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 *
“……저, 정말 이걸 저희에게 주신 다고요?”
시녀들이 입술에 색을 더하는 화장 품을 손에 하나씩 들고 물었다.
아리아를 대신하여 애니가 의기양양 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들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곧바로 화장품의 뚜껑 을 열어 향과 색을 확인했다.
“세상에, 이 귀한 걸……
감탄하는 그녀들에게 자애롭게 웃어 보인 아리아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딱히 저치들에게 선물을 하려 구입을 한 물건은 아니었다.
투자자A로써 투자를 했던 사업가 중 누군가가 자신이 만든 화장품이라 며 이것저것 대량으로 보내온 것에 불과했다.
버붐 남작의 언질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내오는 선물들이 하나 같이 여성들이 좋아할 법한 물건들이 었다.
그밖에도 눈매를 또렷하게 그릴 수 있는 화장품이라든가, 향수, 고급스러 운 주머니 등을 일부러 시녀들의 눈 길이 닿는 곳에 전시하듯 늘어놓았다.
한두 개가 아닌 수십 개 단위로 놓 여 있는 그것들은 시녀들의 관심과 욕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아가씨,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요……. 도대체 왜 이런 귀한 것들을 이렇게나 많이 구입하셨나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 시녀가 그리 묻자, 애니가 어리석다는 듯 아리아 대신 대답했다.
“설마 아가씨께서 저것들을 구입하 셨다고 생각하는 거니? 선물을 받으 신 게 당연하잖아. 저렇게 처치가 곤 란할 정도로 말이야.”
“아?…"!”
애니의 말대로 개중에는 정말 호감 을 표한 남성들이 보내온 물건들도 있었지만, 같은 종류를 대량으로 가지 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사업가들에게 서 받은 선물이었다.
애니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도 제 주인을 추어올리고 싶은 모양 인지 괜한 허세를 덧붙였다.
아리아는 그런 애니의 모습을 만족 스러운 미소를 띠며 바라보았다. 그간 그녀에게 투자한 모든 금은보화가 아 깝지 않을 정도로 바람직한 태도였다.
물론, 선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거 짓을 고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에 시녀들이 눈을 반짝이며 여유 롭게 차를 음미하는 아리아를 바라봤 다. 그 눈빛은 단순히 우아하고 명망 높은 귀족에 대한 존경뿐만이 아니었 다.
그녀들보다 훨씬 낮다고도 볼 수 있 는 미천한 출신을 이겨 내고, 아름다 운 외모와 고운 성품으로 제국의 남 성들을 홀린 자에 대한 부러움과 동 경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 아가씨께선 이런 것들을 자 주 챙겨 주시지. 혼자 사용하시기에는 너무 많거든.”
불과 1년 만에 개구쟁이 소녀에서 우아한 여성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한 애니에 대한 시기 또한 존재했다. 미 엘르를 배신하여 아리아에게 붙어 처 음에는 뒷말이 나왔으나, 결국 승자는 그녀였다. 귀족 못지않은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제 그녀는 정말로 귀족으 로 신분 상승하게 될지도 몰랐다. 세 간에 아리아의 도움으로 인해 그녀가 사업에 성공한 버붐 남작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찌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직까지 엠마를 잃은 충격에 정신 을 차리지 못한 미엘르 덕분에 그녀 의 시녀들의 눈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그녀들은 모두 애니처럼 되기를 바 랐고, 아리아처럼 되기를 바랐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미엘 르 아가씨께서 정원을 산책하셨어요. 아주 잠깐이지만요. 그사이에 청소를 할 수 있었죠.”
“맞아요. 산책하실 때 제가 동행했 어요. 여전히 말수는 없으시지만 조금 이나마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았어요. 아마도 그 편지 때문인 것 같아요.”
“ 편지?”
“네. 공녀님께 편지를 받으셨거든요.
‘그 사건’ 이후로 오래간만이었죠. 공 녀님께 편지가 왔다고 전하자마자 곧 장 들어오라 대답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그래서인지 눈치 빠른 시녀들이 알 아서 아리아에게 정보를 풀었다. 애니 가 그렇게 행동하여 부귀영화를 누리 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제 주인인 미엘르를 팔아서 말이다.
“그래? 정말 잘되었구나.”
아리아가 아주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백작의 갖은 노력에 도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산책 을 하다니. 그것도 공녀에게서 받은 편지로.
‘설마 오스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져 있다거나……?’
아니면 방문을 할 예정이라든지.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엠마를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사랑하 는 존재는 오스카밖에 없을 테니까.
‘역시 오스카를 홀리는 것이 제일이 었겠지만.’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노력했으나 끝 이 난 일이고, 어쩐지 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라비인 카인에게까지 잔 뜩 날을 세우던 그의 얼굴이 말이다.
그때 당시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다 시 생각하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 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즐겁기 까지 했다.
그 감정과 시녀들이 고하는 미엘르 에 대한 정보에 환한 미소를 감추지 않은 아리아가 밀고한 그녀들에게 아 주 작은 선물을 전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가여운 미 엘르를 돕고 싶지만……. 불행히도 나 는 귀가 어두워서 말이야.”
“네, 네! 아가씨!”
긍지 높은 주인을 모셔 얻는 만족감 보다는 손에 쥘 수 있는 재물의 힘이 크다는 것을 깨달은 시종들은,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아리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
“잠깐.”
“?…"네?!”
카인이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애니 를 불러 세웠다.
젊은 사업가들에게서 온 편지들을 가지고 아리아의 방으로 향하던 참이 었다 애니가 무언가를 소중히 품에 안고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모습을 이상히 여긴 듯했다.
카인이 애니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잔뜩 들고 가는 거지?”
“네……?!”
그리 놀랄 만한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과한 반응을 표하는 애니에 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피노누아 영식은 아니겠 지.”
피노누아?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애 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피 노누아 루이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 인가.
그는 그저 수많은 사업가 중 일부에 불과하거늘.
애니의 표정에 의아한 감정이 모두 드러난 탓에 그것을 읽은 카인이 조 금 안심하며 다시 물었다.
“그도 아니면 누구지?”
“그게…… 제 개인적인……
그렇다고는 해도 아리아가 대외적으 로 숨기고 있는 일이었기에 또다시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대충 말을 얼 버무리자,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카 인。] ‘혹시’라는 말과 함께 다시 물었 다.
“네가 만나고 있다는 그 젊은 남작 인가?”
그 헛다리에 애니가 냉큼 고개를 끄 덕였다. 어설프게 변명을 하는 것 보 단 그가 오해한 대로 긍정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자 관심이 사라진 것인지 무표 정한 얼굴로 돌아온 카인이 이만 가 보라며 손짓했다.
“네, 네……
“아, 참.”
그런 줄 알았는데, 카인이 다시 애 니를 불러 세웠다. 깜짝 놀란 애니가 펄쩍 뛰며 빳빳이 굳은 고개를 돌리 자, 카인이 다시금 피노누아 영식에 대해 물었다.
“그 피노누아라는 자는 아리아와 얼 마나 자주 만나는 거지?”
“……피노누아 님이요? 그, 글쎄요? 딱히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거기까지 대답하}자 그제야 카인이 애니를 놓아준 덕에 그녀가 서둘러 아리아의 방으로 도망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온 애니의 모습 에 아리아가 그 까닭을 물었다.
“글세, 카인 님께서 이상한 걸 묻지 뭐예요.”
“……뭐라고?”
“피노누아 님이요. 아가씨와 자주 만나는지 물으시더라고요. 그게 왜 궁 금하신 건지……. 제가 가져온 편지가 그것이냐고 물으셨어요.”
그녀의 대답에 아리아가 미간을 찌 푸렸다.
아스와 마주친 그날 이후 이따금 이 상한 눈빛만 보내올 뿐, 달리 추궁을 하지 않기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는 데 아리아가 아닌 시종들에게 묻고 다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아스의 정체를 밝힐 순 없는 노릇이 었다. 비단 그가 황태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무려 귀족 파를 차례 차례 해체시켜 이시스 공녀의 이를 갈게 만들고, 백작의 얼굴을 어둡게 한 그 황태자가 아닌가.
아리아가 고민하며 애니가 가져온 편지를 읽었다. 늘 그랬듯 사업에 대 한 보고와 추천하고 싶은 새로운 사 업가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것들을 꼼꼼하게 읽은 뒤 마지막 편지를 손에 들었다. 피노누아 루이의 이름으로 온 아스의 편지였다.
『곧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이 에 맞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지 여쭙니다.J 뒤에 적힌 내용을 읽은 아리아의 눈 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완공에 맞춰 모습을 드러내 달라니. 정말 지금 밝혀도 되는 걸까.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체를 밝히고……. 미엘르와 그녀 의 뒤에 있는 공녀를 상대할 수 있을 까. 그런 아리아의 머릿속에 문득 아 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곁에 두고 싶다고 했지. 아스를 이 용한다면 분명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 지만.’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오스카처 럼 마음껏 이용하겠다는 다짐이 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리아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리아의 고민은 카인 의 발언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어 버 렸다.
“피노누아 가문이라니, 격이 맞지 않습니다.”
갑작스레 피노누아를 언급하는 탓에, 식사를 하던 백작과 백작 부인이 눈 을 동그랗게 뜨고 까닭을 물었다. 아 리아 역시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설마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저런 말 을 할 줄이야.
“아리아가 만나고 있다는 그 남자 말입니다.”
“아리아가 피노누아 영식을 만난다 고?”
카인에게 쏠렸던 시선이 다시 아리 아에게로 옮겨 갔다. 오랜 요양을 끝 내고 이제야 몸이 나아진 척을 하며 저녁 식사에 참여했더니, 갑자기 이 상황이었다.
그간 열심히 피노누아 자작가에 대 해 뒷조사를 한 모양인지, 카인이 아 리아가 그와 만나서는 안 된다며 몇 가지나 이유를 들어 가며 열변을 토 했다.
“아, 아리아. 정말 피노누아 영식과 만나고 있는 거니? 도대체 어디서 안 면을 텄기에?”
그에 당황한 백작 부인이 말을 더듬 으며 물었다. 백작 역시 과거와는 다 르게 제 가치를 충분히 증명한 그녀 가 굳이 변방의 귀족과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에 잔뜩 구긴 미간으로 아리아를 응시했다.
모두가 다양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 민하던 아리아가, 이내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뱉었다.
“……친구로서 만나고 있을 뿐이에
요.”
“세상에……
백작 부인이 머리를 짚으며 상체를 휘청댔다. 백작 역시 탐탁지 않다는 듯 목을 울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 쳤다.
“흠…….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아리아.”
이에 아리아가 모르는 척 순진한 얼 굴로 대답했다.
“그냥 친구일 뿐이니 걱정하지 마세 요. 그리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 걸요. 저는 아직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흠흠, 아 무튼 아리아에게 적합한 상대를 찾아 볼 때가 된 모양이야.”
백작이 그리 말하자 백작 부인 역시 긍정하며 표정을 푸는데, 갑자기 카인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화를 냈다.
“아리아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 까.”
미엘르는 훨씬 더 어렸을 때부터 제 짝을 붙여 놓았건만. 카인 역시 자신 이 헛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이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 다고 수습하듯 덧붙였다.
‘더러워……
아무리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가족이 된 제 여동생 에게 저런 태도를 취할 수가. 그를 이 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리도 추악 할 만큼 빠져들 줄은 꿈에도 상상하 지 못했다.
‘정말이지…… 피는 못 속인다 하지 만.’
외모에 홀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백작 부인의 자리를 매춘부에게 내어 준 제 아비와 똑같은 자가 아닌 가.
미엘르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감정을 내비친 탓에 백작이 카인을 이상하다 는 듯 응시했다.
눈치 빠른 백작 부인이 아리아와 마 찬가지로 경멸의 감정을 담아 카인을 힐끗댔다. 카인 역시 제멋대로 나가는 감정에 퍽 당황한 듯 말을 아끼며 식 사를 서둘렀다.
‘백작까지 이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겠어.’
이에 아리아가 그간 고민했던 것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행보를 결심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