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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53화 (53/199)

53화

이시스를 발견한 오스카가 큰 걸음으 로 그녀의 곁에 다가왔다.

“점심은 들었나■요, 오스카?”

“……미엘르 영애도 함께 계셨군요”

“말씀을 안 드렸나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면서 능청을 떠는 이시스에게 오스카는 아무런 대답 도 하지 못했다.

“일단 앉아요, 오스카. 차라도 마시며 좀 쉬는 게 좋겠어요■”

그가 두말 않고 미엘르의 옆에 앉았 다. 감히 제 누이의 옆에 앉을 수 없었 기 때문이다.

미엘르가 얼굴을 붉히며 오스카를 힐 끗댔다. 제대로 된 인사조차 받지 못했 건만,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오스카 님.”

“잘 지내셨습니까.”

“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막바지라 그런 모양입니다.”

“제가 곁에서 챙겨 드릴 수 있다면 좋 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타 까워요”

“……괜찮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는 없습니다.”

여전히 여자의 마음도 모른 채 무뚝뚝 하게 대꾸하는 오스카에 이시스가 혀를 찼다.

“오스카, 오랜만에 만난 약혼자에게 너무 매정한 것 아니니?”

약혼자라는 말에 오스카와 미엘르의 반응이 크게 엇갈렸다.

“누님, 아직…… 약혼을 하진 않았습 니다.”

“미엘르 영애가 성인이 되면 곧 할 텐 데, 뭘. 시간의 문제가 아니겠니?”

미엘르가 제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한껏 열이 오른 볼이 태양처럼 뜨거워 보였다.

그리고 오스카는 이번에도 별다른 대 답을 할 수 없었다. 약속된 미래는 아니 었지만,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되어 가 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엘르 영애, 오스카가 무뚝뚝하지만 이해해 줘요 원래 성격이 그런 걸요 그건 누이인 저도 어쩔 도리가 없답니 다.”

“아뇨! 괜찮아요 괘념치 마세요”

미엘르는 오스카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 행복했다. 심지어 지금 이곳 은 프레데리크 공작가가 아닌가.

마치 시간이 홀러 그와 결혼해 공작가 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아마도 이시스 공녀의 도움으로 그렇 게 될 가능성이 컸지만 아리아라는 일 말의 불안감 때문에 간절하고 또 간절 했다.

“영애께선 하얀색이 잘 어울리시니 분 명 드레스도 아름다우시겠죠、”

“어머나... 그럴까요?

“그럼요 금을 칠한 장미 화관도 준비 해야겠어요/

아직 몇 년이나 남았건만, 이시스가 무뚝뚝한 제 동생을 대신했다. 덕분에 오스카가 달리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음 에도, 정원에 핀 장미들보다 더 화사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으며 티타 임을 보낸 미엘르는 무척이나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고, 그녀를 배웅한 뒤 다 시 정원으로 돌아온 이시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던 얼굴을 내던지며 오스카를 타박했다.

“오스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누님.”

“로스첸트가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니 친분을 유지하라고 그렇게 일러두었을 텐데.”

신경질이 난 듯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이 퍽 거칠었다.

“다시 말하지만, 미엘르 영애와의 관 계를 소홀히 하지 마렴. 제국에서 로스 첸트 백작가보다 재력을 갖춘 가문은 없으니까. 지금 우리 가문에 가장 필요 한 건 로스첸트 백작가의 재력인 걸 너 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스카는 누이인 이시스의 말에 그러

겠다고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손 에 쥔 찻잔을 어색하게 매만질 뿐이었 다.

“왜 대답이 없는 거야?”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 그건?

갈피를 잃은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 동생의 형편없는 꼴을 직 면한 이시스가 기가 차다는 듯 비웃었 다.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인 건 아니겠 지.”

“……소문이라니요”

“네가 매춘부의 딸에게 관심을 가졌다 는 소문 말이야.”

매춘부의 딸.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 만 오스카는 그녀가 지칭하는 것이 아 리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리아를 매춘부의 딸로 취급했기 때 문은 아니었다. 그저 최근 몇 달간 그녀 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기에 바로 알아챘을 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재혼으로 로스첸트의 성을 얻 었다고는 하지만 그 아이는 절대 안 돼. 어떻게 그런 더러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가 있지? 차라리 독신으로 살겠 다는 선언이 낫겠구나.”

“오스카, 출신은 어디 가지 않는단다. 제 어미를 닮아 천박한 말과 행동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다니면 어쩌려고 그러 니? 분명 널 배신할 거야.”

“그리고 난 매춘부의 피가 우리 가문 에 섞이는 걸 바라지 않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분을 세탁했다고는 하나, 아리아가 매춘부의 딸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 아름다운 미 모로 남자를 홀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제 누이가 아리아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쏟아 낼 때마다 마음。] 불편하 고 가슴이 아렸다. 자리에 없는 아리아 에게 꽂히는 비수가 마치 제 심장을 뚫 는 것 같았다.

‘왜? 도대체 왜?’

늘 머릿속으로 떠올린 아리아는 환하 게 웃고 있거나, 이따금 매혹적인 표정 을 지으며 그를 괴롭혔다. 그때도 가슴 이 아릿하거나 심장이 아팠으나 지금과 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견딜 수 있는, 아니 이따금 주 체할 수 없이 기분을 고조시키는 그런 고통이라면, 지금은 제 가슴을 후벼 파 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을 소녀가 아 닌데……

소문과는 달리 아리아는 무척이나 순 수하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이었다. 또한 미엘르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출 신 때문에 선을 긋고 배척하는 것은 카 인과 미엘르처럼 보였다.

‘이전의 그녀가 어땠든, 지금은 로스첸 트가의 영애가 아닌가.’

귀족 영애들 또한 혼인을 맺으면 남편 의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미엘르가 자신과 혼인하여 공작 부인이 되는 것 과 어머니의 결혼으로 아리아가 평민에 서 백작 영애가 된 것이 뭐가 다르다고、

‘만약?… 만약 아리아 영애가 평민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아니, 하다못 해 평범한 평민이었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미엘르가 아닌 아리아가 제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아 닐까.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을 하며 아리아 의 얼굴을 떠올렸다. 길고 풍성한 속눈 썹을 슬며시 내리깔고 자신에게 시선을 주며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 그녀가 단 박에 떠올랐다.

그토록, 아름다운 소녀인데…….

“오스카?”

이시스가 대답 없이 입술을 깨물며 고 민에 빠진 오스카를 불렀다. 어째서 저 런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 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저 얼굴을 어 디에서 보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방 금 전에 오스카를 보던 미엘르의 표정 을...

“ <? 人카 너 설미”..

그녀는 차마 자신이 생각한 가설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소문이 진짜였구나?…!’

처음 그 소문을 흐}녀를 통해 들었을 때, 기가 찼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자 신, 그리고 자신의 동생은 저급한 매춘 부의 딸 따위가 감히 올려다 볼 수조차 없는 고귀한 혈통의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자신의 동생이 한낱 매춘부에 딸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는 꿈에서 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제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 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 목이 탔다.

그리고 오스카를 쏘아보았다. 제 누이 가 이리도 충격을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데, 여전히 정신이 나간 동생이 원망스 러웠다.

결국 참지 못한 이시스가 자리에서 일

어나 오스카의 뺨을 내리쳤다. 무방비 상태로 뺨을 맞은 그는 놀란 얼굴을 수 습하지 못하고 이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가문에 먹칠을 할 작정인 거지!”

“누님……!”

“어떻게 그 소문이 사실일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프레데리크가의 후계자 라고 할 거야?!”

“저는?…

“네 누이가 창피를 당하는 꼴을, 기어 코 봐야겠어?! 어떻게, 네가!”

울분을 토하는 제 누이에 오스카가 혼 란스러워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그러곤 방금 전 자신이 아리아를 떠올 리며 느낀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 째서 자신은 미엘르가 아닌 아리아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인가.

그리고 수많은 밤을 그녀를 생각하며 떠올리며 마음을 졸였거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깨닫지 못했는가.

왜, 왜 조금 더 이 마음이 작을 때 알 아차려 정리하지 못했는가.

이미 너무나도 커져 버려 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그녀의 존재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것이 얼굴에 모두 드러난 탓에 이시스가 머리를 짚었다.

“……넌 똑똑한 아이이니 마음만으로

끝내리라 믿으마.”

진실로 믿는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 렇게 하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분명 아리아를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오스카.”

이시스가 재촉했다. 빨리 대답하지 않 으면 그녀는 아리아에게 해를 끼칠 것 이거늘?… 어째서 쉬이 그렇게 하겠다 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오스카...

이제 이시스의 부름은 고함에 가까웠 다. 체면조차 잊은 채 꽉 쥔 주먹을 바 르르 떨기까지 했다.

“네가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어 떻게 할 지는 잘 알 텐데!”

망설이는 그의 태도에 더 이상 화를 주체하기 힘들어진 이시스가 당장이라 도 아리아를 해칠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이시스 누님!”

오스카가 이시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가 마음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꺼내기를 바라며 이시스가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제 누이를 응시하는 그는, 마치 영혼의 반쪽을 잃은 듯 처참하고 서글 픈 모습이었다.

“……누님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그러 니 제발?… 제발 모두에게 천대받는 그 가여운 소 녀를 해치지 말아 달라며 오스카가 제 얼굴을 감쌌다. 제 큰마음을 깨닫자마자 묻어 버려야 하는 가녀린 짐승이었다.

곧 바스라질 것처럼 미약하게 흐느끼 는 그는 이시스의 얼굴에 다시금 생기 를 넣어 주었다. 그녀가 오스카에게 천 천히 다가갔다.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악녀의 꾐에 넘어가면 이리도 괴로워지는 거란다. 앞으로는 마음을 단 단히 먹도록 하렴. 이 누이는, 널 믿으 니까.”

오스카의 흐느낌이 커졌다. 그것을 아 주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진 이시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미엘르 영애에게 선물을 보낼게. 그 녀가 좋아하는 꽃다발도 함께 말이야. 너는 언제나처럼 가문을 이을 준비만 하면 된단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에 힘이 들어 갔다. 이에 오스카의 고개가 미약하게나 마 끄덕여졌고, 만족한 이시스는 모두가 떠난 정원에 제 동생만을 남겨 둔 채 저택으로 사라졌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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