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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139화 (139/199)

139화

“아스 님?”

시선이 마주치지 않음에 아리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아스를 불렀다. 때를 맞추어 반지에서 빛이 사라졌기에 아 리아의 손에서 시선을 돌린 아스가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연못의 성수를 통해 확인하 니 확신이 들었다. 역시 지난번에 반 지의 색이 변한 것처럼 보였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제 손에 무슨 일이라도……?”

지금까지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가 있었던 것을 눈치챈 아리아가 시 선을 내리며 그리 물었다.

지난번에도 반지의 색을 운운했던 것을 떠올린 모양인지, 색이 돌아온 제 반지를 만지작대자 아스가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아뇨. 나비가 날아든 줄 알고 그랬 습니다. 제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나비요? ……이 겨울밤에요?”

그 답지 않게 자신을 앞에 두고 고 작해야 나비 따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는 변명 탓일까, 아리아가 믿지 않는 다는 눈으로 대답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아스는 미약하지만 불신의 눈으로 긍정하는 아리아를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에 빠졌다. 또 한편으로는 성수를 만져 색이 변한 지금과는 다르게 어 째서 과거에도 반지의 색이 변했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것을 물었다 간 아리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황성의 연못까지 데려온 것을 자백해 야 했다. 사실 그녀에게 말한 것과는 다른 의도로 그녀를 연못까지 데려왔 기 때문에 떳떳하게 이를 물을 수 없 었다.

그녀 스스로 숨기고 있는 것을 먼저 말해 주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후에 확실한 정 황을 포착하여 자연스럽게 묻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아리아가 자신 이외의 사람에 게 가지 않을 터이고, 설령 자신을 떠 난다고 하더라도 놓아줄 생각 또한 없 었기에 물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때문에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을 가슴 깊은 곳에 가뒀다.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시는 게 좋겠 습니다. 감기 드시겠습니다.”

제 외투를 걸친 아리아의 어깨를 감 싸며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렸 다. 어느새 표정을 달리하여 입가에는 늘 아리아에게 보였던 부드러운 미소 를 지은 채였다.

“……그렇네요.”

이에 아리아가 의심 어린 표정을 지 었지만, 이내 이유가 있겠거니 납득한 것인지 자연스레 아스의 옆에 붙었다.

그녀 역시 표정을 숨기는 데 일가견 이 있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일 이라 여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뒤로 한 발짝 내딛자 곧장 시야 가 아리아의 방으로 변했다.

의문을 지우자, 아리아와 헤어지기 싫은 아쉬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에 잠시 시간을 끌 화젯거리를 생 각하며 아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아스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조만간 모든 일이 정리될 겁니다.”

“……아, 그렇군요. 슬슬 때가 되었 거니 생각은 했는데, 벌써……. 그럼 미엘르도 모습을 나타낼까요?”

이에 아리아가 큰 관심을 표하며 되 물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자신들이 승리

하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하루빨리 돌아왔으면 좋 겠네요.”

그리 대답하는 아리아는 아스에 대 한 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즐 거움을 띠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장 난을 꾸미는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엇이 저리도 즐거운 것일까. 미엘 르가 망하는 것? 아니면 백작가가 망 하는 것? 그도 아니면 둘 다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음험한 미소 에 아리아의 잔혹한 성미를 아는 이 라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겠 지만, 아스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자신 의 여인으로만 보였다.

“아쉽지만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영 애의 생일에나 뵐 수 있겠군요.”

“그렇게나 나중에요?”

그리 나중도 아니건만, 퍽 놀라며 되묻는 아리아의 손을 잡은 아스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미소로 물었 다.

“그럼 영애께서 황성에 방문해 주시 겠습니까?”

“그건?…"

바쁜 것은 아리아 역시 마찬가지였 기에 대답을 망설이자, 아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이렇게 시간이 날 때 몰래 방문하겠습니다. 늦은 밤이라 도 괜찮으시다면요. 만약 불가능하다 면 편지라도 보내겠습니다.”

“……알겠어요.”

정말로 밤이 늦은 상태였기에 아쉬 움을 뒤로하고 아스가 아리아의 손등 에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한 뒤,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진 직후, 부드러운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던 아리아가 이내 싸 늘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

아스의 시선을 빼앗은 반지.

황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로, 아스가 능력을 사용하면 색이 변한다 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원래대로 돌아오 기는 했지만, 능력을 사용한 직후 푸 른색으로 빛을 냈던 반지가 떠올랐다.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 흘려듣고 말았는데, 분명 아스는 자신의 반지를 보며 색이 변했었다고 말했었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 또한 이상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훑었던 탓에 기억이 났 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른 탓에 아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스와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모래시계 를 사용하면 반지에서 빛이 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지난번에는 확실히 모래시계를 사용 했지만 오늘은 아니지 않은가. 고작해 야 황성의 연못에서 산책을 한 기억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식 장에 고이 모셔 둔 모래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럴 리 없겠다는 생각이 들 었음에도 확인을 해 보고자 하는 마 음 때문이었다.

잠시 회중시계로 시간을 가늠하던 아리아가, 이내 천천히 모래시계를 뒤 집었다. 그러곤 빠른 속도 떨어지는 모래시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불 안함으로 떨리는 눈을 내려 반지가 끼워진 제 손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믿기지 않게도, 아 스가 능력을 썼던 때와 같이 푸른색 으로 빛을 내는 반지가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왜……. 어째서 반지에서 빛이 나는 거지? 정말로 모래시계를 사용해서? 아스와 마찬가지로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혈통에 관계없이 능력을 사용하면 색 이 변하는 건가? 황족이 아니더라도?

찬란한 푸른빛을 내고 있는 반지를 보고 있자니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래서 지난번에 모래시계 를 사용한 직후에 아스 님이 반지의 색을 언급한 거였나? 정말로 아스 님 께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충격으로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아스가 자신 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니…….

언젠가 말을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아스가 먼저 눈치를 채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먼 저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애

초에 정말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다른 방법으로 빛이 나는 건지도 모 르지 않는가. 게다가 모래시계를 사용 한 탓에 졸음까지 몰려왔다.

‘……다시 한 번, 반지에 대해 물어 봐야겠어.’

혼자 끙끙 앓아 봤자 의문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스가 자신의 비밀을 고백 해 준 것처럼 자신 역시 비밀을 고백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번 제 생일 파티는 규

모를 크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간 자신을 무시하다 못해 없는 사 람 취급을 하던 아리아가 갑자기 말 을 걸어오자, 카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할 말이 있을 땐 시종들을 시 키곤 했던 그녀였는데 무슨 연유인 걸까.

“?…"뭐?”

때문에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그가 다시금 그녀에게 방금 무 어라 했는지 되물었다. 약간 얼빠진 말투로 되물었기에 아리아가 작게 웃 으며 까닭을 덧붙였다.

“제 생일 파티의 규모를 조금 더 크 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제 지인들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지내 시는 오라버니의 지인들까지 참석하 셔야 할 테니까요.”

병사들을 일컫는 그녀의 말에 그제 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카인이 헛기 침을 하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일리가 있구나.”

푼돈에도 허덕이고 있는 처지임이 분명한데도 차마 자신의 부탁을 거절 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우스웠다.

“그럼 집사에게 그리 전해도 될까 요? 오라버니께서 허락을 하셨다고 말이에요.”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시선도 주지 않던 아리아가 로스첸 트 백작가의 가주로 자신을 인정하고 허락을 맡았다는 것에 퍽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비를 계단에서 밀어 백 작 대리를 맡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 했을지도.

그것이 빈털터리의 망해 가는 가문 인지도 무.己고 말이다.

카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백작 가에는 백작 부인이 거의 모든 재산 을 빼돌린 상태라서 생일 파티의 규 모 따위를 키우는 데 낭비할 자금이 전혀 없었다. 아니, 생일 파티 자체를 열 자금이 없었다.

백작가의 재정이 위험한 상태인지 모 르는 백작이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녹인 백작 부인이 백작을 위한다는 이 름하에 재산을 펑펑 쓰는 것을 허락했 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락만 받고 그 누구에게도 보고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즉, 있 는 재산을 사용했으나 그것을 사용했 다고 명시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기록이 없어 멍청하게도 아 직도 백작가에 재산이 많이 남은 줄 아는 거겠지.’

이 모든 것은 카인이 백작의 사업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백 작에게 알리지 않았고 조언 또한 구 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게다가 멀쩡한 상태의 백작이었다면

미리 상황을 파악했을지도 모르겠지 만, 지금의 백작은 불안정한 상태인데 다가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 로스첸트 백 작가를 좀먹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 볍게 톡, 치면 곧장 쓰러질 만큼 대단 히 안 좋은 상황이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흠흠, 뭐 별것도 아닌데.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니 제국에서 가장 화려 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사한 웃음 으로 카인을 홀린 아리아가 곧장 집 사에게 파티의 규모를 키울 것을 지 시했다.

“예?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말입니까?”

“응. 내가 초대한 손님들 말고도 저 택에 계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집사는 퍽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 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총명한 아리 아의 지시였던 탓에 이내 걱정을 지 우고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서 실망시켜 드리지 않 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그 믿음직스러운 대답 처럼 최선을 다해 파티 준비에 전념 했다. 겨울이라 최소한으로 꾸몄던 정 원까지 모두 활용해 저택을 한껏 장 식 했다.

그사이 방문을 하진 않을까 조금이 나마 기대했던 아스는 나타나지 않았 고, 소소하게 자신의 안부를 알리는 편지만 보냈다.

‘역시 내 능력을 알고 있는 게 틀림 없어.’

이후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 더 모래시계를 되돌려 시험해 보았는 데, 역시나 반지는 푸른빛을 냈다. 혈 통에 관계없이 능력을 사용하면 빛을 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스가 보내온 편지에는 반 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기에 확신 을 할 수 없어 불안함만 더욱 커지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지나 아리아의 생일이 다가왔다.

“아가씨,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 세요? 오늘 생일이신데……!”

때문에 걱정스러운 얼굴의 애니가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물었다.

금가루를 뿌려서인지 빗을 통과하는 머리카락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것과는 상반되는 불안한 얼굴에 장신 구를 가져온 제시 또한 그녀의 기분 을살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괜찮아.”

아스가 도착하면 반지에 대해 물을 생각이라서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애 써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가다듬 었다. 그러자 그제야 안심한 시녀들이 바삐 손을 놀려 아리아를 한껏 치장 했다.

오늘을 위해 백작가의 이름으로 거 액을 지불하여 맞춘 드레스까지 갖춰 입자, 이 세상에는 감히 비교조차 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마치 천사 같으세요! 그…… 천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매혹 적이지만요!”

실제로는 천사가 아닌 자신에게 수모 를 주었던 이들을 처단하러 되돌아온 악마일 테지만, 애니의 표현이 퍽 적 절했기에 제시를 포함한 시녀 여럿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혹시 그간 비밀을 숨기고 있 다고 하더라도 용서해 줄 만큼 예쁘 니?”

“비, 비밀이요……? 그럼요!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이 그 누구든 보자마 자 혼이 쏙 나갈 거예요!”

“그래?”

뜬금없이 비밀과 용서를 언급하여 당황한 애니였으나, 이내 아스와 사소 한 다툼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겨짚 고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긍정했고, 그제야 마음을 놓은 아리아가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그럼요! 굳이 꾸미지 않으셔도 황

태자님의 마음을 녹이시기 충분하신 걸요! 손님들께서 도착하신 모양이니 어서 내려가시는 게 좋겠어요!”

“알았어.”

아직 이른 오전이건만, 벌써부터 하 나둘 모여드는 손님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한 정원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조 금이나마 가벼웠다.

분명 아스라면 사정이 있어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는 마음이 담겨 있는 발걸음이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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