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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26화 (26/199)

26화

“경비대를 부르는 것이 좋겠어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섞인 아리아 의 말에 백작 부인이 놀란 얼굴로 되물 었다.

“경비대라니?”

“만약 마부가 의도적으로 고장이 난 마차를 골랐다면…… 제게 해를 끼칠 요령이었을 테니까요 무사히 저택으로 돌이오긴 했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마 차가 무너져 제가 죽을 수도 있었던 상 황이었잖아요、게다가?… 아리아가 홀에 모인 이들을 한차례 둘 러보며 말을 이었다.

“집사도 모를 정도면 작정하고 일을 계획했다는 뜻이니까요”

그 끔찍한 결론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 이 서렸다. 사실 그것이 제일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아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계획한 일이라는 결론이.

물론 부품이 몇 개 빠져 있었을 뿐 큰 사고에 이를 정도로 고장이 난 것은 아 니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만에 하 나라는 가정도 있기에 아무도 마부를 위해 변론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꾸몄으리라 짐작되는 미엘 르만 제외하고、 이 이상 자신이 지시한 이가 내몰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인지 멀찍 이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미엘르가 그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며 마부의 편을 들었다.

“저…… 어머니, 그리고 언니. 경비대

를 부르는 건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닐까 요? 그는 퇴직이 가까운 나이니까 깜빡 했을 수도 있겠죠. 다친 사람도 없는 데…….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가여워 요”

확실히 마부는 불혹의 나이에 가까워 이제 곧 퇴직을 앞둔 자였다. 무언가의 병으로 기억이 오락가락한다고 해도 믿 을 만큼 기력이 쇄한 나이다. 그러니 마 차를 보관하는 장소를 헷갈렸다고 해도 이해가 된다.

또한 미엘르의 말대로 딱히 다친 사람 도 없고 마차도 무사히 돌아왔다. 심하 게 덜컹거려 승차감이 불편했다는 것과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 말고는 책임 을 물을 사항도 없었다.

애초에 부품이 몇 개 빠져 있을 뿐, 사고가 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의 자비를 베푼다면 봉급 을 삭감한다든가하는 최소한의 징계로 도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문제였다.

미엘르도 그렇게 끝낼 수 있다 생각해 벌인 일일 것이다. 어쩌면 사모하는 이 에게 호의를 받은 악녀를 향한 작은 장 난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리아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왜? 앞으로 조금이라도 미엘르에게 가

담했다간 그녀가 어떻게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보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할 생각이었음으로 그래야 앞으로 멍청한 그녀에게 붙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엘르? 까딱 잘못했다간 내가 죽을 수도 있었던 무서운 사고였다는 걸 잊었니?”

“죽을?…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요? 마차도 무사히 돌아왔고요”

무슨 그리도 오버를 하느냐는 말투에 아리아가 순간적으로 환호성을 지를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 내며 놀란 얼굴 로 되물었다.

“미엘르,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그 정도 고장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니? 단지 부품이 몇 개 빠져 있었다 는 말밖에 안 했는데.

엉성한 부품이 아니라 주요 부품이 빠 져 있었다면 당연히 대형 사고로도 이 어질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 는데, 너는 어떻게 알까.

‘만천하에 제 잘못을 까발리는 멍청함 이라니!’

제 말실수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미엘르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옆에 선 시녀인 엠마의 손을 꼭 붙드는 모습이 가여웠다. 그 손을 비틀어 버리 고 싶을 만큼.

“응? 어디서 들은 거니?”

아리아의 재촉에도 미엘르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엠마가 심각한 얼굴로 애처로운 아기 새처럼 바들바들 떠는 제 주인의 귓가에 들리지 않게 작 은 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방책이라도 일러 주는 듯싶었다.

아리아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엘르가 곧 그녀가 했 던 말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겨, 결과를 얘기한 거였어요, 언니.

결과적으로 다치지 않았으니 그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였죠、”

“그래, 미엘르 네 말도 일리는 있구 나.”

갑자기 한걸음 물러서는 제 딸의 말에 백작 부인의 시선이 아리아에게 향했다. 일러바칠 때는 언제더니 무슨 꿍꿍이냐 는 물음이었다. 아리아가 조금 침울한 얼굴을 하더니 미엘르의 의견에 동조한 까닭을 풀었다.

“하지만 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할 거야. 운이 좋아서 다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니 까.”

“그건……. 그렇지요”

그녀가 떨떠름하게 긍정했다. 여기서 부정했다가는 이상할 만큼 죄를 저지른 마부를 계속 감싸는 꼴이 되어 버리니 더는 그럴 수 없는 모?]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뭐니. 그 마차를 탄 게 나라서 말이야. 만약 네가 부품이 몇 개나 빠진 마차를 탔다고 상상하면……. 머리에 피가 몰려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거든.”

그러니 네가 여기서 마부의 편을 들면 아주 이상한 거란다. 알겠니? 하나뿐인 언니의 편을 들어 줘야지.

네 손으로 네가 사주한 이를 벌하렴.

그게 아리아가 바라는 이번 사건의 종 지부였다.

아리아가 놓은 덫 때문에 미엘르는 아 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긍정 했다간 마부를 내치는 것이 될 터고, 부 정했다간 모두에게서 괜한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자, 어떻게 할래?

마부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질 대로 창 백해져 마치 시체의 빛깔과도 같았다. 감히 변명을 할 수 없음에 그저 자신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아리아가 흐르지도 않은 눈물을 닦는

척하며 제 어미의 옷자락에 얼굴을 숨 겼다. 슬쩍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함이기도 했다. 홀에 침묵이 내려앉았 음에도 미엘르는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아까부터 음흉한 제 딸이 무언가 꾸미는 것을 눈치채곤 조용히 그녀가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것 이 분명했다.

백작 부인의 옷자락에 기쁨의 조각을 덜어 낸 아리아가 침울한 얼굴로 미엘 르에게 물었다.

“물론 너도 그렇겠지, 미엘르?”

“……그럼요.”

“그럼 이제 상황이 정리된 듯싶으니 자애로우신 어머님께 공정하고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리도록 하자.”

그녀는 아리아의 하나뿐인 친모이자 편이였다. 공정한 판단을 내릴 리가. 아 리아에게 아주 유리하고 그녀가 원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미엘르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 을 앙 다문 채 대답하지 않자 아리아가 ‘네 생각은 어떻니?’라며 동의를 구했 다.

‘자 어서 네 손으로 마부를 내쳐! 너 를 위해 일한 그를 내치라고!’

서글픈 얼굴을 한 아리아의 눈이 번뜩 였다. 태초의 인간에게 사과를 건넸던 뱀의 눈과도 같았다.

그 이질적인 얼굴이 미엘르를 재촉했 다.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 저 뱀이 주는 사과를 베어 무는 수밖에.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다리에 힘이 풀린 마부가 바닥에 주저 앉았다. 미엘르의 시녀인 엠마가 그녀의 팔과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재빨리 구석 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아주 유쾌한 모습을 보여 준 그녀들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내 그것을 꾹 참고 조 금 아련한 얼굴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제 어미의 정의로운 판단을 기대하며.

판결은 다음날로 미루어졌다. 밤이 늦 은 탓이다. 굳이 미룰 필요는 없었지만 신중한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모※]었는지 백작 부인은 내일 아침 식사 후에 그의 처분을 결정하겠 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그 결과는 정해져 있을 것이 틀림없음에도、 다음날,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

어선 아리아가 텅텅 비어 있는 의자들 을 보고 시종에게 물었다.

“미엘르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방에서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그래?”

미엘르는 거의 대부분 식사를 방에서 먹어 왔지만 오늘만큼은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방에 틀어박혀 아침을 먹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체할 것 같겠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일 것이다. 아리아는 늘 그래 왔기 때문이 다.

‘안타깝게도 그러게 왜 괜한 수작을 부려서 제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은 것 인지.’

수작도 똑똑한 자가 부려야 하는 법이 었다.

물론 지금 미엘르는 자신이 똑똑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아리 아가 멍청하다 여길 것이 분명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제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벌써 20 년을 넘게 산 아리아를 고작 열세 살의 그녀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모습을 드 러낸 백작 부인과 함께 오늘따라 깔끔 하고 담백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아마 도 미엘르에게는 쓰디쓴 메뉴였겠지만 아리아에겐 아주 만족할 만한 메뉴였다.

느긋하게 아침을 즐긴 뒤 식당을 나와 마부에 대한 판결을 위해 백작 부인과 함께 홀로 향하던 그녀를 집사가 붙잡 았다.

“아가씨, 보석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딱딱하고 경직된 얼굴로 아리아를 대했던 그는 평소보다 꽤 부드러운 얼 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 한마디 편을 든 것뿐인데 바로 얼굴색이 바뀌는 것을 보니 그간 자신 이 얼마나 세상을 어렵게 살았는지 실 감이 났다.

“그래? 고마워.”

그래서 괜히 보통은 붙이지 않는 말을 덧붙였다. 집사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 웠다.

“오스카 님께 보낼 답례가 도착한 모 양이에요”

“어머나, 어서 다녀오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아리아는 홀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현관으로 이동했다.

보석상의 하인은 아리아가 식사를 마 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녀 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가져온 브로치를 확인한 아리아는 감탄 을 금치 못했다.

“?완벽해.”

“감사합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앞으 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전언을 남기셨습 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 줘.”

아무래도 아부를 겸한 완성작인 모양 이었다. 생경한 백합 모양의 세공에 붉 은 루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가질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이렇게까지 대단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공을 들여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 았다.

‘어쩜 이리도 모든 일이 순조로울 수 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하는 보석 상의 하인을 뒤로하고 마부의 운명을 좌우할 홀로 걸음을 내딛었다. 브로치와 목걸이가 든 포장을 손에 든 제시가 그 녀의 뒤를 따랐다.

아리아는 미엘르의 잔뜩 일그러질 얼 굴을 상상하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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