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
아리아가 사라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백작은 집 요하리만치 아리아에게 사라와 빈센 트 후작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주 대단한 우연이라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에게 신경도 쓰 지 않더니, 이리도 갑작스럽게 돌변 하는 것을 보면 계산 빠른 상인은 상인이다 싶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 었는데, 과거의 그녀라면 새로운 아 비의 관심에 기뻐 주절주절 늘어놓 았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라 는 점이었다. 저를 이용할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 줄 것은 없었다. 이용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 뿐이어야 했다.
“오랜 시간 출장을 나가 있어 네
가정 교사일 때 인사 한 번 못한 것 이 한스럽구나.”
줄장을 가지 않았어도 관심을 가 지지 않았을 게 뻔한데 백작이 괜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아리아 네가 있으니 천만 다행이구나. 공작님을 뵐 낯이 생겼 어.”
백작이 안심한 듯 와인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리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어리석게도 조금의 의심도 없 이 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제 편으 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속은 황태자와 내통하며 자신의 세력을 만들며 언제든 목숨을 끊을 빈틈을 노리고 있는 적임을 모르고.
“그러게 말이에요. 언니에게도 좋 은 인연이 생겨 다행이에요.”
미엘르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 는 척을 했다. 후작 부인이 될 사라 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을게 분 명한데도 말이다.
‘아니, 미엘르라면 내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귀족 여 성들이 미엘르와 친해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아리아의 가정 교사였던 사라가
후작 부인이 된 것에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으나, 그렇더라도 곧 황태자 비가 될 이시스 공녀의 전폭적인 지 지를 받고 있는 그녀였기에 달리 초 조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어요.”
백작의 유난스러웠던 식사 시간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자, 제시가 기 다렸다는 듯 편지를 건넸다.
“어디서 온 편지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스라는 분 께서 보내셨다는 것밖에요.”
“……아스라고?”
깜짝 놀란 아리아가 소파에 앉으 려던 엉거주춤한 자세로 제시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를 보낸다 고는 하였으나 이렇게 빠른 시일에 보낼 줄은.
서둘러 열어 내용을 확인하자, 이 전에 보냈던 간결한 편지와는 다르 게 꽤나 다정한 말이 담겨 있었다.
『날이 추워 영애께서 감기에 걸 리시진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세상에. 만물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꽤나 다정한 말투이 긴 했으나,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라서 그런지 무어라 반응해야 좋을 지 망설여졌다.
“아가씨‘?”
길지 않은 편지를 손에 든 채, 편 지를 읽고 또 읽는 그녀에게 제시가 의문을 표했다. 혹여나 이상한 내용 이라도 적혀 있는지 걱정이 되는 모 양이었다.
아스와는 몇 번이고 주고받은 편 지였다. 더욱이 바로 며칠 전에 사 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건만. 이 게 뭐라고 이리도 얼굴에 열이 오르 는지, 아리아는 고개를 저어 평정심 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답장은 다음 주에 받으러 온다고 하셨어요.”
“?…"누가?”
“글쎄요? 심부름꾼인 것 같았어요.” 바쁜 그가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겠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자, 조 금 평정심을 되찾아 주었다.
그래서 미룰 것 없이 담담하게 소 소한 일상과 아스에 대한 안부로 가 득 찬 답장을 작성할 수 있었다.
작성한 답장을 서랍에 고이 넣은 아리아가 제시에게 말했다.
“심부름꾼이 도착하면 알려 줘.”
“예, 아가씨.”
그사이에 빈센트 후작과 사라의 약혼식날이 다가왔다. 백작 부인에 게도 보여 주지 않은 연분홍색의 드 레스를 입은 아리아가 거울을 보며 제 차림을 확인했다.
“아가씨! 이 목걸이를 걸치시는 게 어떨까요?”
아리아 못지않게 치장을 한 애니 가 화려한 목걸이를 들고 나타났다. 사라의 취향에 맞춘 아리아의 드레 스가 심심해 보였던 탓이다.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제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장단을 맞췄다.
“어라? 이런 목걸이가 있었나? 정 말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이건?
드레스 룸 저 구석에 숨겨 놓았던 아스에게서 받은 목걸이였다. 드레 스와 여타 장신구들도 함께였는데, 너무도 화려한 탓에 입지 못할 것 같아 숨겨 둔 것이었다.
“한번 대 보기라도 해 보셔요!”
멋대로 아리아의 목에 목걸이를 대 본 애니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구경하던 제시 역시 손뼉을 치며 잘 어울린다고 호들갑을 떨었 다.
“세상에나. 어쩜 뭘 걸치셔도 이리 잘 어울리시죠?”
“이렇게 화려한 목걸이는 자칫 잘 못하면 붕 떠 보이는 경우도 많던데 말이에요.”
확실히 원래 가지고 태어난 외모 가 화려해서인지 자칫 부담스럽거나 튀어 보일 수 있는 목걸이가 자연스 럽게 어우러졌다.
표면적으로는 아직 나댈 만한 위 치가 아닌 데다가 오늘의 주인공은 신부인 사라였기에 화려하게 꾸밀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목걸이를 대 보니 꽤나 어울려 자꾸 시선이 따라 갔다.
“……그럼, 이 목걸이만 착용할까?”
“목걸이 하나만으론 아쉽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그게 좋겠 어요!”
목걸이를 착용한 후, 마지막으로 머 리카락에 반짝이는 보석 가루를 뿌려 마무리를 지었고,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할 만큼 매혹적인 모습으로 치 장한 아리아가 1층으로 내려갔다.
“……세상에나, 아리아. 어쩜 이렇 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흠흠. 네 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아주 아름답구나.”
미리 준비를 마치고 저택 현관 근 처에서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백작과 백작 부인이 아리아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려온 미엘르 역시 아리아의 미색에 얼굴을 굳혔다.
나름 열심히 꾸민 모양인데, 그녀 는 본디 타고난 외형이 화려함과는 멀었기에 아리아의 옆에 서자, 존재 감이 흐려졌다.
“미엘르, 그렇게 구석에 앉아 있으 면 불편하지 않니?”
아리아가 마차 벽에 붙어 창밖만을 응시하는 미엘르에게 물었다.
“……아뇨. 오랜만의 외출이라서 밖을 구경하고 싶어서요.”
고고한 백합 같은 미엘르는, 금가 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장미 같은 아리아의 옆에 다가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후작저에 도착한 뒤 에도 아리아와 멀찍이 거리를 유지 했다.
“사라!”
늘 그랬듯 사라의 앞에서는 아이의
흉내를 내는 아리아가 이제는 엇비 슷해진 키임에도 그녀의 허리를 껴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리고 사라의 눈에는 아리아가 언 제나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모양인 지,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맞이해 주 었다. 서로를 응시하는 눈빛이 아직 오지 않은 봄볕처럼 따스했다.
“어서 와요, 아리아. 기다리고 있 었어요.”
“이렇게 축하해 주러 오}’ 주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빈센트 후작 역시 지난번과 다를 바가 없는 다정한 얼굴과 말씨로 아 리아를 환영했다.
“작지만 선물이에요. 두 분께서 오 래토록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준비했어요.”
그래, 가능하다면 평생 말이다. 그 래야 평생 제 뒷배가 되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아리아의 손짓에 뒤에서 대기하던 애니가 들고 있던 선물을 조심스레 건넸다.
“……세상에! 이 귀한 걸 어떻게 받을까요.”
아리아가 준비한 것은 크리스털로
만든 새 한 쌍이었다.
금실이 좋다고 알려진 새였다. 눈 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혔고 받침은 황금이었다. 그곳에는 빈센트 후작 부부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귀한 선물은 저도 처음 받 아 봅니다. 이렇게 큰 크리스털이 있다니요.”
후작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 리아의 선물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보석상에 부탁해 특별히 제작한 그 것은,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큰 크기 의 크리스털을 구하기 쉽지 않아 주 문조차 어려운 물건이었다.
후작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 으나, 사라가 너무나도 부담스러워 하는 얼굴이었기에 아리아가 수줍어 하는 얼굴로 덧붙였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자 선생님인 사라의 약혼이니, 꼭 대단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어요. 마음에 들어 했 으면 좋겠네요.”
그제야 자신을 향한 아리아의 마 음을 읽은 사라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식은 시작하 지도 않았건만, 벌써 울 기세였기에 아리아가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끌 어안았다.
그 훈훈한 장면을 지켜보던 백작 이 목을 울리며 그들의 사이에 자연 스럽게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빈센트 후작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아의 부친인 덕에 백작에 대한 태도 또한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백작에 이어 백작 부인까지 살갑게 인사를 나눈 뒤, 아리아를 피해 조 금 떨어져 있던 미엘르가 사라와 빈 센트 후작에게 인사했다.
“축하드려요. 사라 영애께선 마음 씨가 고우시니, 분명 자애로운 후작 부인이 되시겠지요.”
“감사해요, 미엘르 영애.”
곱디고운 미엘르의 웃음에도 사라 는 형식적인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빈센트 후작이 의아 한 눈으로 힐끗댔다.
“아리아 언니를 저리도 우아한 영 애로 교육시키셨으니, 분명 모두에 게 귀감이 되실 만한 분이 틀림없겠 지요? 저도 꼭 영애와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 네요.”
“……시간이 닿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요.”
“사라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 어 하는 영애들이 많을 테니, 근 시 일 내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에요.”
“그러시군요.”
“그럼, 연회를 즐겁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로스첸트 영애.”
사라가 불편해하는 것을 느낀 빈 센트 후작이 대화를 끊었고, 갑작스 럽게 축객령을 당한 탓에 잠시 표정 을 가다듬은 미엘르가 부드러운 미 소와 함께 사라졌다.
“어디 불편하시기라도 하십니까?”
빈센트 후작의 물음에 사라가 가 볍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긴장을 해서 그런가 봐 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걱정이 되는 군요. 잠시 쉬시는 게 어떻겠 습니까?”
사라의 이마를 짚은 그가 걱정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미엘르가 떠난 지금은 정 말로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사라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한껏 나아진 표정으로 웃어 보이 기까지 하는 탓에, 빈센트 후작은 더 이상 그녀에게 쉬라는 말을 하는 대신 시종에게 달콤한 과일 주스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의 친절함과 다정함에 아리아의 출신을 운운하던 미엘르에 대한 감 정이 사라진 사라가 다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백작의 손을 잡았다.
* * *
백작은 사라와 깊은 우정을 나눈 아리아를 자신의 무리에 소개시켜 주었다. 아직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 았기에, 여타 귀족들과 처음으로 정 식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과거에는 성인이 된 자신을 수치 스럽게만 여길 뿐, 그 누구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기에 수만 가지 감 정이 교차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부 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나 아름다운 영애일 줄은 꿈 에도 몰랐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영애를 지금 만 나 뵙게 되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개중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표한 것은 미혼의 남성 귀족들이었다. 이 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빛나고 아름 답게 치장한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 지 않을 남성은 없었다.
여성들 또한 아리아의 아름다움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막으려 부채 를 팔랑이며 여유로운 척을 했다. 미엘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애써 무시하고 싶어 하는 모 습들이었다.
아주 익숙하고 당연한 반응에 아 리아가 속눈썹을 팔랑이며 매혹적인 웃음을 더했다. 그러자 맨 앞에서 아리아의 그 모습을 직면한 남성이 양 볼과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호, 혹시 백작님께선 아, 아리아 영애의 피앙세를 정하셨는지요……?”
“하하, 글쎄요. 아무래도 아직 어 리지 않습니까. 천천히 좋은 짝을 찾아야겠지요.”
사라와의 친분을 시작해 아리아를 써먹을 곳이 꽤나 많다는 것을 이제 야 알아차린 백작이 그간 소중히 보 듬어 키운 양 그녀의 가치를 높이기 시작했다.
모인 남성들 중에 꽤나 만족스러운 가문이 있었는지, 백작 부인 역시 아 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짙은 웃음을 홀렸다.
이에 애가 탄 남성들이 백작의 환 심을 사려 없는 말까지 지어내 자신 들의 가문과 재력을 과시했고, 이 익숙하고 지겨운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의 눈에 저 멀리 익숙한 뒷모 습이 들어왔다.
‘아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