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088 - 야! 너 OO ㅈ밥이잖아!
아키야 세미라스.
그녀는 세미라스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아키야’라는 이름과 ‘세미라스’라는 성이 공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구분하고는 한다.
과거에 잡아먹힌 사람이 있다.
과거에 잡아먹히고, 자신에게 삼켜진 사람이 있다.
세상에 대한 멸시와 증오를 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육신을 태우며,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피폐하고 안타까운 ‘사람’
‘아키야’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
목표에 잡아먹히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삼는 인간이 있다.
삶에 대한 고충과 고민을 내려놓고,
원망과 증오를 딛고 일어나,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밝고 명랑한 ‘인간’
‘세미라스’
때문에 같은 존재였을 터인 둘은 전혀 다른 존재로 나뉘어 살아가며,
구태여 언급하지 않고 그라티아의 루트도 진행하지 않는다면, ‘세미라스’인 채로 게임을 마치게 된다.
돌려서 말하면 조금의 계기만으로도 ‘세미라스’를 재우고, ‘아키야’를 깨우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녀정도 되는 능력자가 정말로 능력이 부족해서 목적을 이루지 않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뭐라고 표현할까? 언젠가 해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도, 시도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인간은 고민하듯이, 그녀 또한 고민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때문에 ‘아키야’를 깨운다는 행위는, 그 계기가 크던 작던 그녀가 행동할 계기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런 그녀의 정신이 제정신일리가 없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5인방을 늘어놨을 때, 가장 정상인의 반열에 든다는 사실이 북서지부의 진정한 어두운 면이라고 본다.
그런 시한폭탄의 기폭장치가 걸어 다니는 곳이, 바로 이곳 북서지부다.
그리고 그 기폭장치가 왜 내 눈앞에 있냐?
-주인장 빨리 문 열어!
-갤주야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그냥 하자, 되돌릴 수 없어도
-갤주 바뀜
-설마 에자냐?
-에모몽이랑 주모몽이랑 희라랑 접전이었는데 희라가 됐음
-솔직히 주모몽은 모를까 에모몽은 좀 선 넘기는 해
-괜찮아! 그래도 우리의 영원한 갤주는 너니까!
-엣? 와타시?
-쳐내
그래, 결국 고민해도 회차를 버릴 것도 아니니 플레이를 해야한다.
진정하자. 난 당장 세미라스를 묻어버리고 아키야를 폭주시킬 수 있다.
고로 난 NPC를 지배할 수 있다. 난 신이다.
그런 지나간 고민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여전히 화목한 대화를 이어가는 셋.
밀레가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키야를 데려왔는지, 아니면 무언가 의심의 싹을 심고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후자라면, 저 화목한 대화에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은 첸 한명 뿐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첸이 또 하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 속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내려갔는지도 모른 채로 해맑게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니 내가 나쁜 사람 같기도 하고.
동시에 어쩌다가 저런 인물이 한 조직의 수장이 되었는지가 궁금하기도 한데,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 내게 불똥이 튀었다.
“아, 이쪽은 에드베레 씨에요! 아귈라 분이신데, 저희가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희를 도와주고 계신답니다!”
“아~하, 잘 부탁드려요.”
저 눈동자. 찍혔다.
막 이상한 정신병자처럼 묘사했고, 실제로 정신병자냐고 묻는다면, 21세기 현실의 지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정신병자가 맞다’ 생각하지만, 딱히 그녀가 해리성 정체성 장애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올바른 대상을 향해 표출하기 위해서 명백한 선을 긋고, 그 판결을 내리는 존재로서 제3자가 아닌 침착한 상태의 자신을 골랐을 뿐.
즉, ‘세미라스’와 그녀의 안쪽에 ‘숨어있는 음습하고 끈적한 자아 아키야’가 아닌, ‘아키야’가 자신의 감정을 벼리고 다듬으면 ‘그걸 숨기는 칼집이 세미라스’다.
때문에 방금 전 순간적으로 그 빛을 잃고 그저 조용히 자신이라는 기준에 나를 담아놓는 듯한, 그 눈동자는 아귈라 소속의 에드베레라는 인물을 판단잣대에 올려놓고, 그 판결을 유예한 뒤 지켜보겠다는 일종의 그녀만의 의식이다.
그리고 나에게 죄인의 낙인이 찍힌다면 세미라스가 눈을 감는 날, 아키야가 내게 찾아오겠지.
어? 별일 없으면 세미라스인 채로 회차가 끝나는 거 아니냐고?
이 시발, 리베르타스 얘들 하는 꼬락서니랑 첸이 말하는 꼬라지 보면 별일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이거 분명히 비석에 가면 특성에도 새로운 거 하나 생겨있을 걸? 유독 검은 그림자였나?
특성에는 위치 추적 장치, 체질에는 원격 조작 폭탄.
그저.
대단하다!
달! 조! 평!
***
딱히 싸움을 걸러온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면면들의 등장에 탐색을 왔을 뿐이니, 가벼운 인사와 북서지부의 인프라 소개를 마친 그녀는 밀레의 배웅을 사양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밀레에게는 고유 능력이 없었는지 나와 밀레의 몸에는 아키야 나름의 표식이 생겼겠지만, 이정도면 그래도 그라티아의 시한폭탄에게 얼굴도장을 찍은 것 치고는 무난한 소득이다.
처음 보는 세력과 처음보는 아귈라의 집배원, 게다가 그들이 한 행동은 번거로운 괴물들 처치와 뒷골목의 싸움 중재, 아마 정말로 뭐하는 존재들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만 구경하러 왔나보다.
그렇게 10초전까지 생각했다.
“이상한…냄새를 붙이고 다니네?”
조용히 해.
“밀레도, 에벱이도?”
가만히 있어.
“흐-응, 어디서 밴 걸까?”
그러지 마.
“에잇! 왜 이렇게 짙게 밴 거야! 지우기 힘들게!”
금호 이 나쁜 녀석! 그러지 마!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런 전조도 감지되지 않았지만, 지금 필시 아키야의 경계도가 50%는 올랐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서지부에서 아키야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 있는 이는 단 둘, 시엘라와 유이 뿐이었는데.
지금 그 존재가 늘었다.
그 존재가 어떤 능력과 효과인지를 명백하게 인지하고 대응을 한 것인지, 혹은 그냥 이상을 느끼고 치운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경계가 더 크겠지.
후자라면 그냥 준비해둬서 나쁠 것이 없다는 마인드로, 전자라면 미리 준비해 두기를 잘했다는 마인드로.
그래, 차라리 이 여우새끼랑 아키야랑 직접적으로 조우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
그렇게 정말로 다행히도 한동안 별다른 사건이나 사고 없이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일요일을 온전히 갈아 넣고도 마지막 출근이 될 현실의 일주일을 갈아 넣는 동안, 별다른 사건 없이 OO의 일주일도 흘러간 것이다.
어떻게든 손에 꼽을만한 사건을 찾아보자면,
교전 발생률이 기존의 10%가량까지 떨어진, 파라디수스와 그라티아의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를 2번 정도 더 뒤집어엎었고,
생각 없이 앙귀스에 떡을 돌리러 갔다가 담서의 얼굴도 구경하지 못하고 쫓겨난 금호가 투덜거렸으며,
내가 눈물의 똥꼬쇼를 하며 흘린 정보 덕에 페칸스에 대한 정보를 인지했다.
일주일간 일어난 일이 고작 이거뿐이냐고 물어오면 할 말이야 없지만, 사건이 적은 것과는 별개로 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굉장히 혹독한 시간을 보냈노라고 말하고 싶다.
일단 크고 작은 필넴을 4마리나 잡았다.
금호와 은호의 버스가 있었다고는 해도, 나올 때까지 인디언기우제를 올리며 사냥을 하다가, 나오면 그제 서야 필넴을 토벌하는 행동은 굉장히 정신력의 소모가 큰일이다.
그러니 이거뿐이냐는 말 보다는, 가혹한 생활 사이클 속에서도 이만큼이나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냐고, 가슴 따뜻한 한마디를 던져주면 좋겠다.
“자, 오늘은 너희도 알다시피 기쁘고 행복한 날이다. 무려 내가 무직백수가 되는 날이지.”
-마.참.내
-이제 정말로 밤샘해 주는 거지?
-와! 하루 24시간 갤주방송!
-이제 너도 우리와 같은 백수구나!
그래, 그동안의 고충을 모두 털어 낼만한 큰 행사.
백수가 되었다.
생각보다 생각 없이 보낸 세월이 길었는데, 거기에 홀로생활을 하다 보니 돈 나갈 구석이 많지는 않아서 쌓인 돈도 꽤 된다.
거기에나름 영상채널의 수입도 조금씩 쌓이고 있는 편이고, 순덕이와 에자가 나눠준 수익금도 좀 된다.
특히 심심하면 대리방송을 짬 때리던 에자가 던져준 금액은 나름 양심이 있는 액수여서,
‘진짜 이정도면 1년은 쌩으로 놀아재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그 시간동안 때려친 본업을 좀 더 갈고 닦아서 ‘인맥 빨로 영상 편집자의 길을 걸어 볼까?’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지만 당장은 자유를 만끽하자.
“일단 백수기념으로 방종한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희랑 같은 백수는 아니지.”
-시발년아~ 욕을 처먹고 싶으면 욕을 해달라고 해~
-개새끼가 요즘 에자랑 어울리더니 에자한테 물들었냐?
-속보)에자 지금 애로우시뮬레이터 중
-보우 시뮬도 아니고 애로우 시뮬은 뭠이 대체?
-몰라 시발 화살 깎던데
-미치겠네 진짜아침에 고각사격으로 화살이 점지하는 지뢰찾기할 때 역겨워서 나왔는데
-확실히 그래도 에자보다는 갤주가 선녀다
“진짜 놀랍네, 아무튼 방종은 진짜다. 오늘은 할 일이 좀 있거든. 그냥 현실 친구들한테는 이미 다 이야기 했고, 기념으로 놀러 간다. 너희들한테도 그냥 말해주려고 잠깐 왔던 거야. 그럼 진짜 안-”
-? 시발 진짜 감?
-아 씨발년아~
-좆같은 새끼...! 좆같은 새끼...!!
-내가 또 인싸들의 유희에 당했구나
-기만, 도주, 말조차 끝까지 안함
-트리플 크라운;
***
오늘은 리베르타스의 페칸스 탐방일이다.
채팅창은 꺼놓았다. 뒷감당을 하기 귀찮더라고.
아무튼 오늘이 지나면, 노바투스라는 짐작조차할 수 없는 변수를 제외한,모든 세력과 접점이 생기는 날이고, 그 말은 곧 슬슬 사건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할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이 북서지부의 여제가 잠적한 곳인가요?”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첸.
“굉장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걸?”
“여제라 칭할만한 존재가 머무르는 것 같기는 하네.”
그 뒤를 쫄랑거리며 따라붙는 금호와 느긋하면서도 분명하게 주변을 살피는 은호.
“놀랍네요…집단의 힘이든, 개인의 힘이든…아니 개인의 힘일 수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분명히 앞서 걷는 셋과 다르게, 유일하게 고유능력을 보유하지 않은 밀레만이, 페칸스의 이상성을 눈치 채고 있었다.
조직의 리더 (리더쉽 없음, 경계심 없음)
조직의 행동대장 및 최고전력으로 추정되는 인물1 (생각 없음, 경계심 없음)
위와 동일한 인물2 (의지 없음, 경계심 없음)
머리 좋은 최약체 (희망의 등불)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