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049 - [담서 side2] 조화 (50/99)



〈 50화 〉049 - [담서 side2] 조화

가치(價値/Value)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나는 가치가 없고, 나의 가치도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세상에 남과 동시에 버려진 것일지 모른다.


혹은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인간관계를모르고, 가지지 못했으며, 가지려하지 않는 나에게는 생겨날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또는 인간의 욕구 및 관심의 대상이나  목표가 되는 기준을 통틀어 이르는 말.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인물은, 나라는 사물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관심의 대상을 가지지않으며, 기준을 정하지 못하고, 기준이 되지 않는다.



삶을 놓아버리지도 못하고 흘려보냈다.
삶을 포기하지도않고 그저 낭비했다.
나에게  기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원해서 나는  없고, 원하는 대로 사는 이 또한 없는 세상이지만.
모두가 원치 않고 태어나, 원하는 것을 버려가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내게 주어진 생과 삶은 나에게 올 기회가 아니었으리라.

생을받을 가치가 없는 생명이고.
삶을 받을 가치가 없는 생물이었다.

허나 인간에게는 최소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원치 않았지만 생을 받았고 희망하지 않았지만삶을 살아온 덕에 세 번째 기회 또한 받았다.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꿈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 가치가 없는 나에게 상냥하지 않았고.
 무엇 하나, 가치를 가지지 못한 나의 의사는 담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택을  기회가 왔다.

클 담(譚). 용서할 서(恕).

인자하고 어진 사람이  수 있도록, 타인을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끝에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의 아버지가 가졌고, 그가 가졌던 성을 받고.
그의 아버지가 가르쳤고, 그가 배운 뜻을 이름으로 받았다.

담 서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에게, 아무것도 가질 수 없던 나에게, 이름을 줬고, 의사를 줬고, 선택을 줬다.

그래 그와 만나 비로소 나는 생을, 삶을 시작했다. 시작됐다.

생명은, 생물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가치를 형성해간다.

자연히 있어야하고 당연히 생겨야했을 것이 없는 이에게 그러한 개념을 다시 심어주고 가르치는 것에는 많은 노력과 노고가 든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많은 노력을 다했고, 오랜 노고를 다했다.

그렇게 나는 그의 가치가 되었고, 그는 나의 가치가 되었다.

나의세상은 그로 하여금 뻗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 그는 나의 전부였다.

나의 생, 나의 삶, 나의 빛, 나의 숨.

나의, 모든 것.

***


인간이 살아가며 기회를 받을  있다면, 인간은 살아가며 시련 또한 받게 된다.

그래 그것은 나의 시련이었다.

세상은 말했다.
‘신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준다.’고.
필시 이 내 삶에 신은 존재하지 않겠지.

신이 죽었다 하는 이는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시련은 나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든다.’고.
그러나 그는 끝내 시련을 이기지 못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수 없지만 결국 무너졌고, 부서졌다.

‘시련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 얼마나 서글픈 말일까?
원치 않는 삶에 원치 않는 시련인데 그로 인해 가치 또한 잃어야 한다니.

‘시련 속에서도 계속 의욕을 가져라.’ 원치 않는 시련 속에서 제대로 쥐어본 적 없는 의욕을 지니라니, 이 얼마나 가혹한가.

하지만, 아무리 불평해도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고, 지나간 선택은 다시 할 수 없지.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일에는  책임이 따르고, 잘못된 선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그러니 내가 받고 있는 것은 책임이고, 대가겠지.

그러나 책임이라면, 어디서부터 맡아진 것일까?
대가라면 언제부터 측정된 것일까?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순간?

그에게 닥쳐온 죽음을 걷어내지 못한 순간?

혹은훨씬 전, 그를 만난 것, 삶을 이어간 것, 생을 받은 것.

그 순간부터 쌓여온 것 일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대가를 치러본 적도, 책임을 져본 적도 없으니까.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날이 떠오른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하늘은 유독 검은 빛이었고,  공기는 유독 무거웠으며, 세상은 유달리 나를 등진 것 같은 날이었다.

빗물은 굵고 차가워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세상은 깊고 어두운 밤이 내려앉아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창밖을 바라보며 그저 언제나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세상에는 그밖에 없었으니까, 그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문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알았다. 건물에서 일어나는 소란 역시 알았다. 건물을 넘어 거리에 퍼진 혼란마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의 일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삶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으니까. 나의 생은 그들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너무 좁았으니까.

그래, 변명이야.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으니까.

비가 거세졌고, 그 어둠은 점차 짙어졌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세상은 마치  주인이 돌아온 것처럼 매몰차게 변해갔고, 그 공기는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 속에 다시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힐 때 쯤.

 불안함이 나를 지배할 때 쯤.
그 불길함은 형태를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났다.

처음 본 순간 본능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이었으니 그를잃은 나에게 남은 것은 더는 없으리라는 것을.

살면서 가져본 적도 없던 것을 얻은 기쁨은 그것을 다시 잃었을 때의 고통과비할 바가 되지 못했고.

비로소 나의 이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어미였던 여자는 그 손에 쥔 것을 잃음으로서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그는 나에게 서라는 이름을 준 것일까?

내 삶이 변하고 그 끝에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부모였고, 가족이었다.
오직 그만이 나의 가족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6년은 나에게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손에 넣은 12년은 더 짧은 시간이었다.

다시 아무것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그 온기를 알아버렸고, 그렇다고 삶을 놓기에는 그가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공기가 무겁다.

쏟아지는 빗물은 내 숨을 끊기 위해 공기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고.
내려앉은 어둠은 내 눈을 가리기 위해 앞을 가로막은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마지막 숨을 뱉어내었고, 그의 마지막 숨은 그렇게 나의 심장에 박혀 나의 생을조였다.

아니, 나는 그의 마지막 숨을 내 목에 걸고, 내 심장에 박아, 나의 삶을 죽였다.

***

운명이란 망치요, 세상이란 모루니.

생물의 생애는 모루의 위에서 망치를 기다리고, 견디고 벼려지거나, 부서지고 조각날 수밖에 없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이 나를 강하게 만드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부수지 못한 망치는 결국 나를 단단하고 예리한 검으로 벼려냈다.

내 목에 걸린 그의 숨은 나의 숨을 끊어내지 못하고 나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내 심장에 박아 넣은 그의 말은 나의 심장을 멈추지 못하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난 그의 꿈을 물려받았고, 그의 뜻을,그의 의지를,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오빠의 무덤에는 그저 한 송이의 꽃이 피었다.

붉은 꽃이었다.

붉어야 할 꽃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붉은 꽃이었다.

꽃은 시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꽃은 언제나 나의 곁에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이어받은 대가로는 참 얄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가야했다.

내 모든 것은 그에게 받았으니, 그가 남긴 모든 것 또한 내가 이뤄야 함이 맞았기에.

하지만그렇게 1년, 2년, 그렇게 3년.

여전히 나는 비오는 그날에 갇혀 방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그가 남기고  것들은 점차 작아지고, 흐려졌다.

그의 흔적이 점점 흐려졌다.

그럴수록  목을 죄던 숨은 더욱 두꺼워졌고,  심장의 쐐기는 점차 굵어졌으며, 꽃향기는 점점 짙어졌다.

그것만이 그를 기억할 방법이었으니, 그렇게 해야만 그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을  같았으니까.

오빠를 걱정했던 남성이 있다. 이젠 나를 걱정하는 남성이 있다.

그는 매번 나의 행복을 빌어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방에서 나설 수 없었다.

그날의, 비가 오던 그날의 어두운 방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가면 그의 죽음 다시 받아들여야  것 같아서. 그 순간 정말로 그의 흔적이 없어질 것만 같아서.

우리를 챙겨주던 여성이 있다. 여전히나를 챙겨주던 여성이있다.

그녀는 매번 나의 평온을 염원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떠나면 그가 남긴 것들을 놓칠 것만 같아서. 그러면 더 이상 내게 남은 것이 없을 것만 같아서.

많은이들과 함께 했고, 많은 이들이 떠났다.

많은 이들이 떠났고, 적지 않은 이들이 남았다.

그러나 그들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나만을 바라볼 눈빛이, 정말 내가 혼자 남았음을 받아들이라는 듯해서.

태양계에는 많은 별이 있지만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이는 태양뿐이니. 그래 그는 우리의 태양이었다.

때문에 그를 잃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빛이 없었다.

태양이 없는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태백성은 그 뜻을 잃고 어둠에 묻힌다.

그래 그가 없는 나는, 우리는 이렇게 어둡다.


***



어두운 밤.


찻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간다.

율도 치에키도 모두 떠났다.

세상을떠난 것인지, 나를 떠난 것인지는  수 없지만.

언제나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정말로 늦은 순간이었고,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항상 핑계와 변명의 시작이었다.

결국 이렇게 흐를 것이면, 결국 이렇게 내칠 것이면, 결국 이렇게 부수고 조각내 버릴 것이면.

처음부터 주지를 말지.

숨도, 삶도, 이유도, 불현듯이 던져주고는 그 아픔이 제일 커지는 순간을 노려 아픈 순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니.

필시 내 삶에 신이란 없었을 것이다.


입가에 가져온 찻잔을 조심스레 기울인다.

혹여 내가 신을 찾지 않음에 심통을 부리는 것이라면  잘난 기도 한번 올려볼 것을 그랬나.

이미 늦은 후회지만 여기까지 늦은 마당에 후회가 하나 늘어난들 별 의미는 없으리라.

그래 얼마나 많은 후회가 쌓였는지.

율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그자의 말을 들어서 네가 편하다면 상관없어, 그래 난 그저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다만, 그 행복이 일시적이 아닌 것이길 바랄게’

안타깝게도 매우 일시적이었던  같아. 멍청한 사람, 진작 홀로 살길을 찾아 나섰다면  좋았을 것을.

꿈도 희망도 부서진 멍청한 여자애 하나,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애지중지 감쌌는지.



입안 가득히 머금어지는 찻물이 혀를 적시고,  향이 코끝을 맴돈다.

치에키의 말 또한 뇌리를 스친다.

‘언니는, 담서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 굳이 오빠의 뜻을 이어받을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의 말을 따를 필요도 없는 걸? 담서는 그냥 담서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나중에 정말  버틸 것 같을 때, 내 말이 너의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나의 용기가 되어주지 못했네.

결국 나는 이렇게 조여지고, 이렇게 처량하게, 무력하게, 홀로 남았고.

여전히 나는 자유롭지 못하고,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같으니까.

안타까운 사람. 필시  같은 인간에게 엮이지 않았다면 더 아름답게 필  있었을 진데.



쓴맛과 단맛이 혀를 스치고, 시큼한 맛이 혀를 덮친다.

뜨거운 습기를 넘어서 안정되는 따뜻한 향기와 산뜻한 향기가 잠시 스친  알싸한 향이 올라온다.

유독 나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쓴맛 뒤에 짧은 단맛과 나를 옭아매는 시큼함이.

코를 데는 뜨거운 온기 뒤에 짧은 안정감과 그 직후 찔러오는 알싸함이.

마치 나의 삶과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분명 처음에는 그의 향기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그의 향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꽃만이 남았다.

나를 닮은 향도 생기도 없는 꽃이.

아니, 적어도 이 꽃은 피어있는 형태를 취하니 나보다 나을지도 몰라.

꽃봉오리 형태의 모형.

나라는 인간을 정리한다면 그렇게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피지 못한 모형. 아무리 기다려도 피지 않는 모형.

 상태로 영원히 머무르는 악의가 담긴 모형.

향도 없고,생도 없으며,미조차 없는, 그저 기대감만을 부추기고, 그 끝에 실망감을 안겨주는, 영원히 피지 못하는 가짜.

어느덧 찻잔이 비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다.

너는 왜 울고 있을까?

어째서인지 그의 표정에서 오빠가 떠올랐다.

아, 그런가, 나는 이제  사람을 만나러 가는구나.

아니 만날  있을지 모르겠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난  그렇지 못한 삶을  것 같으니.

그래도 괜찮다면마중이라도 나와 줬으면 해,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그럼…다시 버틸 힘을 얻을  있을지도 모르니까….

응, 그러니까, 지금 보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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