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077 -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도 추악함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며
발산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돌려 말하면 그것 밖에 없는 보스였고, 결국순조롭게 마무리.
그 후 늦게 합류한 도둑이를 위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보스나 이미 앞서 보여준 적이 있던 보스들의 재탕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에 온라인 컨텐츠가 열려도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친구들이 생겼네.
게임은 역시 같이해야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가상현실에 잡아먹혀가는 21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단어지만.
하지만 지난 휴일이 재미있으면 재미있을수록 다음날 찾아오는 평일의 괴로움은 배가된다.
“저, 이번 달까지만 일하겠습니다.”
“…어?”
그래서 그만하려고.
이번 달까지 만이라고 말했지만, 오늘이 4월 22일 목요일이니 사실 얼마 남지는 않았지?
그래도 죄책감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매번 신입 더 모집해야한다고 인력부족하다고 지금 있는 인간들 다 폐급 쓰레기 병신들이고 사람은 나랑 당신밖에 없다고 난 꾸준히 어필을 했고, 내가 어필한 부분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상사의 책임이니, 그 뒷일도 이 양반이 감당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을 활용해 커뮤니티를 확인하자 유독 추천수가 높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희라 방송 오늘자 레전드]
-오늘 에자 방송 안 하더라 그래서 신입발굴하고 다녔는데 신입인데 시청자로는 에자랑 비비는 방송 있더라고, 그래서 보는데 개 쩜.
>ㄹㅇ 묵묵하게 할 일 하면서 방송 하는데 경력 있는 신입인가 뭔가 그거냐?
>느낌 있더라, 에몽이 퇴물 다됨
>진짜 강압적이고, 냉혹하고, 싸늘하고 보는 내내 헤으응 밖에 생각안남 ㅋㅋ
에모몽이 오늘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 자체는 언제나 같은 개뻘소리.
그렇지만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무언가 계기가 있으니 저런 글이 올라왔겠지? 어차피 퇴사까지 오늘을 포함해도 7일, 내가할 수 있는 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해야 하는 일은 이미 끝났다.
게다가 다음 주에 새로시작될 프로젝트에는 일주일만 손을 대고 땔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 진행 중인 녀석만 마무리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되겠지.
그래도 이제 바빠질 테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마무리는 내가 지어주는 선에서 그간의 정은 끝.
그리고 프로젝트의 마무리는 이번 주에는 손댈만한 것이 없으니까, 오늘은 에자의 방송이나 실시간 다시보기로 뒤에서 쫓아가야겠다.
***
앙귀스.
에베베가 말하기를 현재의 앙귀스에는 몇몇을 제하고는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는 패배자들이 모인 장소라고 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가장 중요한 머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틀어박혔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러한 상황에서 앙귀스를 이끌어야할 두 기둥이 담서에게 신경을 쓰느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이들을 신경 쓰고 함께 발맞춰 걸어야할 기존 멤버들마저 담수의 유지를 이어받아 담서가 정신 차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칭 패배자들도 그저 하루하루 공짜 밥과 공짜 집을 욕심내서 앙귀스에 들어와,
못난 서로를 보며 위안을 얻고 만족감을 얻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담서의 칩거가 깨지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일어나는 일이며, 담서가 활동을 시작하면 이들의 생태계에는 변화가 생긴다.
‘하얀 석산’루트에서 무분별한 폭주를 하고 그 희망에서 완전히 눈을 돌린 채 남은 삶을 불태운다면 그들은 도망친다.
더는 안전한 도피처가 아니니까.
기웃거리며 무언가를 주워 먹기에는 또 능력도 용기도 없으니 위험해진 둥지를 버리고 새로운 도피처를 찾아 떠난다.
‘남은 자들의 이야기’루트에서 삶의 욕심을 버린 채, 떠난 이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남아서 살아갈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고자 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행보를 그저 구경하며 가치 있는 것이 자신들의 앞에 떨어지기만을 기도한다.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칠 확률이 적다는 것을 인지하더라도 북서지부의 처형자라는 이명은 지닌 이의 기세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니까.
그 기세를 이겨낼 의지를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담서가 삶의 의지를 품고, 자신의 길을 찾으며 헤맨다면, 그들은 위험도 없고, 패기도 없는 그녀의 곁에 엉겨 붙어서 앙귀스의 피를 빨기 시작한다.
이는담서의 내면의 안정을 위해, 담서가 정면에 나서는 것을 최대한으로 저지하면서 플레이어와 일부 앙귀스 멤버들만의 힘으로, 무력이 필요한 순간은 무력을 협상이 필요한 순간에는 협상을 통해서 루트를 이끌어 나가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루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동시에 그 루트에 가장 큰 벽이기도 하다.
‘내일’루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담서의 멘탈 케어인데, 그러한 멘탈 케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결국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율과 치에키의 존재.
그래서 율과 치에키가 객사하거나 암살당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점이 생기는데.
왜 ‘석산’루트와 ‘이야기’루트에서는 불거지지 않던 문제가 유독 ‘내일’루트에서만 부각될까?
우선 앞선 두 가지 루트와 뒤에 한 가지루트의 차이점을 인지해야한다.
앞선 두 루트의 특징이 뭘까?
담서가 활동을 한다는 것? 아니다, 헷갈리기 쉽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담서가 그 뜻을 굳혔는지 아니면 아직 망설이는지.
상황에 따라서 ‘내일’루트에서도 충분히 담서를 앞세우고 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 지금 내가 그러고 있잖아?
‘석산’에서 담서는 그 의지를 부숴버린 채로 그저 자신의 남은 삶을 연료삼아 복수와 증오를 불태우며 북서지부의 재앙으로서 강림한 뒤, 자신에게 주어질 최후를 기다리고, 그저 고고하게 그 끝을 받아들인다.
‘이야기’에서 담서는 이미 자신의 끝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닥쳐오는 고민과 후회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할애하지 않고, 스스로가 안배해놓은 미래를 향해 담담히 걸어 나간다.
하지만 ‘내일’에서의 담서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하여 고민하고, 고뇌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때문에 그 과정에서 설득을 실패하면 이제 바로 ‘이야기’루트로 확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에 악영향이 미치지않도록 담서를 앞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담서가 고민을 하고 망설이며 정신적 성장을 하는 것이 어째서 치에키와 율의 위험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이 부분은 앞서 이야기한 패배자들에게 그 이유가 있다.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욕심만은 존재하는 이들.
OO라는 세계관으로 인해 잊어버리기 쉽지만, 가장 인간이라는생물의 카테고리에 어울리는 존재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이 대체적으로그렇듯, 그들은 조금씩 활동을 시작하고 조심스럽게 하루를 살아가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거 잘하면 내가 치에키나 율의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그치?”
“무…무슨 말인지…저는 잘…”
“율의 자리가 만만하기는 하지? 특히 참모라는 위치는 조직이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빛이 나는 건데, 지금까지의 앙귀스는 그 빛을 발하기에는 너무나도무력하고 무의미한 조직이었으니까?”
“무언가… 오해가…! 그래!, 오해가 있는 것이…아닌지…”
“치에키도사실 그래, 약자는 도태되는 세상에서 당장 오늘 살려도 내일 다시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는 이들을 신경 쓰는 것 보다는 당장 도움이 되는 이들에게 집중을 할애하는 것이 좋을 진데. 그치?”
“…”
“왜 대답이 없어? 뭐 상관없나?, 아무튼 너희에게는 굉장히 불만이 클 거야? 그치? 능력도 없어 보이는 사내가 조직을 주무르는 것도, 자신의 가진바 재능을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는 낭비하는 사람도.”
그 목에 들이댄 화살촉을 더 가까이 붙이며, 눈을 마주치고, 귓가에 속삭인다.
“내가, 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라던가?”
얇고 길게, 붉은 색 실선이 그려지고.
“3번 거리에 7번 블록, 그 옆에 8번 블록, 4번 거리에 2번 블록과 9번 블록, 6번 거리에 2번 4번 5번 블록, 8번 거리에 8번 11번 블록, 9번 거리에 14번 15번 블록, 10번 11번 13번 15번 17번 거리. 1번 2번 4번 5번 8번 9번12번 14번 15번 17번 18번 19번 23번 24번 27번 블록까지.”
그 실선이 맥까지 이어지는 순간, 그 움직임을 멈춘다.
“이들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해?
담서가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희망이 보여? 신분상승할 기회가 느껴져?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저 각오가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정리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식량과 식수를 위해 노력할 것 같아?
과연 담서 옆에서 비위만 맞추면서 하루하루 어린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으로 한 세력의 참모란 자리를 따낼 수 있을까?
그녀의 이능은 과연 환자들이 병세를 돌보고 그 하루하루에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에 어울리는 이능이며, 그 행동만으로 그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매일 담서의 옆에서 웃으며 광대놀음을 하고 있는 내가, 너희들의 생각만큼 착하고 멍청한 사람일까?”
나의 세상, 한국에서는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단다.
그동안 죽어나간 율이, 치에키가, 그리고 담서의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과연 정말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니?
푸슉!
짧은 파육음.
세상은 악의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고, 아름다움의 뒤에는 항상 추악함이 그 배로 가득하다.
“모두 두 걸음씩 양보하면 훨씬 평화로워질 텐데, 왜 한 걸음씩 더 가고 싶어 할까, 먼저 죽을 뿐인데.”
한심한 인간들.
이제 담서에게 가야겠다. 너무 늦으면 불안해하니까.
그전에 한명만 더 죽이고.
***
뭐, 그렇지 북서지부에 희망에 가득찬 올바른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시뮬레이션의 기반을 마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라는 생물은 기본적으로 그러하니까.
하지만 에모몽이라면 무력으로 두들겨서 안 되는 것은 힘으로 해결한다는 마인드로 미래를 열어낼 것이라고생각했는데, 오랜 시간동안 쌓아올린 지난 회차는 이날을 위한정보를 쌓아오는 기간이었나?
혹시 나의 강의를 가장 열심히 들은 것은 에모몽이 아니었을까?
매번 자신의 회차를 통 채로 갈아 넣으며 변수를 확인하고, 경우의 수를 지워가며, 범인을 색출했다.
그리고 그동안 갈고 닦았던 그 이빨과 발톱은 주어진 최고의 기회를 활용해 먹잇감의 숨통을 조였고, 그 단말마를 귀에 담았다.
그리고 아직 맹수의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에서 하이에나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순간까지.
이정도면 뭐, 에몽이는 적어도 앙귀스에 대해서는 졸업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네.
그럼 이제 이 쪽지를 어쩌면 좋을까?
[조팽이 다음 회차 예약 비어있나요?]
[비어 있으면 저랑 좀 놀아줘요.]
으으음.
뭐, 일주일 후면 이제 시간도 많아질 테니 그때 가서 생각하자, 조팽이는 어차피 회차도 길게 가져가야하니까, 고민할 시간도 많겠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며 지금은 에몽이의 방송이나 되돌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