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082 - 태양이 눈부신 이들을 위한 이야기
선이란 무엇이고, 정의와 대의란 무엇일까.
선과 정의는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대의 앞에선 선과 정의는 그 의미가 퇴색되고 순위가 밀려나가는데 그럼 모두가 염원하는 대의라는 명분만 있다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일까.
결국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다가 숨구멍이 2개가 된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녀석이 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한번쯤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
어차피 우두머리급인 녀석이 튀어나온 점이나,
게다가 그 녀석을 죽여 버린 것까지 생각하면,
오늘은 더 할일이 없을 것 같아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고, 그 결과 아직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담서야 순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치에키는 어디를 갔는지 고요한 집이 나를 반겼고, 그래서 그런지 잡념이 많아지는 시간.
녀석이 한 말을 조용히 되새기고 있었다.
응? 집? 뭐, 앙귀스는 내 집이야, 지금부터 앙귀스를 향한 공격은 나를 향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처신 잘하도록.
아무튼, 평상시라면 아직 앙귀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란과 이벤트에 끌려다니고,
치에키와 율의 경계를 허물고 매일 같이 담서의 얼굴을 보기위해 잠입도 좀 하고,
그러다가 이번에는 웃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회심의 개그가 생각나면 갔다가 참패를 당하는 시간을 보냈겠지만,
에베베 덕분에 이번 회차는 전체적으로 진행이 굉장히 빠르다.
다만, 시간이 엄청나게 당겨졌기 때문에 큰 틀은 비슷하더라도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 주의하라는 말도 들었고, 무엇보다 큰 틀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난 아직 해피엔딩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틀이 뭔지도 모르니 약간 초조할 뿐.
아무리 NPC들이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해도, 추억과 시간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일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든 일이니까, 특히 NPC들이 좀 지나치게 사람 같아서 그런가? 데이터라고 치부하며 살리고 죽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라고.
때문에 평소라면 늦은 밤 홀로 방에서 잠들기 전까지 생각을 정리하며 계획을 짜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오늘은 졸지에 유독 조용한 나만의 시간을 받게 되었고, 그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하는 생각이 진짜 정말 진또배기인데, 그러고 있으면 우리 에보협 회원들이 왜 자동진행은 안 걸고 잠을 OO에서 자냐고 극성이라서 제대로 계획을 정리하기 힘 들기도 하고.
미인은 잠이 많은 것인데 그걸 이해를 못해주네.
본래라면 지금쯤 앙귀스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온 신경이 몰려있을 타이밍이다.
매 회차마다 항상 일어나는 습격사건으로 인해 보급되는 식량의 양이 큰 폭으로 줄었고,
거기에 박차를 가하듯 30%확률 정도로 일어나는 마약소동으로 인해 올해 북서지부 내에서 자급되던 식량의 양마저 줄어들 것을 암시한다.
비록, 당장은 영향이 없더라도 넓지 않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사람들은 알음알음 알게 되고, 그 인식은 안 그래도 냉혹한 인심을 더욱 차갑고 딱딱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외벽에 걸쳐서 삶을 이어가는 앙귀스에게는 더욱 큰 여파를 가져온다.
공권력에게 버려진 감염자들, 그리고 그 감염자들을 내치지 못해 따라온 가족들.
반락세력에게 멸시받는 중립파들, 거기에 더해 의지는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패배자들.
심지어 일반시민들마저 꺼리는 하층민들.
그것이 현재 앙귀스의 위치다.
때문에 풍년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고, 흉년은 언제나 우리를 가혹하게 몰아붙인다.
축제는 항상 우리와 멀고, 참사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거친다.
올해도, 이번 회차도 그럴 예정이었고 그로 인해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에서 앙귀스 내의 입지다지기, 앙귀스의 위상 되찾기, 담서 케어하기, 율복치 살리기, 치에키 지키기 등 많은 일정에 휘말려야 했지만.
산맥을 나와바리 삼아서 어슬렁거리던 살움근이 한 줌의 흙이 되었고, 항상 골칫거리였던 전갈라이더는 선인장의 비료가 되었다.
담서는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칩거를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그 여파로 지옥독수리는 때 아닌 최후를 맞았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돌고 돌아 현재의 앙귀스는 나름의 풍요와 일시적인 여유를 되찾았고, 그런 상황은 언제나 가장 큰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율과 치에키의 심신 또한 안정적으로 바꿔놓았다.
확실히 언제나 무리를 하며 뒤를 돌아보지 못하던 율은 뒤를 돌아보고 상황을 냉철하게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율을 위해 앞을 보기보다는 뒤를 바라보며 제자리에 굳어있던 치에키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그 발걸음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자비심을 품을 생각은 없지만. 내 손에 묻은 앙귀스의 피가 그라티아의 피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없고 함께 발을 내딛어야 한다는 말에 의지를 잃은 패배자들이 앙귀스를 떠났다.’
라는 변명을 그들은 과연 믿은 것일까, 믿어준 것일까.
선은 언제나 멀고, 유약하며, 덧없으니, 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떠한가, 나의 좁은 마음에는 자리가 많지 않았고, 그 적은 자리는 사람 셋을 받아들이기도 벅찬 것을.
결심하고 행한 지난 일에 잡아먹힐 정도로 연약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선사한 평화가 부디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기를 바랄 뿐이며, 내가 던진 돌이 그들의 안녕을 부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 그들의 행복에 나의 자리가 있기를.
…
이제 상황을 정리하자.
우선 변화한 것.
담서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 발걸음은 작고, 보폭은 좁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나아가고 있다.
여전히 변수는 많고, 무너지기도 쉬워 위태롭지만, 이젠 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당장은.
율 역시 여유를 찾았다.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고 짐을 나눠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생각을 곱씹을 수 있는 율은믿음직한 동행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앙귀스의 정치적 행보나 잘 알지도 못하는 세력구도의 변화에 내가 신경을 할당할 필요는 없겠지.
그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까지는 나의 할 일을해도 될 거야.
치에키는 반대로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생겼다.
본래라면 내실만을 신경 쓰며 앙귀스에 틀어박혀야했을 인물인데.
매일같이 순찰을 도는 나와 담서로 인해 그녀의 행동 범위도 넓어졌고, 그녀 본인 또한 제자리에 서있기보다는 함께 걷고 싶어 한다.
더는 앙귀스의 영역 내에서 자신을 혹사하고 홀로 속을 썩이며 스스로를 죽여 가던 치에키는 없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그녀에게도 앙귀스에게도 좋은 변화이며, 그런 긍정적인 변화를 부술 변수들은 적어도 내가 알고 대응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조리 치워버렸지만.
그 외의 앙귀스의 일원들 또한 모두 크고 작은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우선 당연하게도 앙귀스의 가장 큰 별 담서가 행동을 시작했고,
담수와 뜻을 함께했고 담서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그들에게 이 사실은 굉장히 큰 의미를 선사했다.
거기에 나머지 두 별들 또한 긍정적인 변화를 가졌고,
항상 분위기를 침체시키던 속칭 패배자들 또한 사라졌으며,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한 신입들도 늘어났으니,
당장 어색해하거나 의문을 느끼는 이들도 이내 변화를 받아들이겠지.
이제 외부의 변화.
단순히 사건이 앞당겨지기만 한 것이라면, 그라티아는 이제 조용해야져야 정상이다.
담서라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으니, 그저 그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 자신들의 앞에서 터지지 않기를 바라며,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기 위해 힘을 비축하기 시작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선 폭탄을 안정적으로 파라디수스에 돌리기 위한 밑 작업이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아니지 시도조차 못했으니까.
그런데 웬일인지 앙귀스에 미친 망나니 하나가 자신들에게 적의까지 표출한다.
지금까지는 그냥 ‘적의를 표출하니까 앙귀스 쪽은 피해서 교전을 이어가자’였다면,
내일부터는 ‘전쟁을 걸어왔는데 어떻게 할까 이대로 파라디수스와 앙귀스 양쪽에게 두들겨 맞을 수는 없는데’로 바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까지는 폭탄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터진다는 최악을 막기 위해 일주일간 50명 언저리의 단원이뚫려 죽는 것을 방치했다.
근데 오늘 나름 중요한 인물로 추정되는 이의 모가지로 퍼펙트골드를 기록하고 왔는데, 내일부터는 어떨지 모르겠네.
그리고 파라디수스…, 여기는 정말 모르겠다. 우호적인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적대하는 곳도 아니니까.
이미 망해버린 세계에 국가의 틀조차 제대로 남아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북서지부에 한정된 지식만이 허락된 유저가 판단할 일은 아니겠지.
오케이 여기까지 더 고민해도 답은 안 나올 것 같고, 느린 가속으로 걸어놓은 자동진행도 슬슬 목표점에 도달했다.
별다른 알림도 없었던 것을 보니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였나 보다.
본래라면 또 파인애플바나나곱창이 나있어야 할 채팅창도, 듣기를 꺼놔서 무슨 일이 있는지 까지는 모르지만 에베베가 알아서 진행을 해줬는지 평화롭다.
어? 방송 날로 먹는 거 아니냐고? 쉿!
***
저녁식사를 앞둔 시간.
오늘도 담서에게 앙탈을 부리다가 믿음직한 언니로의 길에서 두 걸음 멀어지고 말았고,
치에키에게 칭얼거리다가 또 다시 두 걸음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율의 신뢰도도 3정도 떨어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을 못 써먹을 사람으로 만드는 마성의 여인, 치에키가 나쁜 거야!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닌 듯함.
“그래서 내일은…”
“…오늘 산맥에서…”
“아니 글쎄…”
소란스럽고 한가한 식탁.
율, 치에키, 담서 그리고 나.
고개를 돌리면 마찬가지로 웃고 떠들며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고, 식사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오늘 나선 순찰에서 다친 이들도 있지만, 부상은 단지 대화의 소재일 뿐 비극의 시작점이 되지 않는다.
치에키와 함께 약재를 채집하러간 이들과, 환자들의 병세를 돌본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죽음은 이제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아직 세상은 우리에게 모질고, 여전히 우리는 볕 아래에 서는 것을 꺼린다. 모두에게 따스한 햇빛조차도 우리에겐 삶을 좀먹는 재앙이다.
그래도 이제 아침을 두려워하며 낮 동안 실내에서 떨다가 어둠이 내려앉고 해가하늘을 떠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눈을 감던 나날에 끝을 고했다.
이들에겐 내일이 있고, 밝은 빛이 두렵다면 그늘의 아래에서 활동하면 된다. 나는, 우리는 충분히 이들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다.
***
“그럼 담서는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것도 없는 거야?”
“식사라는 행위는 삶을 연장하기 위한 활동에 불과했으니까요. 그 후에도 취향에 따른 선택보다는 상황에 따라 제한된 선택지를 고르는 행동이었고”
“아쉽다. 난 바나나를 좋아해!”
바나나가 들어간 우유, 초코시럽을 뿌린 바나나, 바나나로 만든 디저트 등등. 바나나라면 뭐든지 좋다. 생각해보니 디저트 같은 호화로운 음식이 OO에 남아있을까?
뭐? 익힌 바나나? 바나나는 말이야 불에 닿는 순간 바나나가 아니게 돼.
“어렸을 때, 아주 많이 어렸을 때, 바나나크림으로 만들어진 케이크를 먹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맛은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있었나보다.
“어렸을 때라면, 오빠를 만나기 전?”
“네, 유독 그 시절의 기억은 더 명확하네요, 매일 변하지 않는 시간, 하루가 가는지 이틀이 가는지조차 모르고, 낮에 잠 들었는지 밤에 잠 들었는지 며칠을 잠 들었는지 마저 모르던 시절인데”
“뭐,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안 좋은 기억은 뇌에 더 깊게 각인되고, 좋은 추억은 항상 그 느낌만을 남기고 풍화되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좋은 추억이 더 중요한 거야,
세상에 아무리 좋은 추억도 사람에게 있어서 100% 좋은 추억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찾기 힘 들거든?
그래서 그 좋은 추억을 미화하고 아름답게 가꿔서 좋게 남기는 거야.
잊고자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잊지 못하고 꾸준히 뇌리에 각인되는 기억과는 다르게,
항상 마음속에 있으면서 지치고 피곤할 때마다 불현듯 생각나서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담서도, 너무 힘들어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제 아무리 좋은 추억마저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다보면, 아집이 되고 망집이 되어 옭아매게 되거든. 당장 잊혀 진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떠오르지 않는다고 더 이상 네 마음속에서 떠난 것도 아니니까”
“…”
“아직 어려운가? 괜찮아! 시간은 많고, 인생은 길고, 공교롭게도 우리는 병마나 사고로 죽기에는지나치게 건강하니 그 삶을 온전히 누리기충분할 거야!, 자자! 그럼 오늘의 순찰은 여기까지! 이 언니는 이 앞에 볼일이 있으니까 우리 동생은 우리 큰 언니한테 이것 좀 전해주시겠어요? 겸사겸사 집에 가서 바나나를 구해놓도록!”
“네? 아? 어어?”
당황하는 담서의 등을 떠밀어 앙귀스로 돌려보낸다.
어둠이 걷히고, 하늘을 덮던 진혼제의 흐린 연기가 그 불꽃과 함께 화창하게 사라진 어느 맑은 봄날.
언제나 상냥한 치에키와 항상 똑 부러지는 율, 그리고 아직 여리지만 굳센 담서까지, 완벽한 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날에 너희들과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준다면 세상이 더욱 아름다웠을 텐데 말이야”
***
자신만의 세계에 정신이 팔린 에모몽을 대신에 방송을 진행하고 있자니 그날 에모몽이 넣어준 현금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바뀌었다.
오늘 들어온 후원 다 내가 받아도 전혀 지장 없는 것 아닌가?
갑자기 킹받네?
아무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현재 상황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일어나지 않을 일, 그리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고, 내가 진행했던 회차를 포함한 다른 회차와의 차별점들을 이야기하며 시청자들과 시간을 소비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에모몽이 삽질하는 것도 구경하다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음, 거물이 나왔네? 순덕이 방에서 봤을 수도 있고, 못 봤을 수도 있는데, 잘 봐둬 쟤가 바로 더치야.”
그라티아의 전쟁무새.
아키야를 제외한 권력 서열 2위.
[뒷세계의 무기상인 더치 그리즈]
본래라면 파라디수스와의 교전 중에 지치고 깎여나갈 때쯤,
소강상태에 진입한 전장을 뒤집어엎으며 난입하여 양쪽의 대가리를 동시에 꺾고,
그 후 중재에 들어가 협상테이블에 앉혀놓는 것으로 조우해야했을 그라티아의 핵심 인물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지금 이곳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