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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58화 (58/199)

58화

* * *

“너는?… 누구지?”

“예……?”

반쯤 고개를 든 미엘르에게 쏟아진 말 이었다.

아스테로페가 섬뜩할 정도로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네가 미엘르라고?”

미엘르는 너무 놀란 나머지 고개를 제 대로 들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마치 그녀를 부정하는 듯한 말투에 소 름이 끼쳤다. 왜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말투로 다그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 정말 네가 미엘르라고?”

아스테로페가 기가 차다는 둣 헛웃음 을 뱉었다. 이상함을 느낀 이시스 공녀 가 저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피고 조 심스레 그 까닭을 물었다. 지금 여기서 그녀의 편은 아스테로페가 아닌 미엘르 였다.

“아스테로페 전하?… 미엘르 영애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기라도?”

“?아니.”

이시스가 물었음에도 아스테로페의 시 선은 미엘르를 향^ 있었다.

그가 어미를 잃은 작은 새처럼 떠는 미엘르의 전신을 한차례 훑더니 자조적 인 말투로 대답을 이었다.

“잘못은 내가 저지른 것 같군. 인사를 했으니 나는 이만 가 보지.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해, 공녀.”

미엘르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더는 미 련이 없다는 둣 차갑게 돌아섰다.

그제야 칼날 같은 시선에서 벗어난 미 엘르가 밖으로 튀어나올 듯 급격하게 뛰는 제 심장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오스카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미엘르 영애, 도대체 전하와 무슨 일 이 있었던 거죠?!”

쓰러진 그녀를 이시스가 닦달했다. 그 러나 단 한 번도 아스테로페와 인연이 닿지 않았던 미엘르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겠어요……. 저는 전하를 처 음 뵙는 걸요”

이시스가 혀를 찼다. 귀족파에 굴복하 고 생일을 축하하러 나타난 줄 알았더 니, 인사는 겨우 한마디만 건네고 미엘 르를 닦달한 뒤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황태자의 목적이 뭐였을까.

이시스를 비롯한 정원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뵌 적이 없나요?”

“그, 그럼요”

“그럼 왜 미엘르 영애를 찾아서 얼굴 을 확인하고.?… 아니라는 듯 돌아섰을까. 거기까지 물 으려던 이시스는, 정말 미엘르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선 것인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흐혹?…

황태자의 거친 말과 태도, 그리고 이 시스의 재촉에 미엘르가 기어코 눈물을 쏟아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수많은 교육을 받 아 귀족 영애의 표본이 되었다 한들, 미 엘르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더불어 지금까지 사랑과 호의 속에서 커 온 그녀가 견디기엔 너무나도 큰 시 련이었다. 미엘르를 안은 오스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

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기엔 미엘 르가 너무 어렸다. 그녀를 좋아하고 말 고를 떠나 구슬피 울고 있는 미엘르는 퍽 가여운 모습이었다.

“미안해?요, 미엘르 영애. 내가 너무 홍 분했네요 ……오스카! 영애를 저택으로 모시도록. 편안히 쉴 수 있게 도와주 렴.”

“예, 누님.”

오스카가 미엘르의 어깨를 감싸 부축 해 저택으로 사라졌다. 미엘르는 지금도 나중에도 꼭 필요한 패이거늘, 흥분한 나머지 몰아붙이고 말았다.

‘부디 똑똑한 오스카가 잘 달래야 할

텐데.’

그나마 그7} 어리거나, 약하거나, 불쌍 한 존재를 그냥 넘기지 못하니 어떻게 든 미엘르를 달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 던 이시스가 음악 소리를 키우라고 지 시했다. 그?러자 최대한 음을 크게 내려 연주자들이 제 몸에 힘을 실었다.

정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선율에 그제야 만족한 이시스가 자애로운 표정 을 지었다.

“이런,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 하루 심 기가 불편하셨던 모양이에요”

어차피 이곳에 황태자의 편은 없다.

그는 귀족들에게 배척된 일개 황족이기 때문이다.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권 력과 재력을 잡은 귀족들이었음으로 그 가 아무리 권위 있는 척해 보았자 허수 아비일 뿐이었다.

이시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참석자 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다시금 활기를 찾은 정원을 뒤로하며 곧장 따라붙은 기사에게 조용히 명령했 다.

“미엘르와 황태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 하나도 빠짐없이.”

명령을 들은 기사가 곧장 사라졌다. 분명 무언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미 엘르와는 상관이 없을지 몰라도 황태자 입장에서 보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저토록 분개하는 일이라니.’

위험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 었는지 알아봐야 했다.

* * *

공녀의 생일 파티에 간다며 함박웃음 을 짓고 외출한 미엘르는 귀가 시간을 넘어 취침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백 작가에 돌아왔다.

아주 늦은 밤, 백작가로 들어서는 마

차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러웠던 탓에 아리아 역시 그녀의 귀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직 성인 이 되지 않은 영애가 이리도 늦게 돌아 온 것일까. 혹 술이라도 마셔 취한 상태 는 아닐까? 그렇다면 아주 재미있을 텐 데.

기대하며 아리아가 슈미즈 위에 간단 한 겉옷을 걸치고 내려갔다. 그러나 저 택 입구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아리아가 기대했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 이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데려다주지 않

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이 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는 오스 카의 말투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그리고 그의 다정함에 퉁퉁 부운 흉한 눈으로 부드럽게 웃는 미엘르는 끔찍함 그 자체였다.

‘도대체 이게…… 이게 무슨 상황이 야..9’

아직 자신에겐 답장조차 보내지 않은 오스카가 왜 이렇게 늦은 밤에 미엘르 를 배웅하고 있는 것일까. 미엘르를 위 해선 목숨마저 내바칠 백작가의 우수한 기사들이 수없이 붙어 있거늘

왜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배웅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간에 일이 조 금 있어서 미엘르 영애께서 잠이 드셨 는데, 곤히 주무시는 통에 차마 깨울 수 가 없어 이렇게 늦어 버렸습니다.”

“아아, 그런가? 이렇게 바래다주었으 니 됐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주의하게. 아직 미성년인데다가 미혼의 몸이 아닌 가.”

백작은 가볍게 타박을 하는 것치곤, 그리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 렇게 엮여서 결혼까지 하게 되기를 바 라는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자 쌀쌀한 저녁바 람에 노 출 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처럼인데 자고 가는 게 어떤가? 홀 로 돌아갈 것이 걱정이 되는군.”

건장한 남성이 어째서 홀로 돌아가는 게 걱정이 되는 건지. 더욱이 백작가의 마차로 데려다주면 그만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방이 많으니 그렇게 해요? 마침 손님방을 청소해 놓아서 맞이하기 좋은 상태이기도 하고요”

백작 부인이 눈치껏 거들었다. 미엘르 역시 오스카의 소매를 잡으며 무언의 재촉을 했다. 그녀를 응시하는 오스카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그럼 하룻밤 신새를 지겠습니 다.”

“그래, 그래. 어서 들어오게나. 따뜻한 차라도 한잔 걸치고 자는 게 어떻겠 나‘?”

“감사합니다.”

백작은 오스카의 어깨를 감싸 안고 퍽 홍이 난 얼굴로 사라졌다. 그런 그들의 뒤를 미엘르가 따랐고, 충격으로 굳어 있는 아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작 부인 또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빈 홀에 아리아 혼자만이 남았다.

‘ 어째서……

어째서일까. 만에 하나, 미엘르에게 무 슨 일이 생겨 그녀를 챙긴 것까지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거지……?’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듯 철저하게 무 시하는 모습을 마주하자 그간 애써 외 면했던 현실이 섬광처럼 쏟아졌다. 조금 이나마 갖고 있던 기대가 산산조각 났 다.

‘오스카는 정말.?… 나와의 연을 끊고 싶은 거야?…!’

왜! 어째서! ?목숨을 바쳐 모래시계를 돌렸건만 미래는 바뀌지 않는 것인가! 이런 미래를 보여 주려 과거로 돌려보 낸 것이라면 너무도 야속하지 않은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엘르를 버리고 자신에게 올 것처럼 굴었다. 단 순한 내용이었지만 그에게서 답장이 도 착할 때마다 미래가 바뀌어 가는 것 같 아 안심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같 은 수순을 밟는다면…… 그래서 아무것 도 바뀌지 않는다면……!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최후에 목이 베일 자는, 바로 자신이니 까.

아리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보기 좋게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었음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 는듯싶었다.

그렇게 아리아는 한동안 충격에 빠져 오스카가 몰고 온 차가운 밤공기 속에 서 홀로 외로이 서 있었다. 아무런 행동 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몸이 식어 전신이 바들바들 떨 릴 지경이 되어서야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쓰러지듯 침대에 눕는 몸이 죽은 자의 그것과도 같이 무거웠다.

‘이대로, 잠이 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 았으면……

어차피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얼마 살지 않고 죽을 텐데, 지금 사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을까. 미엘르는 오스카와 결혼할 테고, 프레데리크가의 안주인이 된 후 이시스의 힘을 업어 내 목을 칠 텐데.

비웃듯 다시 덮쳐 올 고통스러울 미래 가 두려웠다.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 다면…… 차라리 지금 이대로 죽는 것 이 나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눈 물을 흘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녀는 과거와 같은 미래를 반 복하여 몇 번이나 목이 잘렸다. 모래시 계를 아무리 돌려도 누구 하나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치 네 미래는 이것밖에 없다는 듯 모두가 그녀를 비웃었다. 돌아서는 오스 카에게 도와달라고 수차례 외쳤지만 목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잘렸기 때 문이다.

그 지옥 속에서 허덕이며 핏물을 쏟아 냈다. 제발, 제발 누가 나를 좀 도와달 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푸른 새벽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을 때쯤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세시가 가까워진 깊은 밤이었다.

고작 몇 시간밖에 자지 못한 탓에 머 리가 몽롱했다. 눈앞이 뿌옇고 정신이 없어 어쩌면 아직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이 이어지고 있다 고.

잠시 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아리 아가 제 방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음직 이지 않는 어두운 새벽.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은 2층에 마련된 손님방이었다.

열 개에 달하는 손님방을 하나하나 열 어 확인한 그녀는, 여섯 번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

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키던 오스카가 반쯤 상체를 세운 자세로 딱 딱하게 굳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멈춘 상태 였다. 자다 깬 상태 그대로 왔기 때문에 가벼운 슈미즈 차림인 아리아였다.

보호받지 못해 그대로 노출된 팔과 어 깨, 다리 등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 났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자라나는 도중 의 그녀는, 달빛의 힘을 빌려 오스카의 시선을 빼앗았다.

“오스카 님……?”

오스카를 발견한 아리아가 조금 느린 걸음으로 그가 자리한 침대로 향했다. 나른하게 뜬 눈매가 그녀가 잠이 덜 깼 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오스카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막을 생각조 차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녀가 왜 이 새벽에 자신을 찾 아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이 미 머릿속에서 모두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부러 외면하고 회피했는데, 눈이라 도 마주치면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 유도 말하지 않고 도망쳤는데. 그런 그 의 노력을 부숴 버리 듯 아리아가 제 발로 찾아왔다.

침대 끄트머리까지 다가와 보드라운 이불에 손을 얹은 아리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가녀린 어깨와 곧 바스라질 것처럼 슬 퍼 보이는 얼굴. 모욕을 당해 서글프게 울었던 미엘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모습에 오스카의 심장이 요동쳤다.

“부디…… 부디 저를 버리지 마세 요?…

아주 작은 목소리를 힘겹게 꺼낸 그녀 는 조금 울먹이고 있었다.

그 슬픔이 너무나도 잘 느껴져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찰나, 눈을 감은 아리아 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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