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010 - [루미나 side1] 가지 못한 날
아침.
숙소에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적이 언제인지 이제 기억에 없다.
매번 이 시간이 되어 눈을 뜨면 군단장이라는 직책이 내 어깨를 억누른다.
역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 뿐.
***
나에게 있어서 세상은 날 때부터 부서져있던 것이다.
과거를 잊은 이들에게 미래는 없다고들 하지만, 현재가 없는 이들에겐 과거도 미래도 의미가 없다.
당장 현재를 잃은 세대에게 길러진, 현재를 가져본 적이 없는 세대가 꿈도 희망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런 굴곡 없이, 열정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재능이라는 것이 주어진 일은, 그나마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통탄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비전도 희망도 없이 그저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군대에 지원했고, 난 의외로 군대에 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기교육을 포함해 10년이 넘는 군 생활은 안 그래도 수동적이던 나를 더욱 수동적으로 만들어줬다.
예를 들어윗사람들의 권력다툼의 장기 말로 쓰이거나, 손대기 까다로운 일이나 감당이 힘든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만능해결도구로 쓰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결국 그런 일의 일환으로써, 그리고 슬슬 너무 존재감이 커져버린 사냥개를 버리는 용도로써, 이곳 북서지부에 보내졌고, 나의 삶에는 굴곡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생겼다.
처음 발령이 내려진 순간 든 생각은 멀리 떠나야한다는 사실에 귀찮음.
알기 싫어도 알게 된 노인네들의 두려움과 불안함.
여기서 반발하고 들고 일어나면 뒤집을 수 있을까? 에 대한 호기심.
그러나 얌전히 유배를 가는 것이 가장 덜 귀찮게 여겨졌기에 얌전히 유배를 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또 유배를 당하고 싶지는 않다. 이번에는 참아주지만 귀찮은 일은 더 하고 싶지 않다. 난 너희가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반발 심리를 담아 혈혈단신 맨몸으로 도로도 이용하지 않고 사막을 뚫고 이곳에 걸어왔다.
효과가 날지 어떨지는 먼 훗날 알게 되리라 생각하며.
도착한 후에는 그냥 지루한 삶이었다. 약 세 달 정도? 군단장이 자리를 비워 부 군단장이 대신 지휘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만 살짝 품고 언제나와 같이 휩쓸리는 삶을 살던 중 그녀를 만났다.
첫인상은 군대에, 그것도 군단장이라는 직책에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순둥이였다.
검은 장발은 오랜 외부활동으로 상해있었고, 온 몸은 꼬질꼬질했다.
가늘고 눈꼬리가 살짝 쳐진 눈매는 온화해 보였으며,
검은 색 눈동자는 꾀죄죄하고 피로에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도 그 맑음을 잃지 않은 채 빛을 발하고있었다.
처음엔 그 좌측에 있는 사람이 군단장이라 생각했다.
굳은 피처럼 검붉은 빛의 단발. 기다랗게 쭉 째진 눈매.
눈가에 그리고 입가에 새겨진 크고 작은 자상.
비뚤어지도록 입에 문 담배.
마찬가지로 군단장이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외형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온화하고 상냥해 보이는 순둥이보다는 표독한 양아치가 군대라는 조직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이었을까?
무엇보다 뭐가 좋은 것인지. 담배연기도 신경 쓰지 않고 옆 사람한테 들러붙어서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거는 모습이 군단장이라는 자리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첫인상과는 어찌되었던 그녀는 조온나 쌨다. 솔직히 순하게 생겨서 군단장이라는 직위는 딱지 치기로 따낸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었고.
어차피 이후의 현지생활에서 귀찮은 송사에 휘말리는 것을 막으려면 어느정도 무력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적당히 아랫놈들 꺾으면서 기선제압을 시도했는데.
다짜고짜 대빵이 튀어나오더니 존나게 두들겨 맞았다. 살면서 맞은 것도 드문 일인데, 시발 졌어? 그것도 압도적으로? 가차 없이? 내 인생에 첫 굴곡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하강곡선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극단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 하나 생겼고, 그 양반이 날 끌고 다니면 난 끌려 다녀야 했다는 사실이 날 더 귀찮게 만들었을 뿐.
하지만 수적석천이라 하던가?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만사 행복한냥 살아가는 그 모습에 조금씩 감화되어 나름 그래도 인생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살았고.
일 년이, 이 년이, 오 년이 지나 나는 목석보다는 그래도 인간에 가까운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천성은 어디에 가지 않더라. 세상은 여전히 귀찮았다.
***
균열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에 불현 듯이 일어난다.
아니 사실은 예상할 수 있고 충분히 전조도 보여주지만 애써 무시하고 넘길 때 그 대가로서 찾아온다.
내가 목석에서 사람으로 바뀔 때 역시 그러했고, 더는 목석으로 돌아가지 못해, 닳고 부서진 고목으로 변하던 날도 그랬다.
처음엔 사소한 불화였다. 아, 딱히 나와의 불화는 아니다. 오히려 늘 있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외벽과 내벽, 감염자와 비감염자, 기득권과 비기득권 그냥 늘 있는 그런 것.
그렇다고 그녀가 딱히 이상론자라는 것은 아니다. 이상에 젖어있지만 현실과 구분할 수 있었다.
말 뿐인 이들과 다르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정도는 할 줄 알았다.
매우 간단한 것들이지만 남들은 못하거나 안하는 것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했다.
빈민들이 괴수들로 인해 농사를 망치면 단신으로라도 나서서 괴수의 씨를 말려주었고, 해충으로 고통 받으면 그 종의 근간을 없애버릴 기세로 힘을 썼다.
그리고 권력도 있었다.
그런 그녀를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가 앞에 서면 다리미로 다린 듯이 펴질 정도의 지위가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강경파의 수장이 맡아오던 섬멸대장이라는 자리도, 군단장의 행보를 방해라도 할 수 있는 부 군단장의 자리도, 처음 그녀의 옆에서 담배를 피며 등장했던 측근과 끌려 다니며 그녀에게 감화된 나로 메꿔졌으니, 그녀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은 영악하다. 사악하고, 간교하며, 졸렬하고, 치졸하고, 잔혹하며 아무튼 나쁘다.
그녀는 기득권층의 변화를 위해서는 기득권층이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고, 실천했으나 인간의 악의는 끝이 없었고, 옆에 있던 이는 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죄를 징벌하기를 선택했다.
***
유독 맑은 날이었다. 그토록 맑았기에 그날 저녁은 더욱 흐린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전조와 증상이 있었겠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게을렀고, 끌려 다니는 방법만 알았지 결국은 의지박약이었으며, 남에게 모든 것을 맡겼기에 끝끝내 우유부단했다.
그리고 내 기억속의 그날은 흐린 날이 되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평범한 안개가 아니었고, 난 이 안개를 잘 알고 있다.
안개는 형형색색으로 시야를 어지럽혔으며, 그 원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었다.
사람이 죽었다. 그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안개가 되었다.
건물이 무너졌다. 잔해는 온대간대 없이 흩어져 안개가 되었다.
정제소가 파괴됐다. 폭발조차 없이 바스러져 안개가 되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 모든 것이 안개가 되었으며, 그녀가 원치 않는 모든 것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방울의 무고한 피도 흐르지 않고, 단 한 구의 선량한 시신도 없이, 북서지부는 말 그대로 갈리고 흩뿌려져 안개가 되었다.
그 끝에 그녀가, 그녀들이 서있었다.
“잠꾸러기 일어났네?”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하루를 안 거르고 늦잠을 자냐.”
그녀도 말했다.
“이렇게 돼버려서 미안해. 책임지고 사람 만들어보려 했는데, 시간이 모자랐네.”
그녀는 울상을 지었고.
“미안하다. 못 참겠더라고, 더는.”
그녀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 같아. 범죄자조차도 처단한 적 없었는데.”
그녀는 북서지부장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고.
“마지막이면 좋겠네.”
그녀도 북서지부장의 시신을 흩으며 말했다.
“잠꾸러기도… 같이 갈래?”
그녀는 언제나처럼 맑은 눈빛으로 말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으며, 어떤 대가도 감내하겠다는 듯이 당당한 눈빛이었다.
“…”
그녀도 언제나처럼 텅 빈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기대도 원망도 없는 그저 무덤덤한 눈빛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난 정하지 못했었고, 여전히 정하지 못했다.
가고 싶었다. 간다면 다시 어제와 같은하루가 시작될 것 같았다. 늦잠을 자고, 그녀가 와서 날 깨우고, 그녀도 와서 나에게 핀잔을 준다.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대련을 지고 언제나처럼 그녀에게도 대련을 진다.
세상에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가 건드리지 조차도 못하는 사람이 둘이나 생겼다.
언제나 굴곡 없이 살아갈 줄 알았지만 웃는 날이 늘었고, 이를 악무는 법도 배웠다.
삶에 목표라고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제발 명치 한번만 두들겨 보고 싶다는 소소한 목표도 생겼다.
그런 날이 계속 될 것 같았다.
동시에 더는 그런 날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슷한 날은있을 수도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삶이 계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했다.가만히 있으면 옛날로 돌아갈뿐이니까. 잃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발바닥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마음은 방황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게을렀고,
마지막까지 의지박약했으며,
마지막까지 우유부단했다.
그날의 하늘은 유독 흐렸던 것 같다.
***
저녁.
하늘이 맑다고 느낀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번 이 시간이 되어 일과를 마무리할 때가 되면 군단장이라는 직위가 내 삶을 억누른다.
정말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직위라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녀와 나 스스로를 비교하며 눈을 감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