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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델
홀의 귀족들과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있던 시종이 황급히 국왕의 등장을 알렸다. 늦은 외침이었지만 그에 대해 지적할 이는 없었다. 약혼식의 주인공들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이 삽시간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소문에 민감하고 자극적인 소식을 쫓는 로벨리아의 특성상 웅성거리는 분위기는 도드라졌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두 사람을 평생 함께하게 하는 약혼식에서 이렇게 불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약혼식의 주인공들이 한 말에 대해 추측하기에 바빴다.
로벨리아의 귀족들 중 많은 이들은 의문을 표했다. 칼레스 로벨리아 왕자는 국왕 내외의 말조차 듣지 않으며 리리엘 크로커스를 사랑했다. 칼레스 왕자가 리리엘 크로커스에게 관대한 태도를 베풀고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 칼레스 왕자가 리리엘 크로커스를 외면한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칼레스 왕자가 리리엘 크로커스에게 질렸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보수적인 면이 강한 칼레스 왕자와 진보적인 성향을 띤 리리엘 크로커스가 너무나도 달라 두 사람의 사이를 비꼬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칼레스 왕자에게서 약간 떨어진 리리엘 크로커스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련한 빛이 깃든 녹색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약혼식의 주인공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파혼 선언에 대해 추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약혼식은 신중하게 결정해야한다. 약혼식을 파기하거나 약혼식을 올린 당사자들이 후에 불화로 헤어지는 일은 없었다.
귀족 영애들은 약혼식의 주인공들의 자세를 수군거리며 지켜보았다. 행복하고 화사한 얼굴을 해야할 리리엘 크로커스와 칼레스 왕자는 손조차 잡고있지 않았다. 하객들은 로벨리아 아마릴리스 할 것 없이 당황한 상태였다. 화이트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원이 렌에게 예를 취했다.
"각하. 로벨리아의 귀족들에게서 정보를 얻어오겠습니다."
"허가합니다."
허가의 뜻을 담은 낮은 음성을 들은 원은 순식간에 하객들의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동요한 것은 윈터나이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릴리스 사절단의 일원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으나 렌과 엘쟈네스조차도 상황은 파악할 수 없었다.
리리엘이 제멋대로 흩뿌리는 아룬델의 마법이 조금씩 힘을 잃고 있었다. 리리엘이 칼레스 왕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추측할 수 없었다. 리리엘이 엘쟈네스를 이해하지 못했듯 둘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엘쟈네스는 새하얀 베일을 쓴 리리엘을 바라보았다. 리리엘은 드물게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이 옅어졌습니다."
"종교의 신이나 다름없는 리리엘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가 아닐까요, 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리엘이 아룬델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마법을 약화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울의 마법은 여전히 잠잠했다. 화이트 기사단원 몇은 홀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특별한 장치가 있는지 탐색을 거듭했다. 성과는 없었다.
리리엘의 추종자들마저도 상식에 어긋난 모습을 보이는 리리엘에게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리리엘만을 보았다. 리리엘이 칼레스 왕자에게 무어라 말하고 칼레스 왕자의 손을 거부한 것을 목격한 상태였던 것이다.
리리엘과 칼레스 왕자의 불화는 리리엘에게 매혹된 사람들에게 동요를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무수한 의문을 가진채 리리엘을 바라보았다. 로벨리아의 귀족들은 수군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모르겠군요. 에너지석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어머나, 벤스 영식. 그렇다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아닌건 아닌거죠. 정치적으로 의도해 나타낸 모습이라기에는 두 분에게 오는 이득이 없는걸요."
"우리끼리 언쟁을 해봐야 좋을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벤스 영식이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요."
"발레르 부인께 물어보죠."
"발레르 부인이요?"
"네. 그 분은 독순술에 뛰어나시니까요."
발레르 남작 부인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화와 독순술을 가르치는 여자였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고아들에게 봉사를 한다던 초라한 남작 부인에 대해 떠올려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리아의 귀족들은 발레르 부인을 찾았다. 발레르 부인은 믿기지 않는 사실에 멍하니 서 있는 중이었다. 발레르 부인은 빈민들에게 봉사하는 장소에서 리리엘 크로커스를 만나 가까워진 경우였다. 서툴고 일을 만들지만 나쁜 심성을 가진 영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발레르 부인은 그래서 더더욱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독순술에 뛰어나다고 해도 두 사람의 대화를 문제 없이 모조리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발레르 부인은 리리엘 크로커스가 마지막에 입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모양은.
발레르 부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더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칼레스 왕자의 시선이 대공에게 닿았으니까. 남쪽의 발음구조상 사랑과 비슷한 입모양을 사용하면서 대체할 수 있는 뜻을 가진 단어는 없었다. 발레르 부인은 믿기지 않는 말에 손을 바들바들 떨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는... 대공을.... 사랑해요...."
주위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의 사이로 그것이 충격처럼 퍼져나갔다. 사람의 입은 바람보다 빨랐고 말은 깃털보다 가벼웠다. 엘쟈네스 크로커스를 악녀라 칭하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간 것처럼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말이 윈터나이트 부부에게 전달되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리엘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 리리엘을 지지하는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흔들리자 불안정하던 아룬델의 마법이 위태롭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크로커스 공작 부인은 약혼식 주인공들의 가족이 앉는 맨 앞의 자리에서 앉아있다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들었다.
"대공을 사랑하는 말을 하다니 정신이 나갔죠."
"착각일지도 모르는걸요."
"하지만 발레르 부인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리리엘 크로커스의 말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크로커스 공작 부인은 엘쟈네스가 그러했듯 리리엘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 중 리리엘 크로커스의 몰락에 신이 나 잔뜩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공작 부인은 옆에 앉은 공작을 붙잡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여보.. 들었어요? 그 애가...?"
리리엘은 조용하고 얌전했던 크로커스 공작 부인의 젊은 시절과는 달리 활기차고 밝은 딸이었다. 엘쟈네스보다 리리엘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리엘을 믿었다.
리리엘은 언제나 공작 부인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딸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공작 부인의 실수였다. 크로커스 공작 부부는 리리엘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관대하게 허용했으며 단 한 번도 혼내지 않았다.
리리엘은 모든 것을 허용받으며 자라왔다. 그렇기에 모두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공작 부부의 지나친 애정이 독이 되어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커스 공작 부부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공작 부인이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공작은 애써 부인을 부축했으나 그조차도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홀 안의 사람들 중 리리엘에게 직접 다가가 소문의 진상을 물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엘쟈네스 크로커스에게 그러했듯이.
크로커스 공작 부부의 충격은 여기서 그치치 않았다. 혼란스럽던 중 국왕이 등장했다. 그 뒤에는 사라졌던 요하네스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요하네스 크로커스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홀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요하네스 크로커스...."
로벨리아가 아마릴리스에 첩자를 보내 에너지석 가공 기술을 훔치려 했고 그로 인해 크로커스 공작가와 로벨리아 왕실이 아마릴리스 사절단과 마찰을 빚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사라진 요하네스 크로커스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과 추측이 분분한 상태였다. 어떤 이는 에너지석을 욕심낸 로벨리아 왕실과 크로커스 공작가가 손을 잡고 그를 숨겼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요하네스 크로커스가 아마릴리스에 있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모든 가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왕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요하네스 크로커스를 본 순간 많은 이들은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섣불리 떠들지 못한 것은 왕의 권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요하네스 크로커스와 왕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감이 예민한 영애들은 드러난 팔에 이상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팔을 문질렀다. 약간의 추위를 느끼고 의아해하다 곧 잊어버린 영애도 몇 있었다. 미약한 추위를 느낀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왕과 요하네스 크로커스가 불길해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왕은 홀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흐리멍텅한 눈으로 예단에 섰다. 그리고 팔을 벌렸다.
"내 아들 칼레스 로벨리아 왕자와 리리엘 크로커스 영애의 약혼식을 환영하오."
왕은 이상했다. 로벨리아 왕실의 최측근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것보다도 더. 왕의 얼굴은 웃으려는듯 입술을 올리고 있었지만 드러난 이와 딱딱한 얼굴 근육은 부조화적인 구석이 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엘쟈네스를 호위하던 엘리나는 검을 쥐었다.
리리엘 크로커스가 윈터나이트 대공을 사랑한다는 사실따위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불길함이 일렁거렸다. 겨울의 마법은 로벨리아 왕과 요하네스 크로커스가 등장한 순간부터 차가운 분노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자, 약혼식을 시작해야지."
왕은 연극을 하는 사람처럼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리리엘과 칼레스 왕자를 보았다. 왕은 두 사람의 불화와 냉랭한 분위기를 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왕의 동작 하나하나가 기계적이었다.
새하얀 약혼식 장소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한 약혼식의 당사자가 서 있었고 기계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묘한 약혼식이었다. 리리엘 크로커스에 대해 입을 열려던 칼레스 왕자는 로벨리아 왕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이유모를 공포감이 들었다.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리리엘 크로커스만이 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리리엘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엘쟈네스는 렌과 함께 리리엘의 발언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아마릴리스와 윈터나이트 대공의 이미지가 걸린 일이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엘쟈네스는 리리엘의 많은 면을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수용해왔다. 많은 것을 이해하거나 넘어가주었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은 넘어갈 수 없었다.
엘쟈네스와 렌의 대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엘쟈네스의 심장이 거세게 뛰어왔다. 엘쟈네스가 로벨리아에 온 후 내내 느껴왔던 기척이었다. 왕과 요하네스에게 아룬델의 흔적이 짙게 새겨져있었다. 그렇다면 아룬델이 있는 것일까. 리리엘은 아룬델이 아니었다.
아룬델이 꼭두각시로 삼은 왕과 요하네스를 보자 알 수 있었다. 리리엘의 마력과는 순도 자체가 달랐다. 아룬델이 왕을 찾은 이유는 크로커스 가문이 가져간 아룬델의 마법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하네스를 데려간 이유는.
문득 심장을 울리는 저릿저릿한 차가움이 엘쟈네스에게 직접적으로 맞닿았다. 아룬델은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아룬델이 보낸 마법이 엘쟈네스에게 인사처럼 전해졌다. 한 가지만은 명확했다. 이 곳에, 아룬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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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생략되었던 앞부분의 씬을 쓰거나 쥬니어네이버 한게임의 헝그리 몬스터, 하나비를 해요!^0^♥ 다음주부터는 봉사활동? 실습? 을 감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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