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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94화 (94/199)

94화

그렇게 소란스러운 겨울이 한창인데, 베리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들과 친척들, 지인들까지 모두 수 색해 보았지만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10대 후반의 아무것도 가

진 것이 없는 작은 소녀이건만 어째 서 이토록 찾을 수가 없는지 의문이 었다. 사안을 크게 받아들여 수도를 출입하는 경비도 강화했는데 말이다.

의문과 의혹은 점점 커져 갔고, 때 맞추어 아리아가 애니를 이용해 그 불씨에 한바탕 기름을 부어 주었다.

‘그녀의 뒤에 누군가 있지 않은 이상, 이 추운 겨울을 홀로 나는 것은 불가 능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아주 그럴듯하고 실제로도 그러했기 에 베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게 분명하다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몇 번 이나 경비대가 저택을 방문하여 시종 들을 탐문했다.

“저는 정말 아닙니다! 제가 아리아 아가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도 아닙니다! 애초에 같은 시종 나부랭이가 도망자를 도와 봤자 얼마 나 돕겠습니까?!”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했고, 같은 시종끼리 도와 보았 자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은 사 실이었기에 시종들을 향한 탐문은 곧 종료되었다.

연이은 주장 중,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이 나온 덕분이기도 했다.

“저택에서 아리아 아가씨를 싫어하 는 사람은 엠마 님밖에 없을 걸요?

엠마 님은 평민 출신인 아리아 아가 씨를 고깝게 여겼으니까요. 늘 천박 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죠.”

바로 애니의 증언이었다.

그녀는 아리아가 독살을 당하던 순 간을 함께했고, 엠마의 밑에서도 일 한 경험이 있기에 발언에 신뢰도가 높았다.

물론 그녀 한 명만의 증언은 아니었 다. 여타 시종들도 그렇게 느꼈다는 말들이 덧붙으며 더욱더 신뢰감이 높 아져 갔다.

더불어 아리아의 눈물 섞인 경험담 도 한몫했다.

“엠마요? 글쎄요……. 엠마는……

아무래도 제가 미엘르의 명예를 더럽 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죠. 보시다시피 저 는…… 출신이 변변치 않고, 아직 미 엘르와 나란히 서기에는 미숙한 점이 많으니까요.”

물음에 답하는 아리아에게 경비대 기사들의 몽롱한 시선이 향했다. 이 따금 눈시울을 붉힐 때마다 안타까움 의 탄식 또한 함께했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의 실내용 원피스 위에 눈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연분홍 겉옷을 걸친 그녀는 마치 하 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기 때문 이다.

조곤조곤 대답을 할 때마다 깜빡이 는 연녹색 눈동자와 사르르 넘어 가 는 빛을 뿌린 듯 눈부신 금발은, 경 비대 기사들의 얼굴을 붉히기에 충분 했다.

“혹시, 미엘르와는 대화를 나누어 보셨나요?”

“아, 아니요. 미엘르 아가씨께선 적 잖이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아 아직 뵙 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몸이 약한 아이니까 요. 그렇지만 미엘르는 엠마와 가장 친분이 두터우니, 무언가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어서 미엘르를 취조하게끔

정보를 흘리며 한참이나 그들의 질문 에 답을 하던 아리아가 점점 식어 가 는 차를 보고는 대기 중이던 제시와 애니를 불렀다.

“제시, 그리고 애니. 기사님들의 차 가 식어 가는구나. 출출하실 테니 과 자와 과일도 내어 주렴.”

“아, 아닙니다. 저희는 금방 가 봐야 합니다.”

퍽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는 기사의 손을 잡은 아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날이 찬데 저 때문에 이리도 고 생을 하시니 죄스러워서 그래요 부디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니,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저, 정 그러시다면 잠시만 실 례하겠습니다.”

작정하고 유혹하는 그녀를 뿌리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아리아를 실제로 접한 그들 은 이토록 아름답고 순수한 영애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에 분 노를 감추지 못했고, 조사에는 점점 사심이 깃들어 갔다. 때문에 엠마를 이번 사건의 배후로 몰아가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아가씨께선 정말 엠마 님이 범인이 라고 생각하세요?”

애니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물었 다. 물을 갈아 다시 가져다 놓은 튤립 이 방금 꺾은 듯 퍽 싱싱해 보였다.

그것을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책으 로 시선을 돌린 아리아가 대답했다.

“관련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렴요. 저 또한 엠마 님의 지시로 아가씨께 왔으니까요.”

그리 대답한 애니가 실수했다는 것 을 깨닫고 잠시 아리아의 눈치를 보 다 변명을 시작했다.

“그, 그렇다고는 하지만 금방 사이 가 틀어졌어요! 잘못되었다는 걸 금세 깨달았죠! 지금은 전혀 상관이 없답니 다. 전 아리아 아가씨뿐이에요!”

괜히 찔려서 열을 내는 모습이 가소 로워 웃음을 머금자, 애니가 얼굴을 붉혔다.

“아, 아무튼, 베리가 잡히면 진범도 밝혀지겠죠? 엠마 님께서 경비대의 감시를 받고 계시니 더는 도망치기도 힘들 테고요.”

“그래, 진범이 어서 밝혀져야 할 텐 데 말이야.”

엠마의 뒤에 있는 진짜 진범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치지 않는 이상 미엘르가 베리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을 리가 없을 테니, 베리 또한 증언할 수 없을 테지.

‘그렇다고는 해도, 엠마가 범인으로 몰리면 미엘르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야.’

어미처럼 따르던 그녀가 아닌가. 아 주 조금이라도 분명 미엘르도 한패가 아니냐는 의심이 생길 것이다.

죽이려 했던 자를 죽이지도 못한 데 다, 아군의 평판까지 깎이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문드러질까.

만족할 만큼 시간을 끌어 얻고 싶은 것도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꼭꼭 숨어 있는 베리가 잡히는 일뿐이었다.

아스가 권한 책을 다 읽은 아리아가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놓으며 애니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 겨울에 튤립을 어디서 가져오는 거니? 달리 좋아하는 꽃도 아니니 이렇게 매일 갈 필요는 없는 데 말이야.”

“튤립이요? 제가요? 아가씨께서 받 으신 선물이 아니고요?”

“뭐? 그런 선물을 받은 기억은 없는 데……

“그래요? 그럼 도대체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제시인가? 벌써 몇 번이 나 바뀌었는걸요?”

잘 시들지도 않는 튤립을 누가 이렇 게 자주 바꿔 놓는지 모르겠다는 애 니의 덧붙임에 그제야 누가 이 꽃을 가져다 놓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설마…… 아스?’

그 외엔 생각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이동하는 능력을 가졌으니 충분히 저택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 다녀간 것일까. 대가가 있다고 했는데, 자주 능력을 사용한 거라면 몸은 괜찮은 걸까.

끔찍한 일을 당해 아프다는 소문이 자자한데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아 섭 섭한 마음이 있었건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에 섭섭한 마음이 눈처 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무엇이 그리 급해서 꽃만 놓고 갔단

말인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니 새벽 에 다녀간 것일까. 당분간 잠을 자지 말고 기다려 볼까 고민하다가 괜한 아쉬움에 꽃잎을 만지는데, 문득 들 려오는 거친 발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누가 저택에서 이리도 경박스럽게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시종들은 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 를 기울였고, 백작 부부와 미엘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더욱이 3층에는 아리아의 방밖에 없었기에 필시 들려 오는 발소리는 그녀에게 볼일이 있는 자일 텐데, 어째서 저렇게나 움직임 이 과한 것일까.

이윽고 발소리가 자신의 방 앞에서

멈추자, 애니와 아리아가 잔뜩 긴장 한 얼굴로 몸을 굳혔다. 더구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 은 때이기에 긴장에 한몫을 더했다.

그러나 멈춘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결국 하는 수 없이 먼저 누군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시죠?”

떨리는 애니의 목소리에도 문밖의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무언가 망설이는 듯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 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소란을 떠 는 것을 보면 외부인은 아닐 텐데.

애니 또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아 리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나가 볼까요?”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애니가 곧장 밖에 있는 이를 확인했다. 그리 고 애니는 뜻밖의 방문객에 작게 비 명을 질렀다.

“카인 님……?!”

카인이라고?

놀란 아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어째 서? 아직 돌아오려면 조금 시간이 남 지 않았던가. 천천히 열리는 문밖으 로 보이는 얼굴은 정말로 카인이었다.

이제는 완전한 어른이 된 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아리아를 쏘아보고 있 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카인의 등장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 자, 한참을 아리아를 쏘아보던 카인 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큰일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그의 물음에 아리아가 천천히 고개 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어깨에 걸쳐 있던 보드라운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 졌다. 오랫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야윈 그 몸을 직면한 카인이 마 치 괴롭다는 듯 설핏 인상을 쓰며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이 아주 생소하고 의아해 아 리아가 멀뚱멀뚱 그를 쳐다만 보고 있자,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입을 달싹이던 카인이 이내 깊은 한 숨을 내쉬더니 발길을 돌려 사라졌다.

“……도대체 뭐지?”

아리아의 물음에 애니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을 주지 못했다.

* * *

연락도 주지 않고 일찍 돌아온 카인 때문에, 아리아가 오랜만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힘들면 굳이 내려오지 않 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가 왜 이렇 게 빨리 돌아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 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는 듯, 이번 일 이 원인인 것인지 한동안 방에 틀어 박혀 있던 미엘르와, 창고 사업이 본 격화되어 근교에 나가 있던 백작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하지만 카인은 예정보다 빨리 돌아 온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 다.

“졸업식에 참여하려고 새로이 의복 도 마련했는데, 아쉽구나.”

“모여서 연설만 듣고 끝날 텐데요, 뭘.”

아쉬워하는 백작 부인의 말에 카인 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

에도 백작 부인에 대한 관심이 일절 없었고, 없을 예정이었다. 그저 아버 지가 재혼한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차피 곧 후계자 수업을 받고 가문 을 이어받게 될 테니, 더럽혀진 가문 의 명예는 그의 행보로 만회하면 되 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엘르, 눈이 부운 것 같은데 너마 저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오라버니.”

독살을 당할 뻔한 것은 자신인데 어 째서 그녀가 더 아파 보이는가. 잔뜩 부운 눈과 불안해 보이는 분위기가 평소의 그녀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 였다. 범인이 아니고서야 저리도 불 안해할 필요가 없거늘.

남들보다 천천히 식사를 하며 자리 한 이들의 안색을 살피는데, 문득 시 선을 돌리다가 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훔쳐보다 걸리기라도 한 듯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그 모습이 아주 익숙 했다.

‘?…"설마.’

예전부터 조금씩 느끼고는 있었지 만, 설마 걱정이 되어서 빨리 돌아온 것은 아니겠지. 홀로 생각하거나 쳐 다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극 단적인 행동까지 할 정도면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변화가 아닌가.

‘피는 섞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 여동생이거늘.’

아비는 매춘부에 그 후계자는 여동 생이라.

진정으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이 는 자신과 어미가 아닌 저 부자임이 틀림없었다. 최소한 백작 부인은 자 의로 매춘부가 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도 태어나고 싶어서 매춘부의 딸 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

마지막으로 카인의 심중을 파악하고 자 식사를 하는 내내 그의 동태를 살 폈다. 그가 너무 빨리 돌아온 것 같 다며 걱정하는 백작 부인에게 차갑게 응대했다.

“졸업장은 후에 시종을 보내 받아오 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보다는…… 대답하던 카인의 시선이 다시금 아 리아에게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일렁이는 그 눈빛에 확신이 들었다.

“집안에 큰일이 닥쳤으니 그것이 더 욱 중요하겠죠.”

“경비대의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하고 있으니 금방 잡히겠지.”

“글쎄요. 그런 것치고는 벌써 봄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지 않습니까.”

카인의 차갑고 날카로운 대답에 미 엘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오라비가 어째서 그깟 매춘부의 딸을 위해 저리도 열을 내냐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카인을 이용해 이 시궁창 같은 가문을 파탄 낼 수 있을지도.’

그것은 제 목을 내려치라 명했던 카 인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괜찮아요.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 도 돼요. 보시다시피 치명상은 피했 고,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인 걸요.”

대답은 그러했지만 표정은 비 맞은 강아지보다 더욱 가여워 보였다. 이 저택에 기댈 이 하나 없는 불쌍한 소 녀처럼 보였다.

애매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아리아 를 한참이나 주시하던 카인이 작게 혀를 차며 먼저 일어나 보겠다고 식 당을 나섰다.

‘어쩜 이리도 유쾌할 수가!’

아리아가 터져 나오는 함박웃음을 속으로 애써 삼켜 가며 식사를 계속 했다.

오랜만에 가지는 식사 자리가 흡족 하기 그지없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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