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016 - 물이 맑으면 미꾸라지는 잡혀
거북이?
등껍질이 없으니 좀 아닌 것 같다.
악어?
파충류는 맞는 것같은데 악어라고 하기는 입이좀 안 맞는다.
도마뱀?
그래 차라리 도마뱀이라고 하자.
그건 도마뱀이었다.
보통 등에 숲이 올라가 있고, 거기에 연못도 있고, 아무튼 거대한 무언가면 보통 거북이 일진데.
거대한 도마뱀이 나왔다.
등에 난 숲은 일종의 기생 식물들이다.
무슨 종인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세계 그 자체를 밝히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공간도 부족하니까.
연못은 사실 땀샘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땀을 마셨다고 하니 좀 느낌이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의 물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니까.
우리가 마시는 정제수도 돌고 돌다보면 결국 누군가의 땀이었을 수도 있다.
그 거대한 몸체의 좌우로 8개의 다리.
다리는 곧지 않고 아래가 아닌 옆으로 나서 굽어진 형식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굵고 짧아 몸체 또한 지면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마뱀 그 자체같긴 하다.
다만, 꼬리는 없다. 없는 것인지 짧은 것인지 확실한건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입은 없다, 주둥이로 추정되는 돌출부는 존재하지만, 그 끝에 균열은 없다.
눈과 코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도마뱀은 귀 대신 구멍이 있고 그 안에 고막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있다고 하던가?
작아서 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청각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관 역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청각도 시각도 없는 것처럼 행동을 한다. 다만 후각은 확실히 있을진데 어떻게 냄새를 맡는지는 알 방도가 없다.
영양의 섭취 또한 미지수다.
분명 무언가를 먹는 것 같긴 한데.
새끼 역병여우 따위는 단 몇 초, 눈을 돌린 그 몇 초 만에 꿀꺽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은 미지수다.
웬 나무줄기인지 촉수인지 모를 것이 땅에서 솟더니 그대로 끌려 들어가고 바로 죽었거든.
사실 기생수로 추정되는 저 등의 나무들이 먹은 것 일수도 있고.
근데여우 먹일 때는 일부로 눈 감고 넝쿨인지 줄기인지 모를것이 움직이는 감각에 집중해도 안 느껴지고 여우만 사라지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사이즈에 따라 방법이 다른가?
아무튼 진상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작중 중반에 해당하는 시간대가 되면 북서지부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단순히 생각하면 식량이 없어서 일 것이고, 다른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유저가 역병여우를 가져다가 받치지 않으면 무언가가 저 숲에 들어가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아마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해.
정체에 대한 논의는 이즈음하고 이제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 장래에 대한 토의를 해보자.
우선 목적지는 남서거리.
뒤에서는 도마뱀 녀석이 도마뱀 발에 땀나게 쫓아오는 중이다.
아마 냄새는 잔득 맡았는데 이능을 감지하지 못 해서 참았던지,
아니면 근처에 있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했던지,
여하튼 냄새로 유혹만 해놓고 사라졌다가 돌아왔으니 바로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달려드는 것 같다.
가장 난이도 높은 작업인,
깨우고 촉수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줄기들을 뿌리치며,
영역 밖으로 벗어나 녀석을 일으켜 세우는 작업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녀석이 저렇게 다가가자마자 일어나줬으니까.
그리고 그래서 방심했다.
평소의 녀석은 내가 다가가서 유혹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근처에 온 것만으로도 신나서 일어날 정도로 의욕에 가득 차있다.
저 도마뱀에 대해서 연구하겠다고 내다버린 회차가 몇 개인지 까마득하다.
그 긴 시간동안 녀석이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먹는것들의 공통점을 찾고,
먹지 않는 것들의 공통점 또한 찾았다.
그 기나긴 과정에서 얻은 결과를 실험하는 것은 항상 내 몸이었고.
결과를 입증하는 것은 높은 확률로 내 죽음이었다.
그 긴 실험의 기간 동안 이렇게 먼 거리에서 냅다 일어나서 뛰는 저 녀석을 난 본적이 없다.
아니 뛰는 것도 처음 본다.
? 어라? 나 조금 좆 됐을지도?
일단 등을 돌리고 뛴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일어났기에당장은 안전거리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내 키는 170을 간신히 넘고, 저 녀석의 풍채는 20을 아득히 넘는다.
당연하지만 cm와 m의 차이도 있고.
원본이 다리를 가진 생물이 아닌지, 아니면 모래 속에 너무 오래 묻혀있었는지 다행히 뛰는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린 것이 위안이긴 한데,
그럼에도 저 몸집이어서야 한 걸음, 한 걸음의 보폭이 충분히 크고 위협적이다.
그리고 저 촉수 저렇게까지 길어지는 거였나? 생각보다 10배는 더 길어지는데?
외벽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될까? 까마득히 멀지는 않다.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거리 또한 아니다.
그럼 열심히 발버둥을 쳐야겠지?
***
촉수 아니, 줄기라고 하자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줄기의 속도는 빠르지 않다.
하지만 많고, 그 밀도가 촘촘하며, 영향력이 넓다.
전형적인 날카로운 노림수는 없지만 서서히 조여서 확실하게 끝내는 계열의 적.
줄기가 아무리 빠르지 않더라도, 녀석의 보폭은 나의 몇 십 배는 넘을 것이고,
결국 적의 사정권 안에서 사방에서 조여 오는 줄기를 피하며 정면돌파를 한번 이상 감행해야한다.
가능하면 한번으로 만들어야하고, 그를 위해서 거리가 좁혀지는 타이밍을 가능한 한 뒤로 밀어야 하는데…
그런 변수가 내게는 없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탁 트인 광야.
넓은 사막.
흔한 사구 하나 없다.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녀석의 진로를 방해할 수는 없겠지만, 조여 오는 줄기를 막을 요소조차도 없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왼쪽에서부터 뻗어져 나오는 나무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생각보다는 빠르다.
아니 빨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력말고 민첩에 좀 더 찍어두는 편이 좋았을 걸.
굴러서 피하면 뒤가 없다. 한 줄기라고는 해도 눈앞에 보인다면 곧 나머지 줄기들도 오겠지.
우선은 속도를 올린다.
지구력은 달리고 있다고 딱히 회복이 멈추지는 않지만, 소모 중인 양이 크면 클수록 회복되는 양이 낮아지기에 페이스 조절을 잘못하면 도착 전에 고꾸라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장 잡히는것 보다는 멀리서 잡혀야지?
템포를 올리자 더는 쫓아오지 못하는 줄기의 모습을 보니 아마 시동이 늦게 걸렸거나 일부로 속도를 조절한 것 같다.
그간의 경험으로 판단해서 그런 잔머리를 굴릴 것 같지는 않고 너무 오래 쳐 박혀있어서 몸이 굳었던 것이라고 믿어본다.
만약 그런 두뇌가 있는 거라면 당장 좆 박았으니 회차 포기를 누르는 것이 빠르다.
“시발 뭐라도 있으면 어떻게 줄기 꼬아가면서 도망이라도 칠건데 오늘따라 특히나 더 속이 뻥 뚫리네?”
-온다온다온다온다 촉수온다!
-한번만 잡혀줘
-솔직히 이제 죽어도 되는데 지금 촉수에 묶여서 ㅗㅜㅑ당하고 죽는게 감 되찾는 길이다 ㅇㅈ?
“뭔 감은 시발! 아가리 쌉쳐!”
이번에도 왼쪽에서 촉 아니 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줄기의 속도는 더 빨라진 것 같지 않으니, 보폭의 차이가 이뤄낸 결과물이겠지.
오른쪽? 아 이거 우대각으로 뛰면 거리 멀어지는데.
속도도 괜히 더 올렸다가는 페이스가 망가질 수도 있다. 지금도 간당간당해.
이능력에는 능력군이라는 게 존재한다.
순환 같은 내부에 작용하는 능력군.
강화 같은 신체에 작용하는 능력군.
방출 같은 외부로 분출하는 능력군.
고정 같은 신체에 작용한다고 보기도 외부로 분출한다고 보기도 애매한 병신군. 아니 능력군.
그리고 좀 특이한 친구들.
그중 하필이면개 병신 능력군의 개 병신 능력이 뽑힌게 오늘따라 꼽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찾아서 능력을 극대화 시킬 방법을 찾아서 전략을 짜고 실행하면 되는데.
이번은 좀 성급하기도 했다.
그래도 시바 OO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중에서 당장 제일 도움이 안되는 능력을 꼽으라면 탑3안에 드는 능력이 고정이 아닐까?
대체 어디에 쓰라고 칼 잡고 뛰어서 이길 사이즈도 아니고,
모래를 잡고 버티는 것도 무의미하다. 바닥이 철판이면 모를까.
그렇다고 촉수를…잡…?
아니야 조금만 더 달려보자. 너무 큰 도박수다.
이러는 와중에도 보라. 슬슬 절반정도를 왔다.
좆 됐네.
주사위를 던질 시간이 온 것 같다.
거리는 절반, 지구력은 약 40%정도 왼쪽에서 꾸준히 내 시야를 괴롭히는 나무줄기는 어느덧 그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도 하다못해 30%까지는 줄이고 싶은데…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야 한다.
내 노름판에 녹색 게이지는 필요 없다.
-페이스 ㅈ까고 달려도 됨?
-아 어차피 잡힐거면 당당하게 역주행이라도 하라고ㅋㅋ
-다음회차 예약해도 되냐? 그 사복검 쓰는 얘 담서라고? 걔나 보여줘 나도 보고 따라하게
-제발 복사벌레 좀 쳐내!!!
쉬불 그 비웃음 환호로 뒤바꿔주지.
40% 확실히 페이스를 씹고 달리니까 거리가 줄어드는 속도 또한 다르다.
계속 눈가를 아른거리던 줄기도 시야 밖으로 사라졌고.
뒤…돌아볼까? 안전하게 페이스 조절 한 번 하고 다시 뛸까?
아니 상남자 불붕이 절대 뒤돌아 보지 않는다.
-상남자 특 도망칠때도 뒤돌아보지 않음
-상남자 특 십게이임
-남자 어디갔냐 ㅋㅋㅋ
거리도확인 안하고 페이스를 조절하자니 심장이 쫄깃하…시발 왜 벌써 줄기가 저 정도로 다가왔지?
됐다. 페이스 조절은 무슨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안 되면 죽지 뭐.
35%
다시금 줄기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 좋은 부분이 있다면 이제 오른쪽에서도 보이네?
33%
위에서도 다가오기 시작했다.
슬슬 구체적인 플랜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31%
그래도 30%는 넘길 것 같다. 이왕 넘기는거 조금 더 안전하게 25%까지 줄여보고 싶은데 쉽지 않겠지?
29%
슬슬 나를 완전히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28%
아 지구력이 간당간당하다.
27%
아래쪽에서 줄기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아래쪽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거면 시발 이제 잡힌 거 아닌가?
그대로 뛰어서 가까이에 있는 줄기를 하나 움켜잡는다.
기억이 살짝 가물가물한데 이 줄기 통각세포가 있던가?
없으면 죽지 뭐
그대로 강하게 움켜쥔다.
겸사겸사 고정도 켜준다.
여기서 개 꿀팁 고정의부가효과!
손으로 발동시키면 악력이 강해진다!
한 20% 내외?
크진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만약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줄기 꽤나 민감한 기관일 것이다.
17의 근력에 고정 보정을 받은 악력은 꽤 아플걸?
「부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
여전히 생물 같지 않은 울음이다.
울음이긴 할까?
그리고 빠르게 들려올라가는 몸.
순식간에 뒤집어지는 시야.
강한 부유감이 나를 덮치며, 더 이상 지면이라는 경계가 중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누구?
고정 능력 오너
하면서 하늘을 나니까 기분도 좋아지네.
이래서 능력이 사람을 만든다는말이 나온거같다.
-사람을 만드는 지는 잘 모르겠는데 미치게 만들기는 하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