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43화 (43/199)

43 화

“혹, 타국의 대귀족이 아니신지요?”

아리아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던 레인이 고개를 돌렸다. 미엘르를 대할 때와는 달리 어딘가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빛이었다. 레인 이 입꼬리만 슬쩍 올리며 왜 그렇게 생 각하느냐고 물었다.

“음,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런 대단한 재력을 가지신 분이 제국에서는 달리 생각나는 분이 안 계시거든요 더욱이 미엘르에 대해 모르시는 점도 많은 것 같고요”

“모르는 점이라고 하신다면?”

그가 도발하는 되물었다. 어째서 저리 도 차가운 태도를 일관하는지. 마치 쓸 데없는 시간을 낭비한다는 듯한 태도였 다.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제까짓 게 뭐라고 이렇게 손바닥 뒤집

듯 곧장 태도를 바꾸는가. 그럼에도 티 를 낼 수 없음에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려 했던 질문의 핵심만을 짚었다.

“미엘르에게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 는 것은 제국의 누구나가 아는 사실인 데 이를 모르는 듯하셔서요 아니면 알 고도 개의치 않을만한 존재라든가. 오늘 가져오신 선물을 생각하면 둘 다 가능 성이 있겠죠?”

고개만 돌려 아리아를 쳐다보던 레인 이 몸 전체를 틀어 아리아를 마주했다. 이제야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여전히 차가운 얼굴 로 눈썹을 올렸다 내리는 것이 다시금 아리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호오, 영애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존 재는 애를 들면 어떤 존재이신지요?”

“……전자라면 제국 귀족들의 사정을 잘 모르시는 이국의 대귀족이겠고, 후자 라면.”

“ 후자라면?”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지만 굳이 제국 에서 그럴 인물을 꼽으라면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빈센트 후작은 사라에게 푹 빠져 있으니.

“황태자 전하가 유일하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차갑게 굳은 레인의 얼 굴이 눈에 띄게 얼어붙었다. 순간이었지 만 그를 마주하고 있던 아리아는 그 표 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백작 부인와 미엘르가 눈치채기 전에 순식간에 표정을 되돌린 그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레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리아의 미간이 찌푸 려졌다.

“참으로 귀여운 발상이군요 그럴 듯 한 가설에 순간 설득당할 뻔했습니다.”

“그럼, 둘 다 아니라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아무것도 답변드릴 수 가 없습니다. 맞다 하면 제 주인님의 정 체가 밝혀지는 것이겠고, 아니라고 하면 영민한 영애께서 추리하실 범위를 좁혀 드리도록 돕는 일이 될 테니까요”

레인은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참으로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 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탓에 미인계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고, 그럴듯한 추리에 도 힌트를 한 조각도 주지 않는다.

능구렁이 같은 태도임에도 자신이 원 하는 것에만 매달리고 그 외에는 입을 닫는 것을 보면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아리아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레인 을 ‘경계 대상’으로 분류했다. 그와 그 의 주인이 미엘르에게 붙는다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는 예감 또한 작용했다.

‘……모래시계가 없는 지금은, 몸을 사 려야 해.’

더는 레인의 손바닥 위에서 장단을 맞 출 수 없었다. 아리아는 표정을 부드럽 게 풀어 또래 소녀들이 지을 법한 사랑 스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다음을 노 려야 했다.

“제가 실례를 한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꽤나 즐거운 대 화였습니다.”

거짓이 아닌 듯 레인의 시선이 아리아 를 깊게 훑었다.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흥미를 가진 눈빛이었다.

더 이상 대화할 의지가 없었기에 아리 아가 그 눈빛을 무시하며 후식으로 나 온 차를 마셨다. 그러자 레인의 시선 또 한 사라져 다시 미엘르에게 향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성인식이 지 나갔다. 아리아는 과거처럼 사라가 빈센 트 후작과 좋은 인연을 맺었을지 궁금 해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당장 내일 모임에서 그 궁금증을 해결 할 수 있었지만, 불안감과 동시에 벅찬 마음이 들어 동이 터 올 때까지 뜬 눈 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몇 시간 자지 않았음에도 시간에 맞춰 눈을 뜬 아리아가 분주히 외출 준비를 했다. 부은 눈가를 차가운 수건으로 찜 질하고 새로 주문한 연노란색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소박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원단이 고 급스러웠고, 소매와 밑단에 달린 레이스 의 짜임은 촘촘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쉬이 구할 수 없는 장식에 드레스가 화사함을 더했다. 머리카락을 곱게 빗은 뒤 붉은 리본을 길게 늘어뜨리자, 또래 소녀의 귀여음이 더해졌다.

“저…… 아가씨, 정말 이렇게 하고 가

도 될까요?”

우중충한 시녀복은 그대로였지만 얼굴 에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을 땋은 애니 가 물었다. 귀가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보 니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왜 저런 소리를 할까.

“그럼. 아주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러 니?”

“?…사실 저는 아가씨를 따라서 모임 같은 곳에 가 본 적이 없어 이래도 되 나 싶어서요”

“시녀의 옷차림에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겠니? 더욱이 더러 운 것을 묻힌 것도 아니고, 예쁘게 꾸민 건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꾸며 놓으니 꽤나 볼만했다. 누군들 꾸민 것이 꾸미지 않은 것보다 낫긴 하겠지만, 주근깨 때문에 이목구비 에 시선이 가지 않았던 애니는 그 효과 가 대단했다. 피부를 정돈하여 죽어 있 던 이목구비가 살아나 퍽 봐줄 만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기는.

아리아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홀렸 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 나. 제 주인을 따라 파티 따위에 참석하 는 시녀들은 종종 치장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함이었 다

같은 귀족들은 상대도 하지 않는 허울 뿐인 귀족들이 그녀들의 목표물이기도 했다. 어차피 권력에서 밀려난 그들은 예쁘기만 하다면 신분에 관계없이 사랑 에 빠지곤 했으니까.

정실이 어렵다면 은밀한 애인이라도 좋다는 멍청이들도 있었다. 제 외모만 믿고 덤비는 자들이 그러했다. 젊음이 끝나면 버려질 멍청이들.

어쩌면 과거의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며 아리아가 조소를 머금었다. 애니 또 한 그 멍청이에 속하지 않을까 기대하 며 그녀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어머나, 아리아 영애. 못 보던 사이에 키가 훌쩍 컸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하 더라도 이렇게 키가 작았었는데!”

“성장기를 거친 모양이죠? 저도 갑자 기 키가 컸던 때가 있었죠?”

“전과 달리 조금 살도 붙어 너무 보기 좋아요、”

“나이 또래보다 조금 성숙해 보이기도 하네요”

“오늘 복장도 너무 예쁜데요? 새로 장 만하셨나요?”

오랜만에 만난 영애들은 그간 참기라

도 했던 모양인지 아침을 밝히는 작은 새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과거에도 이 시기에 키가 훌쩍 크고 살이 붙었으니 아마 하루가 다르게 변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요란하게 굴 작정은 아니겠지. 아리아가 보드라운 미소를 지 으며 그녀들의 장단에 호응했다.

“요즘 즐거운 일이 많아 식욕이 샘솟 아서 그런가 봐요 영애들과의 만남 또 한 그 중 하나고요 오늘은 얼마나 기다 렸는지 몰라요”

“?…?사랑스럽기도 하지.”

“아리아 영애가 또 우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군요”

외모 자체가 시선을 끄는 데다가 모임 에서 나이도 가장 어린 아리아의 아부 에 여타 영애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리아는 그녀들의 가식적인 사랑을 비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성인식은 어떠셨나요? 제게는 아직 먼 이야기라 너무 궁금하네요”

“사실은 할 이야기가 참 많답니다! 아 주 굉장한 일이 있었어요!”

사라와 함께 성인식 파티에 참가한 영 애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보나마나 사라의 일이겠지. 당연한 일이 었겠지만 정해진 순리대로 흘러가 안심 이 됐다.

“무슨 일이 있었죠? 너무 궁금해요”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 말씀드리기 곤 란하네요 빨리 사라 영애께서 오셔야 할 텐데 말이죠、”

“사라 영애에 관한 일인가요?”

“예. 아주 굉장한 일이 있었답니다. 장 본인이 아니라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 지만요”

그녀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둣 몽롱한 얼굴을 했다. 빈센트 후작과 사라가 마 주한 순간을 목격한 듯싶었다.

고만고만한 하급 귀족인 그녀의 인생 에 있어서 빈센트 후작만큼 대단한 작 자를 만나 인연을 맺을 기회는 거의 없 으니 저리 반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모인 영애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사라 가 어서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늘 시 간에 맞춰 왔던 그녀가 왜 오늘따라 이 렇게나 늦는 건지, 성인식에 이어 또 다 른 어떤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두근대 는 가슴으로 사라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라가 나타난 것은 모임이 시 작되고 약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 다. 그사이 무료해진 영애들은 저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내뱉었고, 아리아 역 시 새로운 시녀를 데려왔다며 애니를 소개했다.

“정말 어여쁜 시녀네요?”

빈말임이 분명한 칭찬에도 애니는 어 쩔 줄을 몰라 하며 전신을 붉혔다.

“늦어서 죄송해요 기다리셨나요?”

“사라 영애! 혹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요?”

단 한 번도 모임에 늦은 적이 없었던 사라였기에 여타 영애들은 그녀에게 분 명 무슨 일이 생겼었으리라 믿어 의심 치 않았다.

사라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 조금요……

무슨 일이 있었구나! 기대하는 영애들 과 함께 미래를 아는 아리아 또한 눈을 빛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 성인식 파티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요?”

한참을 기다린 영애들은 거침이 없었 다. 운만 띄워 놓고 설명해 주지 않은 탓에 궁금증이 하늘을 찔렀다.

사라 역시 숨기려는 생각은 없는 모양 인지 그녀들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도대체 성인식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빈센트 후작님께서……. 제가 떨어뜨 린 손수건을 주우셨답니다.”

“세상에……!”

“정말인가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영애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아리아 역시 제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이에 동참했다. 부끄러운 듯 사라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가져 가셨나요?”

“부끄럽지만 그렇답니다. 손수건에 놓 인 수가 아름답다며 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난 뒤에는요?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죠?”

“춤을 청하셔서 같이 춤을 췄지요 무 뚝뚝하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자상한 분이셨어요”

빈센트 후작은 10대 후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된 탓에 그간 일에만 몰 두하며 곁에 여인을 두지 않았다.

또한 그 어떤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았 으나 성인식만은 예외였다. 성인이 되는 귀족들은 축하하는 자리인 탓에 각 가 문을 대표하는 귀족의 참가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빈센트 후작을 만나 볼 수 있 는 자리는 성인식 파티가 유일했으나, 늘 일에 치여 있는 그였기에 잠깐 얼굴 만 비추고 떠나기 십상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려던 와중에 아주 우연치 않게 사라와 마주한 것이다.

“어머나!”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빈센트 후작님께서 춤을 청하실 정도면……! 분명 첫눈에 반하신 게 틀 림없어요!”

젊고 능력이 있는 데다 훤칠하게 잘생 긴 그였기에, 늘 미혼 영애들의 관심 대 상이었다. 성격이 무뚝뚝하고 자주 볼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저 철옹성같이 굳건한 남자의 마음을

누가 얻을 수 있을까. 혹시 그 주인이 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였다.

“그래서, 오늘 시종이 온 이유는 뭐 죠?”

같이 춤을 추었으니 그에 대한 답례나 데이트 신청일 것이 뻔했지만, 사라의 입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영 애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꽃다발과 목걸이를 선물로 보내셨어 요 그리고.?…

“그리고요?”

“그리고.?…. 눈이 녹기 전에 호숫가 로 산책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편지도 함께였죠、”

“아아?..

“어쩜 그리도 로맨틱할 수가……

남들이 하는 만큼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뚝뚝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빈센트 후작인 탓에 그 평가 기준이 순식간에 낮아졌다.

호숫가로 산책을 갈 때 입을 드레스를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며 요란을 떠는 영애들 사이로 사라가 곤란한 미소로 아리아를 힐끗댔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