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043 - 소제목 말고 본제목
퍼퍼펑!
쏘아지는 신호탄.
그 색은 푸른색.
증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더는 암살의 범위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앨리스가 일의 경중과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차피 이 장소에서 발각된 이상, 전면전은 피할 수 없으니, 최초의 목적이라도 확실히 달성하기 위한 신속한 판단.
적의 분위기와 머릿수를 보고 현재 인원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단.
따라서 지금 바로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더라도, 적과 아군 모두에게 현 상황을 알리는 과감한 판단.
그 결과가 쏘아진 증원요청의 의미를 담은 신호탄.
물론 이 신호탄은 그라티아 역시 볼 것이고, 자신들은 신호탄을 사용하지 않으니 대낮에 폭죽놀이라고 생각하거나,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짐작하겠지.
아무리 병신오합지졸이어도 설마 전자라고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임무는 실패입니다. 지금부터는 생존과 불사조의 위치파악을 최우선으로 둬야할 것 같습니다.”
“예?”
아이고 원붕아 거기서 얼타면 어떻게 하니.
“호위 병력이 붙어있는 것도 상정 외인데, 그 병력마저 많습니다. 흩어져있던 이들과 합류를 하더라도 성공을 점치기 힘듭니다.”
따라서 증원을 요청한다.
본 인무의 목적은 본격적인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 혹은 전면전의 시작과 동시에 불사조 이오릴을 제압하거나 제거하는 것.
그것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 잠입과 암살.
최선의 수단이 봉해졌으니 두 번째 수단을 취해야한다.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수단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위치를 놓쳐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 자리에 당장 있는 우리 뿐.
“따라서 저희의 임무는 지금부터 추적과 생존, 그리고 그 결과를 실시간으로 증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테르미가 생각보다 아끼는 부하를 내줬나보다.
가능한 한 간결하게 핵심만짚어서 상황을 요약한 뒤, 원붕이의 손을 잡고 뛴다.
다리에 감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강화 계열 혹은 방출 계열.
그대로 하늘로 뛰어오른 두 인영.
“저는 회피와 이능제어에 힘쓰겠습니다. 타겟의 위치 확인을.”
“ㅇ…어! 알겠어.”
좌측, 그라티아의 진영에서 멀어지는 동선.
그래, 그녀는 그렇다. 자신이 그라티아에 있어서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 못한다.
전장에서 지휘관이 제 아무리 회복능력을 가지고, 그 능력을 주변 넓은 범위의 아군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해도, 전장 한 가운데에 서는 것은 흔치 않은 일.
그런 그녀의 성격은 이번에도 끝내 악수를 두었다.
유일한 변수는 아키야의 존재일진데.
여기서부터는 도박이지, 원붕이에게 있어서도, 이오릴에게 있어서도.
정말 짐작할 수 없다. 새로 시작 버튼을 누른 순간 굴려진 주사위라서 그 눈을 우리는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이오릴도 그 눈을 확인하지 못하였고.
빈민가의 외곽, 남서 거리로 이어지는 벌판.
남서쪽은 거리라고는 부르지만 기본적으로 남동쪽 번화가에 인접해서만 건물이 좀 들어서있고, 그 외에 곳은 빈 건물이거나, 이렇게 그냥 버려진 황야 같은 느낌이 주를 이룬다.
보통 여기에는 아예 올 일이 없어서 볼 일도 적지만 말이야.
이는 그라티아 역시 마찬가지, 굳이 자신들도 좋아하지 않고, 자신들을 좋아해주지도 않는 남서거리의 일반인들과 가까이할필요도 없고, 심지어 그 건너편 역시 빈 건물이거나 벌판이며, 자신들의 구역은 충분히 넓으니, 오히려 외벽의 주변보다 생활감이 떨어지는 판자촌 같은 느낌.
아마 사람도 이젠 없을 거야.
대부분 다 앙귀스 쪽으로 갔거나 그라티아 쪽으로 옮겼을 테니.
“유인…당했군요.”
앨리스도 이를 눈치 챘는지 다소 불안한 눈빛
허나 별 수 있나, 지고 들어가는 싸움 그들에게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빠르게 세 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그녀. 하나는 전과 같은 파란색, 나머지 둘은 각각 붉은색과 노란색.
해석하자면 빠르게 증원을 요청한다, 당장 죽을 것 같기는 한데 죽더라도 할 일은 해볼라니까, 가능하면 진짜로 빨리 와줘라.
뭐 그 정도 되려나?
우리 눈치 없고 둔한 원붕이도 나름 무언가를 느꼈는지 진지하게 검에 손을 올린다.
크으 그래도 키도 크고 와꾸도 준수해서 저러고 있으면 그림이 된다니까?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2초안에 잊혀질 만큼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은 평범한 나에게는 부러울 따름이야.
그리고 잇따라 모습을 들어내는 그라티아의 인영들.
그 수는 열이 넘는다. 아마 더 늘어나겠지, 그날 내 앞을 막던 일반 이능력자들과는 수준이 다른 진영도 역할도 제대로 나뉜 모습.
제 아무리 오합지졸이라고 무시하지만 그것도 다른 소속끼리의 단합일 때의 이야기.
점조직의 특징은 조직의 큰 목표를 위한 목적의식은 떨어질 수 있는 대신, 하나의 점끼리의 동료의식은 굉장히 깊고 진하다.
그래 저렇게 뭉쳐서 오는 누가 봐도 한 가족인 녀석들은 말도 눈빛도 없이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지.
바로 저렇게 말이야.
***
-원붕이-
적들이 등장하고 잠시, 아주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모든 준비가 충분하다는 듯이 등장한 이들은 순식간에 넷으로 갈라졌다.
‘좌측으로 셋, 우측으로 다섯, 전방에 셋’
확인한 숫자가 이만큼, 더 많을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적을 가능성은 한없이 미약하다.
특히 우측.
우리를 포위하는 것과 별개로 이오릴에게 합류할 인원이 포함되어있던 것이겠지.
“앨리스라고 했지, 전투능력은?”
검에 올려둔 손에 조심스럽게 힘을 넣으며 묻는다.
“…제 몸 간수할 정도는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파라디수스 소속이 평균적으로 스탯 합계가 몇이라고 했지? 적응과 재주를 제외하고 25?
그녀는 수비대 소속이고, 수비대는 나름 정예 병력, 거기에 테르미가 아끼던 인물 같았는데 조금 더 후하게 쳐준다면 합쳐서 50은 넘는다고 봐도 괜찮을까?
지금 나의 스탯은 최소한의 지구력을 제외하면 재주조차 희생한 근력과 민첩 특화형.
재주로 챙겨야 하는 공격력은 근력으로, 시스템 보정은 피지컬과 경험으로 충분히 메꿀 수 있다.
체력과 생명력은 안 맞으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민첩과 나의 피지컬이 해결해 줄 것이다.
좌측에서 들어오는 급습. 하지만 느려.
침착하게, 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게 뒤로 세 걸음.
한 걸음.
검로가 흔들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검집을 강하게 움켜쥔다.
두 걸음.
손잡이에 올라간 오른손으로 검로를 조정하고 자세를 낮춘다.
세 걸음.
철컥!
쐐애액!
적이 분명하고, 그 길 또한 명확하다면 망설임은 필요치 않다.
푸슉!
털썩
일단 하나.
그대로 앞으로 구르며 좌측에서 쏟아지는 포화를 피해낸다.
적들은 합이 좋고, 상황판단도 느리지 않았어.
분명 자세가 흐트러진 나를 노리겠지.
어디냐? 오른쪽?
자세를 회복하며 검을 원형으로 크게 휘두르고, 그대로 몸을 180도 회전시켜 적들을 시야에 넣는다.
검이 둘, 창이 하나.
오른쪽으로 간 인원이 다섯을 넘나본데.
각각 좌측과 우측을 압박하며 들어오는 두 검수.
왼쪽이 앞선다.
왜 앞설까? 단순히 빨라서? 아니, 오른쪽의 기세가 더 무겁다.
좌측이자세를 시선을 끌면, 창이 자세를 무너뜨리고, 우측이 목을 취하는 전략.
하지만 그 어느 쪽의 기세도 나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우로 한걸음, 가볍게 일섬.
“무ㅅ…”
마음이 잘 맞는 합공의 단점이 뭔지 알아?
어느 하나가 무너졌을 때의 대안 또한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다는 거야.
오른쪽이 죽었는데 본인이 위험한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얼 타는 왼쪽과, 왼쪽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창은 찌르지도 않고 당황하는 창잡이.
앞으로 두 걸음.
검의 위치를 되돌리며 대각선으로 올려 베며 창잡이의 목을 수확하고, 그대로 내리 꽂으며 왼쪽을 두 동강낸다.
이오릴이 분명 힐러라고 했나?
죽은 놈은 못 살리겠지.
그대로 우측에 있던 무리를 향해 뛴다.
좌측에는 사수가 둘. 위협적이지 않다.
전방, 이제는 후방인가? 뒤에 있는 셋 역시 접근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수일까?
고민은 뒤로 미뤄두고 우측을 뚫는다.
쾅!
콰콰쾅!
내 쪽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닌데. 앨리스에게 쏘아진 포화인가? 살아있기를 기도하며 우측으로 쏘아진다.
당장 내가 해야 할일은 적의 머릿수를 줄이는 것.
그녀를 구해봤자 근본적으로 적의 머릿수가 줄지 않으면 해결은 되지 않으니까.
순식간에 도륙이 나버린 네 동료를 보고 겁에 질린 모습의 셋.
이오릴에게 합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인가? 우측으로 간 인원이 예상보다 많지만 그 수가 일곱이 넘지는 않았는데 여기에 셋이 더 있다고?
달려 나가며 가장 후방 아무런 공격준비도 되지 않은 녀석을 목표로 검을 휘두른다.
일 합.
바로 옆 손에 감기던 기운을 제대로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페이스를 잃는 녀석과, 그래도 가진 바의 힘을 내쏟는 녀석.
위로 크게 뛰며 힘을 쏟아내던 녀석의 손목을 자른다.
손으로만 방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반대손도 가능한가? 알 수 없지만 저 속도로는 나를 노릴 수 없다.
크아아아악!
신체를 잃은 고통에 소리를 지르는 모습. 안 그래도 이능조차 제대로 발하지 못하던 녀석은 이제 꼬리를 말 준비를 하고 있네?
심지어 나의 도약방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나의 착지지점을 향해 뛰고 있다.
혹시라도 착지하는 순간을 노린 것이면 재미라도 있을 텐데, 그대로 내리꽂히는 검에 절명하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나.
손목을 잃고 전의를상실한 녀석에게 쇄도하여 그대로 목을 취한다.
벌써 일곱이 세상을 떠났다.
나의 무력이 강한 것은 맞다.
이건 그 사람도 인정했다.
높은 민첩을 제어할 수 있으니, 광역기를 남발하는 네임드가 아닌 이상에야 생명력과 체력을 투자할 필요가 없고.
검에 대한 숙련도가 기본적으로 받쳐주니 재주 또한 투자하지 않아도 좋다.
이능력은 적응 의존도도 이능력 소모량도 적은 순환, 따라서 그 두 가지 또한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오직 근력과 민첩, 그리고 최소한의 지구력만.
솔직히루미나의 전투법을 보았으니 그녀처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체력과 생명력을 3자릿수로 맞출 자신이 없으면 꿈도 꾸지 말라는 말에 접어뒀다.
단순 스탯 소모량의 문제가 아닌 스토리모드에서의 3자릿수라는 것은 기연이 없으면 달성할 수 없는스탯이니까.
그 사람이 그리 말했으니 그런 것이겠지 난 모른다. 살면서 근력과 민첩의 합이 100을 넘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심지어 플레이타임마저도 이제 9시간을 넘고 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1시간 정도 가졌으니 실질적으로 8시간.
듣기로는 90 위로 올리기 위해서는 스탯을 투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던데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무의미한 수련과 대기시간을 모두 자동진행으로 넘긴 결과이기에 회차 진행시간은 아마 2주는 넘겠지, 물론 2주도 굉장히 빠른 것이라고 했다.
회차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거 다 보고 있다가는 한 달 내내 회차 하나만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으니 나 또한 그에 수긍했고.
벌써 가운데 있던 무리에게 도착했다.
내 발걸음을 보고 흩어지려했지만, 그들은 빠른 산개보다 앨리스를 확실하게 처리하기를 선택했고, 그 결과 흩어지는 속도 또한 느렸으며, 그에 반해 생을 마치는 속도는 빨랐다.
단 네 합.
3명의 숨을 거두는데 필요한 칼질의 횟수였다.
오히려 한 합당 한 명의 숨을 거두지 못 한 게 아쉬울 정도의 전투력.
남은 두 사수를 정리하는데 든 시간 역시 길지 않았다.
혹여나 죽었을까 걱정이 되던 앨리스 역시 살아서 이오릴의 발을 묶고있던 참.
합류해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는데.
콰-앙!
격돌음.
“하, 낙원의 충견들이 여기까지 와서 무슨 볼일이실까?”
나와 이오릴의 사이를 가로막는 거구.
양손에는 그 몸집에 어울리는 두 자루의 도끼.
필시 한손으로 휘두르라고 만들어진 크기는 아닐 것인데, 양손에 하나 씩 쥔 것을 보아하니, 여타 다른 게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느낌의 쌍수도끼 광전사의 이미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도끼에 묻은 혈흔이 아직굳지 않을 것을 보건데, 아마 같이 왔던 3인은 저 도끼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 것일까?
어쩐지 합류가 늦더라니.
“우두머리 타친”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앨리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이름입니다. 우두머리라 불리는 이유는 그라티아의 세력이 커지기 전 이곳을 주름잡던 왈패의 대가리라 그렇고, 이명은 처형자 타친”
처형자.
분명 담서의 이명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런 이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2세대의 인물이라는 것, 물론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NPC는 2세대라고 했고, 더치 역시 지금의 성장치로 1대1은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단언했는데 그 역시 2세대.
그래 2세대라고 약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 영상에서 본 괴물들과는 격이 다른, 도전해볼만한, 그런 적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서포트는 가능해?”
그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처음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지금이라면 나름 믿어볼만한 실력자라고 인지했겠지?
“해보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이 저를 보조하는 것보다는, 제가 당신을 보조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니, 그러나 제 본직은 아니었던 관계로 미숙해도 양해를.”
그거면 충분하다.
여태껏 사용하지 않았던 이능이 몸을 순환하는 것을 느낀다.
가벼워진 몸, 맑아진 정신, 뚜렷해진 시야.
혹시 모르니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신호탄을 재차 쏘아 올리는 앨리스를 확인한 뒤, 그대로 내 몸은 적에게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