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026 - [루미나 side2] 난 자리
3년이 지났다.
사람이라는 종은 포기도 적응도 합리화도 빠른 종이라고 생각한다.
군단장이라는 자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익숙해졌다.
…사실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버틸 만 해졌다.
떠난 자리는 언젠가 차기 마련이라고 빈자리도 다시금 채워지기 시작했다.
매꿔지지 않을 것 같던 공허함도 익숙해졌다.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대체제도 생겼고,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후회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살고 싶지 않냐고 물으면 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살고 싶지 않은 것과 죽고 싶은 것은 열망의 방향성이 다르니까.
살아갈 의지와 의욕이 없을 뿐 삶의 목표도 있다.
“군단장 있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단 문부터 열고 들어온다.
무례하다고 해야 했던 것일까?
특히나 의욕이 없던시기에 그냥 뭘 하던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뒀었는데, 조금 정신을 차리니 살짝 마음에 걸린다.
다음 군단장한테도 저러면 어떻하지?
그도 생각이 없는 이는 아닐테니 그러지는 않겠지만 버릇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쉬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때마저도 그녀들과 보냈던 시간이 몸에 남아 매일 단련을 하기 위해 이른 시간에 일어나 홀로 연무장을 뛰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도 뭔가 좋은 찻잎을 구해온 듯하다.
그의 이름은 닐스 수송대의 대장이다. 수송대라는 직책이 있어서 외부활동이 잦다보니 이런 식으로 자주 선물을 가지고는 찾아온다.
생각해보면 플룻연주도 그의 권유와 도움으로 시작되었다.
잘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솔직히 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것인지 그는 꾸준히 나를 도와주고 시간과 정신을 투자해줬다.
정신은 왜냐고?
나라면 내 플룻을 들을 바에는 정신을 놓을 것 같은데…
***
솔직히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지는 별로 없었지만 재능을 타고 났고.
자아가 없는 유능한 도구에게 군대는 신이 내린 직장이었으니까.
그 덕도 많이 보았다.
남은여생 평생을 놀아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욕구나 욕망이 없다보니 딱히 돈을 써본 적이 없어서 잘은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잘 모르겠다.
그녀들은 자아가 없던 나에게 뜻을 심어주고 의지를 심어주고 내 곁을 떠났다.
아니 내가 그녀들을 쫓아가지 못했다.
지금도,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 있지만.
언제든지 의지만 있다면 행할 수 있지만.
난 아직 여기에 있다.
사실 악기연주에 손을 댄 것도, 독서라는 취미를 가진 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이 뭐냐고?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군대가, 군인이 천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결과가 3년이라는 시간동안 늘지 않는 플룻과 여전히 책을 읽기보다는 책을 외우는 행위에 가까운 독서지만.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넌 변할 수 없어 너에겐 지금의 삶이 최선이고 영원히 여기에서 짓눌려 살 거야’
그리고 그 말에 공감하는 나만이 남는다.
***
아 차가 다 우려진 것일까?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간다.
차는 향을 즐기는 것이라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소양은 없는 것인지 그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입 속에 머금고 있으면 조금 더 향이 잘 느껴지는 듯하여, 이번에도 빠르게 입가로 컵을 가져갔다.
이번 차는 독특한 맛이 난다. 난 차의 맛을 구분하여 분류하고 그 종류에 따른 감상과 특징을 잡아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기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 그 종류 자체를 구분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닐스는 매번 다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고쳐지지가 않는다.
봐라, 지금도 그렇다.
“군단장 그거 물이야…”
어쩐지 색도 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에 가져온 차 역시 색이 맑았다. 마치 물과 같았다.
비록 그때는 향도 있었고, 찻잎도확실히 담겨있었지만.
난 아는 게 없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특이한 차인가보다 생각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한다.
그도 쓴웃음을 지으며 제대로 우려진 차를 다시 내준다.
물론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번에 마셨던 차에 비해서 미약한 양의 신맛이 느껴지고, 옅은 단맛도 난다.
일부로 낮은 온도에서 우리는 것일까? 온도 역시 다르다.
단순히 공기 중에 노출되어 식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부로 이 온도로 맞춘 것 같다.
그 차이가 10도가 넘으니까 그것이 맞겠지.
색 역시 다르다. 지지난번의 차는 옅은 녹색 지금은 그보다는 진한 녹색.
구분하는 식별코드 같은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쪽으로는 마찬가지로 식견이 없어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이번 것에는 옅은 붉은 빛 또한 들어갔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중앙에 있던 시절의 동기들은 그런 눈을 가지고 군대에 있는 것이 아쉽다고 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이 천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결국 나라는 존재가 문제인 것일까?
그런 생각도 수없이 반복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으면서도 부정하고 싶어서 꾸준히 반복했다.
하지만 나름 무색무취라는 이명은 가진 온갖 독들을 눈과 코로 구분할 수 있고, 아무런 맛도 안 나고 효능조차 지효성이라 방심하다가 죽는다는 극독도 맛으로구분해낼 수 있는 감각을 타고 났는데,
완벽한 피지컬은 타고 났는데 그것을 감성적인 부분으로 연결하는 회로가 고장이 났다는 사실은 몇 천, 몇 만 번을 반복해도 결국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 난 태생을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살아갈 인간이다.
***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기회를 받는다. 어쩌면 내가 그 기회를 무시하고 두려움에 빠져서 기회로부터 눈을 돌린 것 일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역시 나에게는 기회일지 모른다.
내 앞에서 차의 특징과 매력, 음미하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의 친우 역시 비슷하다.
꾸준히 책을 가져다주고 그에 대한 감상을 물어오며, 함께 이야기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책에 대한 감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딱히 감정적으로 메마르거나 감정기능에 장애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기쁠 때 기뻐한다.
즐거우면 웃는다.
슬퍼지면 울적해지기도 하고,
화날 땐 신경질적으로 바뀐다.
그것들을 즉석에서 표출하거나 감정적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본분이 아니기에 공적인 자리에서 표출하지 않을 뿐, 지금처럼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들의 노력과 관심에 고마워서 웃음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격한 감정에 격류에는 휩쓸릴 일도 적고, 휩쓸리지도 않으려 했기에 그러한 감정에는 미숙한 면이 있기는 하다.
그날 또한 그랬다.
그녀들에게 버려진 후… 아니, 끝끝내 쫓아가지 못한 후.
한동안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자신을 버리고 간 그녀들에 대한 분노,
이제 곁에 없다는 아쉬움과 슬픔,
어제와 같은 오늘도 내일도 없다는 절망감,
배신감, 외로움, 막막함 등.
짧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을 그와 동시에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그래도 위치는 알고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을거라는 안도감,
찾아가면 그녀들은 다시 한 번 나를 받아 줄것이라는 기대감,
오히려 금방 목표를 달성하고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간절함, 희망 등
이 역시 짧은 단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감정을,
어찌 제어하고 어찌 표출해야할지를 몰라서 그저 닫아두고 방치했다.
표출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것이니까.
***
“군단장 지금 또 안 듣고있지?”
아, 그만 생각이 깊어졌다.
그 날 이후로 생긴 버릇이다.
괜찮다. 이 몸뚱이는 유능하니까, ‘흘려듣는다’ 혹은 ‘안듣는다’ 라는 개념은 이 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리를 미룬다와 지금 한다만이 존재할 뿐.
듣고 보류로 넘겼던 내용을 끄집어내어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신기하다니까? 진짜, 분명,확실히, 누가 봐도 안 듣고 있었거든? 전 세계 인구를 다 데려와도 인정할거야.”
그렇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도 신기할 뿐이지 결국 내가 안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무언가 특이한 사람,신기한 사람 그런 느낌으로 화제가 넘어갈 뿐.
그래도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이 관계에 적어도 내 공간에서 만큼은 그들에게 군대라는 조직의 위계질서는 없다.
그들에게 난 차의 맛과 향을 분석할 수 있지만 구분하여 특징을 잡아내고 감상을 말할 수는 없는 이상한 사람이고,
어떤 두꺼운 책을 가져와도 하루면 끝까지 정독이 가능하고 내용마저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기억력을 가졌지만 그에 따른 감상은 말하지 못하는이상한 사람이며,
악기의 운지법도 완전히 알고 있고, 악보도 쉽게 외우며, 폐활량도 압도적으로 좋은데다가, 박자에 맞게 그 모든 것을 실행할 수도 있는, 하지만 그것이 연주로는 이어지지 않는, 그런 신기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편하게 다가와 준다.
내가 변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그 부분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며, 언젠가 ‘부군단장이었고 현 북서지부 군단장인 루미나’가 아닌
‘이제 홍차와 녹차를 구분하여 취향을 말하고 감상을 말할 수 있는 루미나’
‘책에 대한 감상을 물으면 줄거리를 세세하게 말하고 등장인물의 오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 느낀바와 공감한 부분을 말할 수 있는 루미나’
‘플룻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악보를 보고 박자에 맞춰 손가락의 형태를 취한 후 숨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닌 드디어 연주라는 행위를 하게 된 루미나’
그런 루미나가 되기를 기원하고, 그런 날이 왔을 때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려고 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내던져도나라는 인간과 함께 있으면 사는 게재미있을 거 같고,
한 번 사는 인생에는 옆에 있는 인간과 자신의 만족이 가장 큰 가치라고 설파하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 나서는 그런 이들로 다가와 준다.
매번 나의 사표가 반려되면 같이 한탄하고 웃어준다.
기껏 사다놓은 차를 잊고 물을 마실 때면 잔소리하면서 부하 월급으로 트로피를 늘린다고 놀린다.
독서와 암기는 같은 행위가 아니라며 핀잔을 주고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
박자도 음정도 호흡도 완벽한데 연주가 되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실소하고 폭소하고 같이 머리를 맞대준다.
***
인간에게는 기회가 온다고 했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기회가 더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품은 그들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이젠 모르겠다.
정애? 친애? 성애? 우애?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을 향한 감정은 맞았을까?
소유욕이었을까?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혹은 인정욕? 내가 변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대상으로서?
욕망이 맞기는 했었을까?
잃지 않겠다는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무나 책임 같은 것은 또 아니었을까?
이젠 결국 어느 것도 알 수 없다.
확실하다.
난 고장 난 인간이다.
처음부터 결함 품이었을 수도 있고, 살다가 망가졌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부서져서 인간이라고 하기는 모자란 무언가가 남게 되었다.
그래 고장 나고 부서진 결함 품.
이미 망가진 것에게는 망가진 것의 방법이 있다.
또 다음 기회가있을지는 모르겠다.
있더라도 아마 다음 기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이었다.
나에게 다음은 없고 이곳이 내 자리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끝날 자리.
이곳만이 내가 있을 곳이었고, 이곳만이 내가 변할 자리였으며, 이곳만이…내 시작이었다.
그래 나의 첫 시작이었다.
나라는 인간을 고치고 변화하기 위한 시작점.
그러니 마지막이다.
나라는 결함품이 인간으로 변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
따라서 지금만이 내 마지막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잃고 슬퍼하는 인간.
친밀한 존재의 죽음에 복수심을 불태우는 인간.
자신의 자리에 걸맞는 책임감을 불태우는 인간.
***
찻잎을 입에 털어 넣는다.
쓰다. 확실히 이렇게 먹는 것은 아니다.
이것 하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찻잎은 한 움큼씩 손에 쥐어서 먹는 것은 아니라고.
플룻을, 플룻이었던 쇳덩이를 움켜쥐고 꾹꾹 눌러서 작게 압축한다.
휴드라는 목걸이를 하고 다녔던 것 같다. 훗날 그에게 목걸이를 선물해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책들을 불태운다.
무언가를 태우는 행위에는 이미 죽어 하늘로 올라간 이들을 기리고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고 들었다.
방을 나선다.
인기척은 없다.
복도를 걷는다.
인기척은 없다.
계단을 내려간다.
인기척은 없다.
닐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와의 관계를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은 나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준 것 같다.
휴드라.
그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
그 둘의 죽음은나로 하여금 움직일 계기가 된 것 같다.
테르미.
그녀 또한 훌륭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 의욕이 나와는 맞지 않아 감정적 교류가 잦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맡은 바를 다하는 사람이었다.
카자르, 히츠, 젠 등 모두 나에게는 과분한사람들이었다.
소속을 모르는 이의 인식표를 하나 집어 든다.
이 사람은 나라는 존재의 밑에서 만족하며 살았을까?
이름조차 모르는 이의 인식표를 하나 집어 든다.
이 사람은 나라는 존재의 밑에서 충실한 삶을 지냈을까?
얼굴마저 모르는 이의 인식표를 하나 집어 든다.
이 사람의 죽음은 나 따위를 위해 받쳐도 되는 거였을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한다.
난.
고장이 난 인간이다.
부서진 인간이다.
되다만 인간이다.
그래.
인간이다.
그러니까 난 아마도 저 사람을 죽일 것이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
인간으로서 살았다고 말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죽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