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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17화 (17/199)

17화

“카, 카인 님께서……! 프레데리크 공 자님과 함께 저택에……!”

오스카 프레데리크、

바로 그가 시린 가을바람과 함께 모습 을 드러냈다.

열여섯 살인 탓에 아직 조금 앳되지만

밤하늘을 흩뿌린 듯 새카만 어둠을 두 른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가 훗날 그 가 얼마나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울릴 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가 자신을 맞이하는 수줍은 소녀에 게 그 찬란한 눈동자를 옮겼다.

“어서오세오, 오스카 님. 먼 길 오시느 라 힘드셨죠?”

“아됴, 괜찮습니다.”

가슴에 장미 모양의 붉은 루비가 달린 하얀색 원피스는 오늘을 위해 기다렸던 것처럼 미엘르를 한껏 뽐내 주었다. 꿀 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녀의 이름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오스카에게 향했다.

그를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더 훗날 이 되었어야 했는데, 미엘르의 슬픔 가 득한 편지가 그 시기를 줄인 듯했다. 하 나뿐인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고뇌 어린 필체에 밤이슬을 맞으며 말을 재촉해 저택에 돌아왔을 것이다.

학기 중엔 절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 았던 카인이건만, 제 친우인 오스카마저 동행하여 저택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어지간히 제 여동생이 걱정되었던 모양 이었다.

겨우 쉴 수 있는 주말 이틀 중 하루는 거대한 마차를 끄는 말들을 혹사시켜 이동하는 데 보낼 것이고, 나머지 하루 는 어여쁜 제 여동생을 위로하는 데 보 내리라.

미엘르는 평소와는 달리 생기가 너울 거려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외투를 벗어 시종에게 건네는 오스카를 향해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내는 그녀 가 어쩜 저리도 추악해 보이는지, 난간 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리 준비한 것인지 그가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하얀 백합 다발을 미엘르에게 건넸다.

“어머나. 이렇게 아름답고 싱그러운 꽃은 처음 봐오/

“감사합니다.”

허례 의식인 것이 분명할 텐데 미엘르 가 말도 안 되는 오버를 하며 뽀얀 뺨 을 붉혔다.

그래, 그렇게 하자. 최후의 순간이 온 다면 저 생기 넘치는 뺨을 진흙탕에 문 질러 주는 거다. 작은 모래알들에 쓸려 피투성이 된 모습도 볼만 하겠지.

“어서 이 꽃을 방에 장식해 줘.”

“예, 아가씨.”

미엘르가 선물 받은 꽃을 아주 조심히 다루라며 몇 번이나 당부했다. 일단 방 으로 돌아가야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 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곱게 차려입은 미엘르와 다르게 아리아는 아주 간소한 실내복과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었 다.

일부러 아무도 언질해 주지 않은 것일 터였다. 연락을 받았으니 저택과 정원을 손질했을 텐데 아리아는 아무것도 모르 고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 까지 치달았다.

아랫입술을 씹으며 정답게 인사를 나 누는 그들을 지켜보며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아리아가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 다. 갑자기 시선을 돌린 오스카와 눈이 제대로 마주치고 말았다.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그와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미엘르를 지옥으로 몰아넣을 가장 최고의 수단인 그에겐 항상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만 보여야 했다.

놀라 눈의 깜빡임도 잊은 아리아가 천 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오스카 역시 생 각지 못한 인물과 시선이 마주친 탓에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과거엔 그녀를 본 척도 하지 않았던 인물이 올곧은 시 선을 보내 왔다.

이번엔 반드시 그 옆자리를 차지하리. 아리아는 손에 차는 땀을 차마' 닦지도 못하고 그의 시선을 받았다. 심장마저 멎어 버릴 것 같은 긴장을 깨뜨린 것은 오스카를 따라 시선을 돌린 미엘르였다.

그녀의 놀란 = 마주하자 얼어붙은 심장이 순식간에 용암으로 변모했다. 온 몸에 뜨거운 피가 빠짐없이 공급되어 현실을 자각시켜 주었다.

그래. 시기만 조금 빨라졌을 뿐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제야 본연의 모습을 찾은 아리아가 제 치맛자락을 잡아 아주 공손하게 인 사했다.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한 마리 나비 같은 우아한 몸짓이 여과 없이 모 두에게 보여 졌다.

오스카 역시 자신의 무례함을 깨달은 것인지 마주 인사했다. 처음 보는 낯선 인물에 대한 경계, 그리고 호기심. 어쩌 면 아리아의 소문을 알고 있을지도 모 르는 그가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진득 한 시선으로 다시금 아리아를 훑었다.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식욕을 돋울 만한 음식을 준비했답니다. 오라버니께 서 좋아하시는 채소류도 풍부하니 기대 하셔도 좋을 거예요”

그와 아리아가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 을 힐끗대던 미엘르가 제 오라비인 카 인의 팔짱을 끼고 어서 식사를 하자며 화제를 돌렸다.

카인도 오스카가 아리아에게 관심을 주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인지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이동할 것을 종용 했다.

“미엘르, 너무하잖아. 내가 언제 채소 를 좋아했다는 거아? 그러고 보니 점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군.”

그제야 오스카와 아리아의 시선이 떨 어졌다.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자리를 옮기는 모습에 아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해 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미엘 르였다.

이럴 때일수록 그 특유의 성녀 짓을

하며 언니를 챙기지는 못할망정, 새끼줄 처럼 꼬인 제 심성을 만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 고맙게도?

“제시, 옷을 준비하고 머리 좀 손봐 줘.”

아리아는 곧장 제 방에 올라가 머리를 단정히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미엘르에 비하면 크게 꾸민 티는 나지 않겠지만 깔끔하고 정숙함을 강조했다.

대놓고 화려하게 꾸민 것보다 단정하 게 차려입는 것이 그의 취향이었다. 확 실히 들은 것은 아니기에 정확하진 않 았지만 아리아가 파악한 것에 의하면 그러했다.

그래서 미엘르도 그를 만날 때는 특별 한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차림을 했고, 보석도 최대한 자제했다.

산뜻한 비누 향이 나는 향수를 머리카 락에 한 번 뿌리고 제시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아리아가 곧장 식당으로 향 했다. 이미 식사는 한참이나 진행되어 식탁에 둘러앉은 그들은 메인 요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도 부재중인데 설마 아리아 가 식당으로 내려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잘게 조각낸 고기를 입에 넣던 미엘르가 포크를 입에 문 채 굳은 얼굴로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카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얼굴을 찌푸려 대놓고 불편하다는 기색 을 내비쳤다.

“……제가 방해한 건가요?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무도 부르지 않아 서 내려왔는데…… 아리아가 눈썹 끝을 쭉 내린 채 제 손 을 만지작대며 물었다.

백작가의 영애임에도 아무도 점심을 챙기지 않았다는 말에 식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사실 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아리아

의 모습에 미엘르가 저도 모르게 포크 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쨍그랑.

넓은 식당에 울리는 날카로운 쇳소리 에 아리아가 몸을 한차례 떨었다. 의도 적인 것은 아니고 진심으로 놀라서 그 런 것이었는데, 이 모습이 퍽이나 가엽 게 비친 모양인지 굳어 있는 두 오누이 를 대신해 오스카가 대답했다.

“이런, 갑자기 제가 방문한 탓에 모두 들 영애를 잊었던 모양입니다. 대신 人} 과드리겠습니다. 어서 식사를 준비하지 않고 뭐 하지?”

그는 멀뚱멀뚱 이 상황을 지켜보는 시

녀를 차가운 얼굴로 질책했다. 지목을 당한 시녀는 황급히 아리아의 식탁을 세팅했고, 오스카에게 한차례 감사의 인 사를 전한 아리아가 미엘르의 옆에 만 들어진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오스카와 카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을 향한 시선이 너무나도 상반되어 웃음이 났다.

새콤한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가 식 탁에 놓이고, 그녀가 포크를 들기 전에 오스카가 먼저 자신의 소개를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프레데리크 공작가 의 오스카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사와 말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과거 첫 만남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 다. 미엘르가 만든 것이 아님에도 거짓 으로 손수건을 건네는 그녀에게 질투와 악의로 가득 찬 비난의 말을 했던 것이 첫 만남이었던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아아, 진정으로 나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구나.’

환희에 찬 아리아의 표정은 깊고 어두 운 늪과도 같아 제 몸이 빠져 허우적대 는지도 모른 채 시선을 빼앗기기 충분 했다.

아리아는 자신을 마주하는 오스카에게

그간 갈고 닦은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 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겉으 로는 천박하다고 욕하면서도 흘깃대는 눈을 멈출 수가 없게 만들었던 그 미全

“오스카 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리아라고 합니다.”

그 고혹적인 미소와는 상반되는 앳된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어 린아이가 지어서는 안 되는 표정을 짓 고 있는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런 대꾸할 수 없는 분위기 였다.

인간의 연륜과 경험은 아직 성년이 되 지 않은 아이에게 이리도 독이 된다. 덩 달아 시선을 빼앗긴 카인에게 야릇한 미소를 흘린 아리아가 포크를 들어 식 사를 시작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식당에 서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이렇게도 쉽고 우스운 자들에게 왜 그리도 고통을 받았던가. 내가 멍청했던 탓? 무지했던 탓? 그도 아니면 어리석 었던 탓?’

그래, 그 모두가 해당됐다. 이렇게 알 기 쉬운 사람들의 의중도 파악하지 못 한 과거는 죽음을 맞이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었다. 그 멍청한 악 녀의 모습이 환영처럼 흩뿌려져 미엘르 의 그림자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난 둣 본성을 내 비치는 그녀에게 아리아가 걱정을 내비 쳤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니? 안색이 좋 지 않구나, 미엘르?

“……아니요、괜찮아요”

아리아는 당장이라도 체할 것 같은 얼 굴로 꾸역꾸역 고기를 삼키는 미엘르가 가여워 침음을 흘렸다. 시뻘건 피를 뚝 뚝 홀리는 고기의 단면이 꼭 그녀의 독 기처럼 보여 사랑스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미엘르 네 오라비까 지 가져갈 생각은 없었는데, 불이 불인 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꼴을 보니 네 편 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식사를 재개한 카인의 뺨>] 미 비하게 붉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매춘부에게 마음을 빼앗긴 제 아비같이 색을 밝히 는 그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워 흠잡 을 곳이 없었다.

‘너희 집안은 원래부터 이렇게 더럽고 추악했으니까.’

악녀를 처단한 악녀는 성녀가 아니라 단순한 승리자일 뿐이었다. 자신의 악행 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승리 자. 같은 오물끼리 누가 더 성스러운 척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러니 그 가면은 벗겨야 마땅했다. 그래야 정정당당하게 한 번씩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과거에는 아리아가, 지금은 미엘르가.

사이좋게 번갈아 제 본모습을 드러내 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리아에게 눈길을 줬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모양인지 고기 를 자르는 카인의 손길이 거칠었다.

앞으로 그렇게 될 일이 많을 텐데 벌 써부터 힘을 빼는 그가 안쓰러울 지경 이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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