.
"리리엘. 긴장이 되는거야?"
"아니에요. 칼."
리리엘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석처럼 영롱한 녹색의 눈동자는 진중했고 고운 분홍빛의 입술은 다물려 있었다. 리리엘은 이 날이 오기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리리엘은 스스로를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리리엘이 입을 열면 많은 이들은 리리엘을 손가락질 할 것이다. 사람들은 리리엘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평생 거짓말을 하며 칼레스 왕자를 속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나을 것이다.
사람들은 리리엘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곧 왕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로벨리아 국왕이 둘의 약혼에 대해 읊으면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릴 것이다.
리리엘이 눈을 감았다 뜨자 긴 금빛 속눈썹이 팔랑였다. 칼레스 왕자는 리리엘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왕자의 손은 리리엘의 손을 잡지 못했다.
"리리엘?"
"미안해요."
리리엘의 행운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는 이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던 것이었고, 리리엘의 불행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는 이들에 둘러싸여 살아왔기에 의무나 책임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었다. 리리엘은 더 이상 왕자에게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리리엘은 칼레스 왕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 약혼식을 할 수 없어요."
============================ 작품 후기 ============================
앗... 너무 많이 힘들지 않을때 지난화 이번화 둘다 추천을 눌러주시면 제가 기쁠 것 같아요...!☞☜
어워드 상 두개를 탔어요! 하나는 총 투표수가 가장 많으면 주는 작품상이고 다른 하나는 올해의 선작상이에요!^0^♥ 투표에 감사드리고, 지난화가 100화였는데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함니다. 여러분 덕분에 어워드도 수상하고 늘 즐겁게 글을 쓰고 있어요!
나쁜 소식으로는 파일을 되찾지 못했어요;ㅆ; 하지만 파일 하나는 찾았어요! 지난화 이번화 기억이 안나서 쓰느라 한참 걸렸네요 ㅇ<-< 너무 슬픔니다. 일단 자고 다시 생각해야겠어요
늘 사랑함니다. 감사해요. 소설을 처음 시작한 순간부터 그랬고, 연습 겸 시작한 첫 로판인데 과분한 사랑을 해주셔서 감사하고, 읽어주셔서 기뻐요.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후기가 너무 길면 지겨울까봐 줄였어요! 그러면 저는 이제 자러 가겠슴니다! 굿나잇^0^*/
M.K님, 한 시안님, jung59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