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어째서, 네가 어째서 여기에!
그리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로한 이 자신을 바닥에 패대기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악!”
그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다 칭해
졌던 이시스의 볼품없는 모습에 주변 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이 놀라 숨을 삼켰다.
황태자를 비롯한 귀족들과 황실의 기사들이 광장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멈췄는데, 설마 이런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동이 트고 시간이 조금 지난 터라 꽤나 많은 숫자의 구경꾼들이 이를 목 격했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이시스 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로한이 손을 털며 말했다.
“분부하신 대로 죄인을 데려왔어, 아스테로페 전하.”
이제야 겨우 귀찮은 일을 털어 냈다
는 둣 후련한 얼굴이었다.
놀란 아리아가 서둘러 이시스에게 달려와 그녀의 안부를 확인했다.
“괜찮으세요? 어쩜 이리도 난폭하실 까?…!”
말투는 참으로 걱정에 차 있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야 이시스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환희에 차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가까이 있던 이시스만 알아챈 표정으로, 다른 누구에게도 보 이지 않은 얼굴이었다.
“천박한 것이 어딜……!”
때문에 이시스가 다가온 아리아를 밀 쳤으나, 지척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 이 곧장 그녀의 팔을 잡고 목을 짓눌 러 포박했다. 죄를 지었음에도 걱정을 하며 안부를 살핀 아리아를 밀친 탓에 손길에 분노가 가득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를 받는 아리아의 얼굴에는 어느새 불안함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이에 이시스가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 자, 로한이 어이가 없다는 둣 말했다.
“너무하는군, 영애. 그녀가 꾸민 짓 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인데 말이 야. 보라고, 잘해 줘 봤자 이렇게 되 먹지 못한 성미가 나오잖아.”
그 말투에서 그간 그가 얼마나 참고 인내하며 이시스의 비위를 맞춰 왔는 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진짜 천박한 게 누군지도 모르고 누가 누구더러 천박하대? 제국의 귀 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기에 조금은 기대했는데, 아주 실망이야. 이시스 공녀.”
그러더니 갑자기 아리아의 편을 들 었다. 자랑할 만한 출신이 아닌 것은 사실이었기에, 설마 로한이 제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인지 아리아가 눈을 끔뻑이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답답하군. 백작 부인께선 아직도 말을 안 하신 건가? 영애께서 빨리 사실을 아시고 크로아로 오셔야 할 텐데 말이야. 아리아 영애께서 계실 곳은, 여기 제국이 아니라 바로 크로 아니까.”
“……어머니요?”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하는 로한에게 아리아가 되묻자, 대답은 하지 않고 웃는 그의 미소가 퍽 의미심장했다.
무슨 소리인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듯 아리아가 눈을 굴렸고, 아스가 그 만하라는 듯 중재에 나섰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거든 이만 돌 아가.”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 이거‘야? 아 직 내가 할 일이 남았는데?”
억울하다는 듯 대답한 로한이 마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서 바들바들 떨며 숨어 있던 미엘르가 기사들의 손 에 의해 끌려 나왔다.
다행히 이시스처럼 머리채를 잡힌다 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일은 없 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겁을 먹고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로, 로한 님……! 어째서, 이게 어 떻게 되, 된……!”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미엘르가 감히 제대로 말을 잇지 못 했다. 늘 모두에게 사랑을 받으며 곱 게 자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처사였다.
중간에 감옥에 갇히기는 했으나, 그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귀족 영애 로써의 대우는 받은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거리의 부 랑자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싸늘 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어디 감히 내 이름을 불러? 주제도 모르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너 같 은 족속이야.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가 족에 나라까지 팔아먹는 족속 말이야.”
냉랭한 로한의 말투와 눈빛에 미엘 르가 식겁하며 몸을 사렸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어 그에게 퍽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간 참으로 지식도 많고 총명하다 칭찬을 일삼은 그였거늘, 따스하고 사 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았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그에 위로받고 인정받아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었다. 자신에게 걸맞은 상 대라고 생각하여 오스카에게 집착했 던 것과는 달랐다. 비록 정보를 팔아 얻은 신뢰였지만,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 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모두 가짜라고……?
지금의 차가운 얼굴과 과거의 따뜻 했던 모습이 겹쳐 보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덫을 놓았다는 사실 보 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했던 말과 행 동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더욱 더 믿기지 않았다.
“로한 님……!”
그래서 미엘르가 다시금 로한의 이 름을 불렀으나, 돌아온 것은 여전히 싸늘한 시선이었다. 아니, 그에 더해 자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미엘르가 불쾌하다는 시선과 경고까지 따라붙 었다.
“이 이상 내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간, 가만두지 않겠어.”
“흐윽?
결국 남은 것은 미엘르의 울음뿐이었 고, 그때까지 대화를 엿들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하려 머리를 굴리던 이 시스가 로한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서 류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저와 주고받으신 서류가 있지 않으십니까……!”
국왕의 인장이 찍힌 서류였다. 아무 리 이것이 덫이라고는 하나, 인장까지 찍은 서류가 있는 한, 로한 역시 이번 일의 공모자로 엮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자신의 편을 들고 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라고 주장하는 데, 그 뜬금없는 소리에 로한이 비웃 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게 진짜 인장이라고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분명 크로아 왕국에서 가져온 공식 문서에도 같은 문장이 찍혀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수 비교까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일치했었는데……! 분명 비 카 영식과 확인을……!”
“그래? 그럼 같이 확인한 자에게 물 어보면 되겠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기 에 로한이 자신의 뒤편을 손짓했다.
그러자 믿기지 않게도, 아주 오랫동 안 귀족파를 도운 데다가 이번 일까지 손수 제안한 비카가 천천히 걸어 나왔 다.
“저만 너무 믿으시니 이런 꼴을 당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금 더 사람을 넓게 두셨어야죠.”
비카가 퍽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말 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가져다드린 서류 들은 모두 가짜 인장으로 찍은 서류 입니다.”
“……뭐, 뭐라고요……?”
가장 신뢰했던 자가 배신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 어떤 반응을 취할 수 있을까. 그저 믿기지 않는다 는 듯 멍하니 비카를 쳐다볼 뿐이었 다.
그는 귀족파의 귀족들에게 아주 오 랫동안 두루두루 도움을 주고 조언을 준 존재였기에 감히 배신을 할 거라 곤 상상하지 못한 탓이다.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미엘르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그렇게 잠시 광장에 미엘르의 울음 이 퍼지는데, 그사이 멍청하게 얼이 빠져 있던 이시스가 이내 다시 답을 찾았다는 듯 되물었다.
“설령 인장이 가짜라고 해도, 로한 님께서 직접 찍으시고 되돌려 보낸 것이니 같은 효력이 있지요!”
그것이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그가 직 접 작성하고 무엇이 되었든 인장을 찍 어 보낸 것이니 같은 효력이 있었다.
하지만.
“하,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어? 고작 해야 타국의 반역자들을 낚기 위한 사소한 일인데,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어. 안 그래, 비카?”
“그렇지요. 굳이 사람과 시간을 소비 해 크로아로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제 가 답장을 하면 그만인 일이니까요.”
완벽하게 짜인 각본이었다는 사실에 눈물마저 그친 미엘르가 새파랗게 질 렸다.
이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가 짠 판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마 지막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렸 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아 숨조차 멈춘 채 굳어 있었다.
“왜 스스로의 죄를 뉘우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이런 사소한 것에 집착 하는지 모르겠네요. 설령 정말 로한 님께서 보내신 편지라 할지라도, 애초 에 반역자를 색출하기 위한 과정인데 무슨 상관이 있죠? 아스 님께서 지시 하신 사항이 아닌가요?”
그사이에서 그녀들이 망해 가는 것 을 지켜보던 아리아가 이상하다는 둣 물어, 아스가 참으로 영민하다고 칭찬 을 하며 대답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책임을 묻지 않고 용서하면 그만인데 무슨 상관인 지 모르겠습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건지, 타고난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참으로 실망스러워, 아스테로페. 이 런 하찮은 일로 나까지 이용하다니. 나는 또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흔쾌히 이 바쁜 시간을 쪼개 너 를 도왔는데 말이야.”
“얻어 간 것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생색내지 마.”
“뭐, 그래. 해 준 일에 비해서 얻은 것이 많긴 하지. 나 말고 다른 사람까 지도 말이야.”
그리 대답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은 로 한이 고개를 돌려 아리아를 쳐다보았 다. 이에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아리 아가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댔고, 아스가 로한을 쏘아보며 짜 증을 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 미엘르 영애에 관한 것은 서면으로 남기고, 부족한 것은 사람을 보낼 테니까.”
“……좋아, 그러도록 하지. 다른 죄 인들을 태운 마차가 들어오고 있는 것 같으니 이만 해산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로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끄러 운 소리를 내는 마차가 광장에 도착 했다.
죄인을 태우는 철 마차였다. 도망칠 수 없게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마차는, 벽면이 철창으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죄인이 하도 많아서 늦어진 모양이 군.”
구경꾼들이 마차 안의 귀족들을 확인 하고 놀라 저마다 수군대기 시작했다.
철 마차 안에는 제국에서 내로라하 는 명망 높은 귀족들이 죄인의 형상 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타고 있던 카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리아를 발견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듯 소 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리아! 네가 왜 거기 있는 거야! 어째서!”
마치 제 것을 빼앗기기라도 했다는 듯한 외침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작게 중얼거린 아스가 신경질을 냈다.
“참으로 이상한 의문이군. 영애께서 연인인 내 옆에 있는 것이 마땅한데, 왜 저 자가 난리를 피우는 거지? 시 끄러우니 입을 닫게 만들어.”
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사가 카인의 입에 재갈을 물렸 고, 그럼에도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쳐 결국 얼굴을 몇 대 맞은 뒤 정신 을 잃었다.
“오라버니!”
카인이 함부로 대해지는 것을 처음
목격한 미엘르가 울부짖었고, 아까부터 자신을 노려보는 공작의 모습에 이시 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 고개를 돌리실 것 없어, 영애. 영애께서도 저 안에 타야 하니까 말 이야. 그대가 로한에게 친히 바친 청 구서가 증거로 채택됐지. 아주 고맙게 도 깔끔하게 정리까지 되어 있더군.”
그렇게 말한 아스가 기사들에게 손 짓하자,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미엘 르와 이시스를 일으켜 세웠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는데 곧장 등을 떠밀 어 미엘르가 볼품없이 바닥으로 고꾸 라졌다.
“꺄악!”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가여운 미엘 르를 위해 모인 이들이 모두 손을 내 밀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그녀를 위 해 손을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아리아 였다.
“미엘르, 괜찮니?”
조롱을 하러 왔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랫입술을 꽉 깨문 미엘르가 있는 힘껏 적의를 내비치며 아리아를 쏘아 보았다.
그녀에게서 받는 동정은 수치와 모욕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영애께선 너무 마음이 여리신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영애를 모함한 자에게 이리도 다정히 대하시다니요.”
이를 불만스럽게 여긴 아스가 그렇 게 말하며 아리아에게 어서 돌아오라 는 손짓을 했으나, 돌아간 것은 아리 아가 아닌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스 님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이요?”
“네. 미엘르에 관한 일이에요 부디 어 려우시 겠지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기에 저리도 간곡히 부탁 을 하는 것일까. 가만히 있어도 처형 을 면치 못할 텐데, 어째서 굳이 부탁 을 하는 것인지.
아스뿐만 아니라 미엘르와 로한, 그리 고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까지 의문을 가지며 아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려운 부탁일지 모르겠지만, …… 부디 미엘르에게 선처를 해 주셨으면 해요.”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