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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97화 (97/199)

97 화

“……아.”

“..?!”

한밤중의 침입자는 바로 다름 아닌 아스였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환한 달빛에 당황해하며 한걸음 물러나는 그가 확연히 보였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색을 흐렸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그가 서둘러 사과했다.

하지만 한밤중의 갑작스런 방문에 얼이 빠진 아리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아스를 빤히 응시했다. 두고 간 튤립 때문에 그가 간혹 다녀 간다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마 주하니 심히 당혹스러웠다.

“아리아 영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말없이 올려다 보는 모습에, 아스가 걱정을 담아 조 심스럽게 아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두 번이나 더 이름을 불린 뒤에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아리아가 천천 히 고개를 끄덕여 반응을 표했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한 데, 살도 너무 많이 빠지셨습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걱정한 아스가 아리아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렇게 잠시 체온을 가늠하던 아스 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아리아가 덮은 이불을 여며 주었다.

“열이 나지 않습니까.”

아스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안타까움 이 섞여 있었다.

그가 해열제라도 먹는 게 좋겠다며 혼잣말을 하는 사이, 정말로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아리아가 그제야 꽉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죠? 분명 여긴 제 방이고…… 지금은 새 벽이고……. 저는 잠을 자려 했던 것 같은데…… 아리아의 걱정이 앞섰던 탓일까. 그 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무례를 저질 렀는지 깨달은 아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스 님?”

대답이 없는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다시 아리아의 눈에 시선을 맞춘 그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큰 봉변을 당하셨다고 들어서요. 결단코 영애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속셈은 전 혀 없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정말 결백합니다.”

달리 의심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 잘못을 들킨 아스가 허둥지둥 변명을 했다. 분명 그 이유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그의 입에서 걱정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 속 어딘가 가 뿌듯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이 아주 이상했으나 그저 신경을 써서 만나러 와 주었다는 사실이 아리아를 기쁘게 했다.

그러니 그에게 순수하게 고맙다고 말을 전하고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 면 끝날 일이건만. 푸르스름한 달빛에 도 그의 귀가 붉어진 것이 여실히 보 여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새벽에 불쑥 찾아오 셨나요?”

혼인도 하지 않은 여성의 방에?

덧붙이며 은근하게 묻자, 아스가 제 입매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작은 장난이었는데 저리도 부끄러워 하니 놀린 자신마저 부끄러워지지 않 는가.

오히려 정말로 미혼의 소녀의 방에, 그것도 새벽에 찾아온 그를 보고 부 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아리아였다.

하지만 아주 우습게도 정작 불쑥 찾 아온 이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아 리아의 작은 타박에 아스가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그…… 낮에는 누가 있을지 몰라 방문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새벽 에 잠깐 들러 괜찮으신지 확인만 하 고 돌아갈 참이었는데……. 지난번에 도 그렇고 오늘도 안색이 좋지 않으 셔서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죠?”

돌아올 대답이 어느 정도 직감했음 에도 아리아가 굳이 그것을 되물었다.

“……영애께서 곤히 자는 얼굴을 보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걱정이 되어서요. 그리고……. 아프신데 죄송 한 말씀이지만, 달빛을 받은 머리카 락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가 없 어 손을 뻗었습니다.”

그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는 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 면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 했었다.

심지어 아름답다니.

충분히 오해할 만한 대답이었다. 한 낱 매춘부의 딸에겐 과한 대답이었다.

그는 자신과 이러한 대화를 나누기 엔 너무나도 고귀한 존재가 아닌가. 고귀한 척을 하는 미엘르와는 달랐다.

감히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범접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대답을 망설이자, 침대 맡에 걸터앉은 아스가 어느새 부끄러운 기 색을 지우고 아리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 이렇게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가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새벽에 찾아와 몰래 얼굴을 보고 가 는 정도가 아닌가.

자신은 지금이 어떻든 출신은 매춘 부의 딸이었다. 친분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괜한 억측과 소문에 휩쓸릴 지도 모르는데, 그는 왜 자신에게 이 런 말을 하는 걸까.

“예전부터 여러 가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영애께 무슨 일이 생 겼는데도 쉽게 만날 수 없었음에요.”

거기까지 들은 아리아가 천천히 몸 을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 는 아리아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과거, 수많은 남성들과 만남을 가져 온 그녀는 아스의 뒷말을 홀로 짐작 하고 자신의 가정이 말도 안 된다며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그러니 언제든 만날 수 있게, 그리 고 그 누구도 영애를 해칠 수 없게 곁 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스가 들려준 말은 아리아 가 생각한 그것이었다.

대답을 들은 아리아의 눈동자가 갈 피를 잡지 못하고 쉼 없이 흔들렸다.

그는 그저 생각만 한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일까.

그 어느 쪽이 되었든 자신은 아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남들은 모르는 채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와 저에게 있어서 최선이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아스 님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리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스는 겨우 내뱉은 말을 이 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쉽게 굴하지 않았다.

“혹시... 영애께선 제가 불편하시

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그런 것은……

그럴 리가.

그녀는 지금껏 그 어떤 남성에게도 틈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의 입맛대로 구워삶았으며, 최대의 무기 인 미모를 이용해 혼이 빠지게 만들 었다.

이는 아리아가 상대방에게 조금의

마음도 가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 이었는데, 유일하게 아스에게는 그것 이 불가능했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그였 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측할 수 없 는 여러 가지 상황과 만남이 쌓이다 보니, 지금까지 그녀가 만났던 여타 남성들과 같은 선상에서 놓고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본심을 내비친 채 만남을 이어 왔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과정이 어떻든 아스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자신 을 걱정해 주거나 우연치 않게 만나 게 되었을 때는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가 아스 님께 도움이 되 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하겠지요. 저 는 아스 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천 한 출신이니까요. 모두가 욕을 할 거 예요.”

그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아리아에 대한 세간의 평판 이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다고는 하나, 매춘부의 딸이라는 오명은 평생 지워 지지 않을 낙인이었다.

하지만 아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는 모양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 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 까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영애 께선 출신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지금의 저는 그런 하찮은 소문에 휘둘릴 만큼 약하지도 않습니 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 눈동자 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오 랜 시간 억압받고 시험을 당해 온 그 에겐 아리아가 걱정하는 일 따위 사 사로운 문제에 불과한 듯 보였다.

“게다가 영애께선 그런 소문을 무용 지물로 만들 만큼 총명하신 분이 아 니십니까. 적어도 제가 보아 온 영애 는 그런 분이셨습니다만.”

쉽게 전할 수 없는 말을 부드럽게

웃으며 이어 가는 그는 그간 아리아 가 이룬 것의 대부분을 모르면서도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했다.

이에 말문이 막힌 아리아를 잠시 응 시하던 그가 다시금 부끄러움을 느꼈 는지 귀를 붉혔다.

“생각만 했을 뿐 이렇게까지 털어놓 을 작정은 아니었는데……. 영애와 마 주하면 늘 이렇게 되는 군요. 답을 바 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갑자기 나타나 놀라운 발언을 한 탓 에 부담을 덜어 주려 한 모양인지, 아스가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덧붙 였다.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아리아는 아무런 반응 을 내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편지로 전할 생각이었 습니다만, 이렇게 기회가 되었으니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내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 가 진지한 얼굴로 아리아를 마주했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아리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 다.

“영애를 시해하려 했던 범인을 잡았 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풀어 놓았 었거든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영 애께 먼저 알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 아 편지를 놓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보이며 말 했다. 아리아가 그 편지를 받아 들자, 아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편지에 그녀를 구금한 장소가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지는 영애께 맡기겠습니다.”

“……절 해치려 했던 시녀예요. 제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무슨 짓을 하시든 이유가 있어서 그리하시는 거겠지요.”

그렇게 말한 아스는 볼일은 이것이 전부라며 아리아의 손등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고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 와도 같이 모습을 감춘 그의 흔적을 한참이나 눈으로 쫓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이유가 있어 서 그렇다…… 라.’

늘 불순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 마음 속 어딘가가 불편했었는데, 그의 그 런 말을 듣자, 마치 갑자기 정당성이 부여된 듯 마음이 편해졌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전부를 모르기 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 르겠지만, 덕분에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애초에 아스는 훗날 공녀와 혼인을 치르게 될 이였기에 그와 특별한 관계 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 었으나, 어쩌면 과거와는 다른 행보를 걸어 이룬 것이 많은 지금은 무작정 피하지만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가 다녀간 뒤, 한숨도 자지 못 한 아리아는 날이 밝자마자 그가 알 려 준 장소로 출발하러 채비를 서둘 렀다. 웃으며 대화를 하러 가는 자리 가 아니었기에, 간소하고 눈에 띄지 않게 준비했다.

시녀 중 누구를 데려갈까 고민했지 만, 달리 좋은 꼴을 보일 것 같진 않 아 그만두고 기사인 존과 외출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 밖에서 대기해 줘.

어디 멀리는 가지 말고.”

존에게 그리 전한 아리아는 카페 주 인을 통해 새로운 마차를 빌려 홀로 베리가 구금된 장소로 향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아스가 알려 준 곳에서 조금 떨어진 상점에 마차를 대기시킨 뒤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허름한 창고였다.

원래부터 감시가 없었던 것인지, 그 도 아니면 아리아가 올 거라 생각해 비워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끼이 익.

낡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짚이 널브러진 창고 구석에 널브러진 베리가 눈에 들어왔다. 기세 좋게 도 망을 친 것치곤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그러게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을까. 뭣도 없는 주제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녀 는, 자신이 독살하려 했던 천하의 악 녀가 등장함에 당장이라도 졸도할 듯 흰자위를 내보였다.

“아, 아, 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자해를 막기 위함인지, 목구멍 깊숙이 천을 밀어 넣은 탓에 베리의 입을 통해 흘 러나오는 것은 추악한 신음뿐이었다.

“오랜만이야, 베리. 한참을 찾았잖니.

그간 어디서 어떻게 지낸 거야?”

그리 물으며 아리아가 천천히 베리 에게 다가갔다. 지척까지 다가간 그 녀가 베리의 머리채를 잡아들었다.

“죽인 줄 알았던 악녀가 살아 돌아 오니 기분이 어떠니?”

아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묻자, 베리 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홀렸다.

입에서는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신음이 쏟아졌다. 곧 닥칠 거라 생각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미친 듯 보 였다.

“그러게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어. 악녀를 처단하려고 생각이라도 했던 거니? 어리석게도……. 애초에 가만히 있던 내게 나쁜 생각을 품고 내 시녀 로 들어온 건 너잖아?”

한참이나 씻지 못한 듯 머리카락을 잡은 손바닥에 기름기가 묻어나와 손 을 털었다. 저 더러운 계집을 흠씬 두드려 패 주리라 생각했건만, 너무 더러워 그럴 생각이 사라졌다.

‘어차피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없애 버리면 그만이니, 굳이 지금 괴롭힐 필요는 없겠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곧 모두 망할 테니까. 그러게 진즉 베리 를 외국으로 빼돌렸어야지, 왜 자신 에게 이런 귀중한 기회를 주는가.

여느 때와 같이 화사한 미소를 띤

아리아가 구석으로 기어들어 가 벌벌 떠는 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나 할게. 네게 나쁘지 않 은 제안일 거야. 일이 모두 끝나면, 널 외국으로 도망치게 만들어 줄게. 물론, 어디 하나 다치는 곳 없이 성 한 몸으로 말이야.”

그리 말하자 벌벌 떨던 베리의 몸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천천히 들어 올 리는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이에 햇살 같은 미소를 담은 아리아 가 다시금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날 죽이는 데 실패한 네가 살 길은 이제 없을 텐데, 내 말에 순 순히 따르는 게 좋지 않겠니?”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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