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032 - 거기 녹색버튼이 있죠? (꾸욱) 그게 바로 자폭버튼입...
-오후 3시경. 북서 빈민가-
“소장님이 그라티아에 계신 건 알겠습니다. 다만, 연락은 어떻게 취하실 생각이시죠?”
“연락? 딱히 취할 필요 없어 금방 올 거야.”
“무슨…?”
“그러게~? 난 널 알아도, 넌 날 몰라야 하는데~?”
“봐 오셨네.”
기분이 나빠지게 말꼬리를 늘리는 것부터, 일부로 뒤에서 나오는 것 까지.
아키야는 역시 아키야다.
정신 나간 또라이, 싸이코, 미친년, 비호감작의 달인 등등 수없이 많은 별명을 그녀에게 지어줬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니 이젠 반갑다.
최근에 못 봐서 그런가?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봐서 그런가 얼굴 보자마자 이제는 안 반갑네.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르고, 앞머리를 대충 뒤로 넘겨 적당히 앞으로 흘러내린 헤어스타일.
새빨간 왼쪽 눈과, 한쪽에만 하고 있는 길게 늘어진 귀걸이.
그리고 붕대로 칭칭 감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과 귀.
그런 붕대 밖으로 튀어나와 얼굴 오른편을 3할 가량 덮고, 그대로 목을 타고 내려오는 검은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의 여파인지 꾸준히 그녀의 오른쪽 뒤편에서 넘실거리는 검은 귀기까지.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가벼운 느낌의 흰 티셔츠와 베이지색 가디건, 적당히 찢어진 청바지.
아키야를 처음 마주하던 순간도, 아키야가 웃으며 죽던 순간도.
그녀는 지금과 같았다.
“마지막으로 뵈었던 그때와 완전이 똑같으신 모습을 보니, 정말 소장님이시네요?”
“우리 세피도 그렇게 소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도 소장이라고 부르는 부분까지 그대로네~?”
음, 막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나보네.
그렇다고 원수지간도 아닌, 그냥 서로 오랜만에 봐서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만 궁금한 중학교 동창 같은 느낌?
-그 기분 잘 알지밖에서 만났는데 얼굴이 익숙해서일단 인사는 했지만 딱히 할 말은 없는, 근데 하필 같이 버스 기다리는 중이라 쌩까기도 뭐한
-밖에? 나간다고?
-거짓말[거:진말] 명사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함.
-시발 다 꺼져 그냥
음, 별다른 이야기는 오고가지 않고, 적당히 잡담을 하는데 분위기를 보니 딱히 이번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보인다.
결국…눌러야하나?
“오랜~만에 본 얼굴이라 반갑지만~, 우리는 득이 없는~ 일에는 끼지 않는 주의라서~, 기회가 되면 다시 봐~?”
그리 말하며 왔던 순간처럼 조용히, 넘어지듯이 바닥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쪽 친구는 내가 주의 깊게 봐줄게?’
라고 입모양으로 나에게 주의만 준채로.
후 이러면 나가린데.
“음 아쉽게 되었네요. 소장님 성격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사실은 어쩔 수 없지요. 앙귀스의 발악이 얼마나 큰 여파를 낳을지 알 수 없지만, 힘내볼까요?”
그리 말하며 나를 돌아보는 세피. 어, 너는 모르겠지? 난아주 잘 알아, 그래서 절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솔직히 죽어도 그만이다. 이번 회차처럼 좆된 회차는 찾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불타오르는 부분 또한 있다.
다른 회차였다면 절대 못해봤을 전 세력의 총력전.
앙귀스와 파라디수스가 얽히고 섥히는 복수전과 방어전을 펼치고, 그것을 중재하려는 페칸스와 그런 페칸스를 급습하는 그라티아.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싸움을 조장하고 불씨를 키우는 노바투스.
전략게임에서 총력전이라는 것을 실행하려면 필요한 전제조건이 몇개인지 알아?
우선, 내가 유리해야한다.
도박 수 겸, 마지막 수가 아닌 이상에야 불리한 총력전은 포기하기 전에 그냥 불 지르고 서렌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둘째로, 뒤탈이 없어야한다.
1대1 혹은 청팀과 백팀 명백한 대립구도가 아닌 이상에야 총력전을 하면 반드시 틈이 생긴다.
어떻게 이기던 틈은 반드시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총력전을 하기 전, 반드시 모든 뒷 준비 역시 끝내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모든 것을 담은 총력전은 어부지리를 당하기 위한 단막극으로 전락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나의 손해를 최소화해야한다.
꽝 부딪히고 승패가 갈라지는 상황이라면 또 모를까, 그 후에 할일이 남아있다면 언제나 여력을 남겨둬야 하고, 모든 것을 쏟아 붓는총력전에는 그 여력을 짜내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그러니 애초에 그 후에 여력이남도록, 뒷정리를 마칠 수 있도록, 나의 손해가 적은 싸움을 해야 한다.
특히나 총력전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력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나이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
센터 200꽉 VS 200꽉은 아무리 플토가 불리해도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있고,
미드 혹은 바론이나 장로 앞 영혼의 한타 역시 질 가능성이 있고 불리하더라도 심장을 울리는 요소가 있으며,
거점에서 추가시간조차도 아닌데 12개의 궁극기가 폭발하는 순간은 눈 돌릴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이는 모든 전략요소가 있는 게임이라면 대부분 해당한다.
유리한 쪽은 아무리 유리해도, 만에 하나의 변수가 있다면 피하고 싶어 하는 것.
불리한 쪽은 당장 모든 것을 불태우고 끝낼 것이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그러나 가장 매력있고가장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전투.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근데 그 총력전을 팝콘 뜯으면서 구경할 수 있다고?
그것도 가상현실 게임에서 압도적인 강자들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절대 못 참지, 난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다.
이 바득바득 악물고, 온갖 인물들에게 의심을 사는 한이 있어도, 내 소원 성취하고 이번 회차 말아먹을 것이다!
리베르타스? 에베베베 안 들려 ㅅㄱ
-아 야코코코 안 들려면 킹쩔 수 업지;;
-씹좆좆좆 안 들려 에반데;
***
할일이 남았다며 세피를 미리 보낸 후, 빈민가에 남아 하늘을 바라본다.
먹힐지 안 먹힐지 아직 잘 감이 안 선다.
아키야를 자극하는 것은 쉽지만, 그 후 내가 살아나가는 것은 어렵다.
원래 입 터는 건 쉽잖아, 입 털고 이기는 게 어렵지.
아키야의 역린. 그것은 정화기둥 MK2에 대한정보만 풀어주면 된다.
북서지부 낙원에서 낙원 관리인들이 벌이고 있는 만행을 폭로하는 것도 괜찮다.
굳이 낙원 관리인들이 아니더라도 지부장의 행실이나, 낙원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해도 좋다.
모두 아키야에게 협력해서 그라티아의 루트를 전적으로 밟아나가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실이라는 것을 굳이 입증할 필요도 없다.
약간의 의심만 심어줘도 아키야는 스스로 확인할 능력이 있고, 확인한다면 아키야는 충분히 폭주할 것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야하고, 그녀는 아직 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실행하지 않았을 뿐.
실행할 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선을 넘고 행동을 시작하겠지.
근데 그 뒤에 그럼 난 어떻게 되냐가 문제일 뿐이야.
사실 여기는 게임이고 넌 가상으로 프로그래밍 존재라서 내가 공략법을 보고 와서 안다고?
아니면 내가 회귀자라서 안다고?
참고로 놀랍게도 난 둘 다 해봤다.
대부분의 NPC들에게 해봤다.
이야 시뮬레이션 잘 짰더라.
정말 대부분의 NPC들이 본인의 성격에 맞는 대응을 해주더라.
참고로 아키야는 어느 쪽을 선택하던날 죽이더라.
‘흥미~롭네? 그럴 수도 있지~. 따라서 지금 널 죽이는 것에 가치가 없다. 그런데 내 행동에 가치는 내가 정하는 거야. 나의 삶, 나의 선택, 나의 죽음. 모두 오직 나만이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고, 오직나만이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어.’
그게 그 회차들의 마지막 기억이다.
참고로 저 대사는 아키야가 누군가의 손에 죽을 때도 하고, 아키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도 하고, 아무튼 자주한다.
일말의 장난기도 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가끔 일부로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아키야를 괴롭힌 적도 있다.
너무 좋아 아키야 최고야.
‘자신에 대한 가치는 자신만이 부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만이 찾을 수 있다.’
아키야라는 인물의 삶을 꿰뚫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그럼, 정면으로 부딪혀 볼까?
“어이, 뭐라고 부르면 튀어나올 생각이지? 브리트라라고 불러줄까? 아니면 요르문간드? 그것도 아니면…!”
“씨발 너 뭐냐니까?”
와우 바로 찐텐이 나오네.
-헠 눈나 좀 더 매도해줘
-ㅗㅜㅑㅗㅜㅑ
-이게 정말 방금 그 말늘리개가 맞냐?
-취향 ㅇㅈ합니다.
-오늘만은…딸기국밥도 용서…용…용서…씨발 역시 그건 용납 못해
연구소가 무너진 이후, 중앙에서는 아키야가 살아있는 것을 눈치 챘다.
그 후 아키야의 행적으로 추측되는 모든 것을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아키야에게는 상당히 많은 별명과 수배가 붙었는데, 방금 말한 오그라드는 이명들이 바로 그것이지.
이것을 읊는다는 것은 아키야에게 있어서 난 네가 어디까지 예상을 하던 그 예상보다 너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으름장.
선전포고.
난 지금 장갑을 던졌다.
“방금 보고 다시 보지? 반갑다. 이제야 맨 얼굴로 대화해 줄 생각인가?”
해맑고 동글동글한 인상이 아닌, 내뿜는 검은 귀기에 걸맞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표정과 공허한 눈동자.
그리고 풀어헤쳐진 붕대와 그 속, 검은 안개 가운데 덩그러니 떠있는 하얀 점.
그것이 그녀의 오른쪽 눈.
아키야와 두 눈을 마주본다는 것은, 아키야가 진심이라는 소리와 진배없다.
“여제와 화가, 둘 중 하나를 묶어줬으면 해.”
시엘라의 이명, 그리고 유이의 이명.
“내가? 그 지뢰들을? 왜?”
당연한 듯이 돌아오는 거절.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넌지시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다.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내가 원하는 것을 판단하고, 가지고 있어?”
당연한 의문, 근데 내가 너랑 함께한 시간이 얼마고, 희로애락이 얼만데.
“어디 정화기둥 밑에 처박힌 것들이 뭔지 이야기 해줄까?
아니면 북서지부 관리자들이랑 중앙 연구소 관리팀들의 명단?
아니면 지부장의 요 몇 년간의 행보?”
난 너의 인생을 너보다 잘 안다고 확언할 수 있어.
행복한 너와 불행한 너,
만족한 너와 불만족한 너,
목적을 앞두고 좌절한 너,
목적을 모두 이뤄 길을 잃은 너,
불완전한 삶의 끝에 아쉬움을 표하며 죽어가는 너,
완벽한 삶의 끝에 조용히 눈을 감는 너,
너조차도 모르는 미래의 너와 보낸 시간이 얼만데.
난 얼마든지 널 설득할 수 있다.
근데 시발 화도 안 나게 어르고 달랠 자신은 없긴 해.
너라는 인간이 애초에 그런 인간이 아니니까, 물론 난 그런 부분을 포함해 아키야라는 인물을 좋아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감히 말하자면 넌 지금,
“…너, 난 널 알아, 넌 날 왜 알지?”
라고처음과 같은 말을 진지하게 다시 꺼내겠지?
“나? 새로운 너의 목표, 목적, 이유.
네가 너 스스로의 의지로 너의 가치를 투자할 존재.
따라서 네 인생에 있어서 끝내 가장 큰 가치를 가지게 될 사람.”
잘 부탁해.
“화가 년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일단 따라와.”
아키야.
시야가 검게 물든다.
***
-오후 4시경. 그라티아 단장실-
“야, 너 내 능력도 알지”
이번 회차 며칠 째지? 8~10일인데. 오히려 너무 짧은 시간만에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해서 그런가, 반응이 날카롭다.
기본적으로 그냥 모든 것을 다 주고 시작하는 기분.
굳이 심리전을 이어가기보다는 그냥 다 인정하자.
이 싸움만 보고 죽을 건데 뒷일은 뭣하러 생각해.
“알지, 믿거나 말거나는 네 자유지만”
“…어디서튀어나온 걸까?
좋아 일단 낚여줄게
페칸스를 막아 달라… 그럼 여기를 완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게 네 목적인거지?
대신 일이 끝나면두고 봐 나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고.”
조금 더 까다로우리라 생각했는데 회차 진행시간이 길지 않은 것이 행복한 오산이 되었다.
“이건 진짜로 너희 덕에 알게 된 거네.”
언제나처럼 혼자 했다면 회차도 이런 타이밍에 될 대로 되라고 던질 일이 없었을 테니까.
-드디어 우리의 소중함을 알아줬구나
-흠흠, 뭐 딱히바라는 건 없고, 흠흠, 그냥 밤샘 한번
“안하지~”
-개새끼야!
-너 인성 문제 있어!?
***
-오후 7시경. 노바투스의 건물 옥상-
준비는 끝났다.
북동쪽.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 폭풍전야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
과연 언제 폭풍이 몰아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오늘 밤, 혹은 내일 새벽.
그리고 남동쪽. 앙귀스의 고요함에 대응하듯이 소리를 잃고, 그저 잔잔하게 준비를 하고 있다.
북서쪽. 언제나 와 같은 분위기.
하긴 여기는 사실상 아키야 혼자 움직이니까.
페칸스는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발밑.
노바투스도 소란스럽다.
이들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 오늘 밤 혹은 내일 새벽부터 시작이라고.
자 그럼 이 악물고 무시하던 손님을 맞이해볼까?
“안녕? 에드베레 친구? 다시 만났네? 나 기억하지? 반가워?”
“금호…”
“응! 기억해줬구나! 두번 연속으로 내가 찾아왔으니까! 다음엔 네가 찾아와 줬으면 해!”
그래… 다음 회차에는 꼭 그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