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083 - 태양이 눈부신 이들을 위한 이야기
기백이 넘어 보이는 수.
보기 드문 통일된 복장.
하나로 뭉쳐진 적의.
그들은 그렇게 내 앞에 섰다.
강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빠르고,
쉽게 쓰러지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 더욱 빛난다.
그런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엇이 있을까.
수로 찍어 누른다면 답이 될까?
그 사람의 세상은 수의 폭력이 절대적이 않은 장소였다.
그 사람보다 강한 이를 불러오면 가능할까?
그들에게 그런 강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략을 짜고 함정을 파서 유인하면 어떠할까?
허나 그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했고,
과정은 너무나 멀어 손이 닿지 않음에,
빠른 결과를 추구해야했다.
수의 폭력도, 질의 우위도, 그를 뒤집을 두뇌도 사용할 수 없기에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어 들었다.
본디 전장이란 비겁을 논할 자리가 아니고, 역사는 승자에게 손을 드니,
필사적인 이들에게 윤리란 분명 손이 닿지 않는 것이리라.
***
담서의 1~2번이면 모조리 이승을 하직할 이들이지만, 그 아이에게 아직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담서는 기감에 관련된 이능은 없었고, 그에 비해나는 이능의 힘을빌리지 않아도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시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담서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뜨려놓는 것도 성공했고, 그 후 이들을 따돌리는 것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 제 3자의 시점에서 에모몽이라는 유저의 장점과 단점을 생각해보자.
장점으로는 극단적일 정도의 근력과 민첩, 그리고 활에 대한 실력.
특히 한계를 뚫고 97에 도달한근력과 만개한 피안의 시너지는 어지간한 2티어 고넴과도 화력승부를 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공격력을 가지고 있고,
높은 수치의 민첩과 궁수라는 특성상 잘만 배분하면 부족할 일이 없는 지구력은 낮은 내구를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더해 시야범위와 동체시력에 특화된 이능과 체질은 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위협이 되기도 충분하며,
이 몸에 깃든 산수유라는 체질은 피안의 반발력과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위기를 극복고도 남아넘치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 아직 빛을 발한적은 없지만 집중광까지 제 역할을 다한다면, 전장에서 에모몽이라는 인물은 적들에게는 최악의 변수가 될 것이고, 아군에게는 언제나 6이 나오는 주사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단점은 무엇일까?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그 절대값이 높지 않은 내구력과 결국 손에 쥔 무장이 활이라는 것.
높은 민첩은 생존을 위한 기재지, 신체의 내구력을 보정해주는 요소가 아니다. 육체의 강도를 맞부딪히는 순간이 온다면 필시 깨지고 만다.
산수유 또한 그러하다. 깨어진 그 육신을 억지로 붙잡고 그 황혼을 이어가기 위한 기재일 뿐.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들고 있는 무장이 활이며, 보유한 이능마저 단점을 도외시하고 장점을 극대화한 이능이라면,
필연적으로 다수에게 둘러싸인 지금 같은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 다시 없을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냉정하게 생각하면 기회 자체를 주지 말았어야 했던 것인데, 아는 만큼 대처할 수 있고 상정하지 못한 변수는 언제나 밑바닥을 갱신한다고, 내가 너무 안일했네.
우선 그라티아의 파라디수스 2차 보급습격은 유저의 간섭이 없으면 무조건 그라티아의 승리이며, 그들은 거기서 얻어낸 이득과 사기를 바탕으로 불리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간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유저의 간섭이 없다면 사공이 많은 배는 산으로 간다고, 전체를 휘어잡을 리더가 없는 그들은 지난 두 번의 습격으로 얻어낸 우세를 조금씩 잃게 된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단순히 생각한다면 야심이 있는 이가 기회를 노려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모두를 휘어잡거나,
혹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후자면 좋으련만, 그라티아도 병신들의 소굴이 아니니 인재 하나쯤은 있었고, 아마 지난 회차의 기억이 맞다면 저 앞에 검은 올백머리의 남자가 그 중심이겠지.
이 가정이 참이라는 전제하에 나오는 두 번째 문제.
지난 2주일간 잃은 구심점을 휘어잡으며, 산으로 가는 배의 선장 자리에 당당하게 앉은 것은 좋은데,
그 후의 1주일동안 내가 벌인 사건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어버렸네?
기세를 잃고 추락하던 조직의 새로운 리더. 그러나 조직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그에게 닥친 위기.
본래라면 위기를 극복하며 그 기회를 잡아 맡은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하필 그 리더가 북서지부의 처형자.
제 아무리 2세대의 인물이 처형자의 위용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건드려서 손득이 같이 발생하는 존재와 손해가 득을 아득히 넘어서는 존재는 구분할 줄 알았으니.
리더의 자리를 따낸 그의 첫행보는 조직의 일원들을 버리고 흔들리는 평판을 어떻게든 유지하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었으리라.
그런 시간이 무려 일주일. 안 그래도 슬슬 무너지려는 입지가 불안한데, 기어코 사고가났으니, 주요간부의 사망.
어느 정도로 중요한 간부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전의 회차에서 하나의 세력을 이끌던 모습도 보았고,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이의 오른팔노릇을 하는 것도 보았으니 그저그런 시정잡배는 아니었을 터.
결국 나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강까지 몰아넣었고, 그 결과 그들은 나락을 등지고 그 칼을 뽑았다.
허나 제대로 벼려지지 않은 검으로 바위를 친들 승산이 생길 리없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강수를 두었는데…
“아, 붉은 선인장은 조금 과하지 않나?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한거야~ 진짜로”
무려 율과 치에키를 영원히 재울 때마다 등장한 주역배우님을 섭외하는 것.
극광석의 기운은 진짜대충 표현하면 방사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자연 발생하는 방사능이라,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튼, OO의 인류는 그러한 방사능에 적응한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로 나뉘고,
앙귀스는 외벽에 걸쳐서 생활하는 이들.
적응을 끝마친 이들이 대다수이며, 그 외에는 모두 적응에 실패한 감염자들이다.
방사능에 적응했다고 독극물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식물의 독성이라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재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OO의 야생식물과동물들은 제대로 정제하지 않은 기운을 독성으로 삼아 방어기재로서 활용한다.
따라서 북서지부에서 구할 수 있는 독극물의 독효는 대체적으로 극광의 기운을 기반으로 작동하고,
이는 솔직히 이능력자들의 생명활동에 큰 지장을 입히지 못한다.
그냥 약간의 디버프가 걸리는 정도의 수준?
“근데 이건 아니지, 공기가 빨갛게 변하는 게 말이 되냐?”
물론 약간의 디버프로 부족하다면 존나 많이 쌓으면 된다.
약간의 디버프도 한 100중첩쯤 되면 강력한 디버프가 될 테니.
***
“정말 이를 악물며 달려드는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단점 하나 추가.
산수유는 잃은 것을 되찾아주지는 못한다.
사람의 눈이 한 쌍인 이유는 원근감과 입체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 신체 능력은 충분해도 실수는 계속 늘어나기만을 반복한다.
본래라면 일반 잡졸들은 스탯의 차이가 압도적이라서 그 공격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겠지만,
개중에는 민첩이라는 스탯의 효용성을 저하시키는 유도계열을 비롯한 이능도 있었고,
거기에 인근의 대기를 통 채로 붉게 물들인 붉은 선인장의 독연도 그러한 상황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본래의 민첩 수치에도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변화한 민첩 수치역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첫 격돌에서 너무나도 큰 손해를 입고 말았다.
아니, 하나 더 있네.
어차피 배수의 진을 펼 거라면 거창하게 피자는 마인드로.
시작과 동시에 승부수를 던지는 녀석들의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솔직히 질만한 싸움이었네?
물론 그래도 쉽게 죽어줄 수는 없다.
다들 한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지금 내가 플레이하는 게임을 떠나면 유저가 사라진 게임은,
그 속에 남겨질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어떻게 될까?
그래서 종종 창작만화로도 나오잖아, 평생 함께하자고 했으면서 떠나버리고 마는,
수없이많은 사령관, 지휘관, 제독, 함장, 기사 등의 플레이어를 붙잡는 만화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데이터일 뿐이며, 모두 개발자들이 심어놓은 데이터일 뿐이고,
그저 알고리즘에 등록된 대사를 토해낼 뿐이더라고 웃어넘기는 이들도있고,
아무리 데이터라고 해도 그러한 연출과 대사에 발목이 잡혀 애정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이들도 있겠지?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나 좀! 놔줬으면 좋겠는데!?”
때문에 결과창 보고 새로 시작 버튼 누르면 되는 게임이라고 해서, 쉽게 죽어줄 수는 없다.
“야! 거머리들아! 알아서 피해라! 나도 이거 실전에서 처음 쏘니까!”
검은 활대.
그 촉은 없으며, 깃도 존재하지 않고, 오늬도 그저 활대에 홈을 파놓은형태의 기묘한 형태.
그 무게마저 무겁고, 촉도 깃도 없으니 멀쩡히 날아갈 리가 없는 화살.
‘생각 없이 쏘면 큰일 나는 물건을, 너처럼 생각이 없는 아이에게 넘기려니 너무나도 불안하구나.’
피안과 쌍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특이한 화살이며,
담수가 만든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무려 담서가 직접 새로 만들어준 화살.
‘피안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을 때, 극광을 담아서 그 시위를 끝까지 당겨.’
왼손을 통해 전해진 그 기운이 활대를 타고 흘러 궁현을 울린다.
키이-잉
날카로운 찰현음을 내며 떨리는 시위.
화살을 걸고 오른손에 힘을 주자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장력이 오른팔에 감기고,
마치 나의 의사를 묻는 듯 신체의 감각이 떠오른다.
‘네 발. 피안이 제 주인을 죽이는데 소모한 화살의 개수다. 녀석은 네 발을 쏘고 죽었다.’
전신을 휘감는 본능의 경고를 뒤로하고 시위를 당긴다.
피안마저 비명을 지르는 만작.
‘담서가 만든 화살이니 담수가 만든 것보다 배는 위험할 거다.’
그렇게 시위를 떠나고 화살이 비명을 지르고, 살의 비명에 맞춰 대기가 떨린다.
대기의 떨림에 맞춰 지면을 뒤덮은 극광이 공명하고, 대기를 가득채운 선인장의 독소역시 공명한다.
‘참고로 그 녀석은 극광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시야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외통수네, 원래는 이 타이밍에 저 정도의 병력이 모이지 않는데, 에몽이가 사람을 좀 많이 쏘고 다니기는 했지?”
내 방에는 후원자체가 막혀있으니, 오늘이 기회랍시고 끝나지 않는 영겁의 영상후원을 구경하다가,
눈앞에 일어난 큰 사건에 드디어 무한의 클립이 멈추고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한 시청자들.
본디 인간은 공통된 목표가생기면 뭉치기 쉽고, 그것이 공공의 적이라면 더더욱 쉽게 뭉친다.
때문에 지금 그라티아는 유래 없이 빠른 타이밍에 대단결을 이뤄냈고,
그라티아답지 않은 추진력과 실행력으로 병력을 끌어 모아서 빠르게 집결.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에모몽을 마무리하기 위해 보급마저 줄이고 온갖 소모품을 챙겨서,
조우와 동시에 바로 승부수를 띄웠다.
“물론, 감안해도 상상 이상으로 많은 병력을 끌어 모았지만.”
-에바
-에모몽 죽냐?
-크으 에모몽 죽냐?
-에자 가냐? 에자 가냐?
-죽으면 또 얼굴 뭉개면서 동서남북으로 울부짖겠지? 벌써 화나네
-또굿판이냐? 에반데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는지, 작은 견제만을 행하면서 민첩을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
하지만 붉은 선인장의 효과를 명확하게 모르는 건지 대처가 안일했고, 조금씩 잔상처가 늘어만 간다.
어떻게든 치명상이나 신체의 결손만은 피하면서 살을 내어주며 퇴로를 확보해 나가는데…
“아, 저건 크다.”
공간을 장악하는 것에만 재능이 몰려 평소 전장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반고넴 염력 능력자와,
본래라면 더치에게 합류할 정도의 과격파는 아님에도 상황이 상황이라 힘을 합치고 있는 인챈터의 합작.
7방향에서 동시에 쇄도하는 폭발물이 그녀의 근처에 이르러 허공에서 폭파하고,
그 파편은 끝끝내 그녀의 한쪽 눈을 앗아갔다.
-앗...
-앗! 에크스! 눈이!
-괜찮다 아직 메인카메라는 하나 남아있어!
-메인카메라밖에 없는데 하나 날아갔으면 50%가 날아간 거 아니냐?
그래도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며 퇴로를 찾는다.
그러나 퇴로는 보이지 않고, 이내 눈을 감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에모몽.
“솔직히 아쉽네, 역대급 성장치였는데,나와서 개지랄할 것 같으니까 미리 런해있…저게 왜 여기서 나와?”
-저게 뭔데
-해설이면 해설답게 놀라지 말고 설명을 해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세 가지나 됨?
-왜 시발 한 가지도 안 알려주냐 개새끼야?
-야발년아 시작도 안하고 끊으면 안 되지
역전(疫箭)
명중한 지역의 주변에 있는 인물은 물론, 사용자마저 극광병에 물들게 한다 하여 전염병 화살이라는 악명을 가진 화살.
심지어 그 화살의 성능은 어지간한 이능력자들도 가리지 않고역병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정도로 강력한데.
“저거, 분명 한발밖에 안 남았는데? 그걸줬…, 아? 한발이 아니네?”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진짜로? 담서가 역전을 만들어서 줄 정도로 신뢰를 하고 있다고?
“아, 에모몽, 출세했네.”
피안의 현이 날카롭게 울리며 한 발.
피안의 활대가 격렬하게 떨리며 두 발.
입에 머금은 검은 피를 뱉어내며 세 발.
이능력자를 감염시킬 정도의 극광의 기운이 발산된다면, 그 여파만으로도 어중간한 사람은 갈아버리기에 충분하다.
그 여파로 퇴로는 활짝 열렸지만,
담서가 만든 화살이라 원본보다 파괴력도 반발력도 높았는지,
세 발만으로 이미 몸 상태가 걸레짝이 되어버린 에모몽.
“퇴로를 연 것은 좋은데 저렇게 돼서야 도망은 칠 수 있나 모르겠네….”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맞지만, 그래봐야 생존율이 한 자릿수에서 10%대로 올라왔을 뿐,
거기에 상태를 보니 살아나가도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더더욱 위태롭기도 하고.
“아쉽지만 이번 회차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뭐지? 나 때는 게임 이렇게 극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는데…? 사실 OO는 굉장히 쉬운 게임이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