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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변화한다-102화 (1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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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델

칼레스 왕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고지식한 남자였다. 왕자는 머리가 좋았고 정치적인 감각도 있었으나 기존의 상식에서 벗어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수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는 남쪽에서는 독이 될 태도였다.

현 로벨리아 국왕은 왕자의 그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왕자를 엄격히 가르쳤다. 그는 왕자에게만 유독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고 높은 기준을 요구했다. 왕자는 많은 가르침 끝에 인내심을 얻게 되었다.

칼레스 왕자가 리리엘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국왕의 억압을 받는 자신과는 달리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리리엘 크로커스를 동경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리리엘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와 리리엘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약혼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곱씹어보던 왕자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리리엘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약혼녀가 약혼식 당일에 약혼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가능성은 아예 열어두지 않은 상태였다. 왕자는 물었다.

"뭐라고?"

"들은 그대로에요. 칼. 이 약혼식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거에요."

로벨리아의 국왕은 칼레스 왕자에게 다시 생각하라는 말을 여러번 했다. 둘의 앞날에는 가시밭길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왕의 한마디였다. 왕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듯 리리엘에게 향했다.

약혼식은 신성한 일이었다. 마법 전쟁 이후 두 사람이 반드시 결혼을 할 것을 알리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다 점차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과 맹세를 의미하는 행사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면 결혼에 대해 배울때 약혼식에 대해서도 학습하게 된다. 약혼식이 파기된 사례는 없었다. 알고 있었으나 할 수 없다. 리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진지한 눈을 했다.

"리리엘. 약혼식에 무슨 문제가 있는건가?"

"아니에요. 칼."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어. 약혼식이 끝난 후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

왕자는 피곤함을 느끼며 말했다. 칼레스 왕자에게 있어서 리리엘의 변덕은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리리엘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약혼녀는 남의 시선이나 잣대에 쉽게 흔들렸고 고집은 셌다.

크로커스 공작 부부는 둘째인 리리엘 크로커스를 편애하다시피 사랑했다. 공작 부부의 리리엘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이가 귀족들 중에서는 없을 정도였다. 그 덕에 리리엘은 자기중심적이었다.

처음에 심각한 얼굴을 하던 칼레스 왕자는 다시 리리엘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어떤 문제가 있기에 리리엘이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리엘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홀의 앞쪽 의자에 앉아있던 크로커스 공작 부인이었다. 리리엘의 영롱한 녹색눈에 눈물이 약간 고여있던 것이다.

"칼레스. 전 진심이에요."

"리리엘. 이럴 시간이 없어."

"이번에는 뜻을 꺾을 생각이 없어요. 약혼식을 올리지 않을거니까요.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우리의 약혼식은 너무나도 섣부른 결정이었어요. 칼레스."

"일 년이 소요되었지."

엘쟈네스 크로커스가 윈터나이트로 떠난 이후 그는 곧바로 리리엘에게 청혼했다. 란제크 카멜리아가 리리엘을 먼저 차지할까 두려웠던 탓이다. 리리엘은 결혼을 일찍 할 생각이 없다는 답을 남겼고, 일 년이 지난 후 그들은 약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비를 들이라는 압박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중에서도 칼레스 왕자가 남긴 배려였다. 리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은 왕자의 가슴 한구석을 울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잠시 칼레스 왕자의 얼굴이 누그러진 틈을 타 리리엘은 말했다.

"칼.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칼만이 저를 알아주었으니까요. 칼처럼 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래서 약혼식을 결심할 수 있었어요. 이 마음이 영원히 오래 갈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마음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는건가?"

리리엘의 감정은 왕자에게 닿지조차 않았다. 평소처럼 리리엘의 사적인 말을 받아주기에는 너무나도 공적인 자리였다. 칼레스 왕자의 말에는 헛웃음이 섞여있었다. 아마릴리스의 사절단과 수많은 귀족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곳에서 리리엘은 갑작스럽게 약혼식을 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약혼식을 축복하기 위해 온 수많은 하객들은 하나 둘씩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칼레스 왕자와 리리엘 크로커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리엘 크로커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고 칼레스 왕자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진 상태였다.

넋을 놓은채 두 사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내 두 사람의 냉랭한 분위기를 주목하고 있었다. 리리엘 크로커스가 무어라 입을 열고 있었다.

"칼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청혼했는지 알아요. 저만 평생 조용히 입을 다물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사실도 알아요. 하지만 칼. 제 마음이 시키지 않아요. 제 마음은 제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어요. 저는 성급했어요. 칼을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약혼식이 시작된 순간부터는 무를 수 없겠죠. 그러니 칼. 이 약혼식을 그만두어주세요."

"리리엘.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는 알고 있나?"

"칼과 로벨리아가 곤란해지고 웃음거리가 될 일이라는건 알고 있어요."

곤란해지고 웃음거리가 될 일. 에너지석으로 인한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이 섞여 더욱 더 심각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일이었다. 로벨리아 왕실은 후대에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크로커스와 로벨리아는 혈연으로 연결된 긴밀한 사이였다. 그것을 아는 리리엘이 왕실에 이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리리엘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인내했다. 칼레스 왕자는 리리엘이 검을 다룬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많은 남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싫었다. 사람을 돕기 위해 일을 벌려놓고 수습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피로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리리엘 크로커스에게 이끌렸다. 그런 면모들을 가진 자유분방한 여자기에 그 변덕마저도 인내하고 사랑했다. 리리엘이 왕자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자신을 가장 잘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왕자는 단 한 번도 리리엘의 말을 반대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왕자가 단 한 번도 리리엘을 이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리리엘은 몰랐다.

현 로벨리아 왕비는 칼레스 왕자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건넨 적이 있었다. 로벨리아 왕비는 로벨리아 왕과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는 리리엘 크로커스는 변하지 않을 사람임을 이야기하며 칼레스 왕자에게 말했다.

전혀 다른 사람과 타협없이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리리엘은 칼레스 왕자가 처음으로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로벨리아 국왕 내외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일이기도 했다.

리리엘이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기에 홀의 앞쪽에 있던 귀족들은 리리엘의 말을 빠짐없이 들은 상태였다. 곧 사람들이 리리엘의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칼레스 왕자는 부모가 옳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눈 앞의 리리엘은 낯선 여자 같았다. 왕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실제 리리엘 크로커스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리리엘은 한 점의 수치스러움도 없는듯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리리엘은 말을 잇고 있었다.

"책임을 질 준비는 되어 있어요. 약혼식에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지만, 제 마음의 소리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어요. 제 마음은 한 곳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남자가 생긴거군."

그는 벼락을 맞은듯 깨닫고 말았다. 리리엘의 주변에 남자는 많았다. 리리엘을 사랑할 남자 역시도 많았다. 그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최악의 형태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리리엘은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칼레스 왕자를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잠시 리리엘의 눈이 꿈을 꾸듯 허공을 향했다.

"그는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를 증오한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에게 운명을 느꼈어요."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운명? 하."

칼레스 왕자는 리리엘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사람들은 약혼식의 두 주인공 사이에서 보여지는 불화에 대해 다소 당황하고 있는 상태였다. 리리엘을 홀린듯 보고 있던 아마릴리스의 사절단들은 찬물을 맞은듯 퍼뜩 놀라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 전체에게 그물처럼 퍼져있던 매혹은 한 순간의 충격에 깨어져나갔다. 엘쟈네스와 렌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화이트 기사단원 하나가 리리엘이 칼레스 왕자에게 약혼식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는 것을 전달했다.

약혼식을 중지하는 사례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의 충격이 커질수록 리리엘을 향하던 경외심은 줄어들었다. 화이트 기사단원들은 그제서야 조금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로벨리아의 귀족들마저도 리리엘을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자가 누구길래."

황당한 상황에 화가 나자 어떤 다른 말도 할 수 없었다. 칼레스 왕자가 할 수 있던 것은 리리엘에게 그 남자를 묻는 것 뿐이었다. 란제크 카멜리아인가. 아니면. 왕자의 머릿속에서 리리엘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를 떠올리는 리리엘의 눈동자는 애정이 가득했다. 무려 약혼식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내리게 한 대상이 아닌가. 리리엘을 증오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리리엘은 이내 꿈을 꾸는 사람처럼 칼레스 왕자만이 들을만한 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저는 대공을 사랑해요."

윈터나이트 대공. 칼레스 왕자의 눈이 대공을 향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리리엘의 보통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과 행동에 대처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었다.

칼레스 왕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화로 쓰러졌다는 기록만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홀의 앞에 있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이제 아연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이 소란을 듣지 못했다는양 로벨리아의 국왕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려졌던 요하네스 크로커스가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들 즐거운 새해 되시길!^0^ 올해에는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람니다!

+)조아라 뷰어가 엄청 이상해졌어요!;ㅅ; 그래서 요즘 조아라 앱을 잘 안켜봐요!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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