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090 - 당신만이 우리의 희망입 / 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직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이 폭탄은 이미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다.
분명 금호가 나와 밀레에게 붙은 도청 및 감시기능이 달린 위치추적 장치를 부숴줬고, 게다가 그 후로도 아키야와 조우도 없었으며, 금호나 은호의 추가적인 언급도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필시 그림자가 새로 붙었거나 하는 이유로 첸과의 대화가 유출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림자가 확실히 지워졌는지 비석에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뭐! 나도 비석 존버할 거야!
거기에 첸과 단 둘만이 있는 순간이 아니면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거기로 연결이 될 만한 화제도 던진 적이 없으며, 나는 물론 첸 또한 그러한 이야기를 어딘가에 흘리거나 실수로라도 발설한 적도 없다.
비록 첫 만남에서 말도 안 되게 체스를 지고 있었고, 그 후에 북서지부에 대한 설명을 하는 와중에도 부족한 이해력을 보여줘서 신뢰도가 많이 낮아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단지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뒤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변수를 가정해 상황을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런 첸이 북서지부의 근간을 뒤흔들 가능성이 내용의 추론이나 정보를 섣부르게 흘리고 다닐 리가 없잖아?
없겠지?
아무튼 그럼 필연적으로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나갔거나, 아니면 아키야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했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인데.
아키야… 시발 아키야의 능력이 정확하게 뭐지?
뭐? 모르냐고? 몰라.
도감에 적힌 그녀의 능력은 여타 고유능력들이 그러하고, 일부 체질이 그러하며, 대부분의 특성이 그러하듯, 그 설명이 명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다.
정확하게는 ‘플레이어가 직접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항목’만이 명확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상황이나 NPC 등 다른 것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그 설명이 애매하고.
이유는 글쎄? 굳이 따지자면 유저에게 보정이 붙는 항목은 유저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요소이며, 그렇지 않은 요소들은 개발자들이 설계한 세계가 가진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움브라’를 획득하는 경우 무조건 아키야에게 전수받아야 하고, 그 경우 100% 확률로 아키야가 눈앞에 있으니, 활용법이나 전투적인 부분이나 유틸적인 부분은 아키야에게 전수를 받는 일이 많지만, 그것마저도 완벽하게 다루기가 쉽지 않아서 결국 그 외의 부분은 제대로 생각을 한 적도 없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게다가 고유능력을 전수받는 시점이면 작중에서도 어지간해서는 후반부니까, 시간적 여유도 모자라지.
물론 그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고 조건만 만족하면 에모몽이 진행한 담서의 테마처럼, 아키야의 테마도 사전달성을 통해 엔딩 기점을 자신이 임의로 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움브라’를 활용할 수 있고 다룰 수 있지만 내가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 끝이라면 적어도 도감에 적힌 ‘움브라’의 설명이 [자신에게 세상을 새기고, 세상에게 자신을 섞는다. 세상과 섞이지만 자신을 잃고, 자신을 칠하여 세상으로 물 든다.] 따위일 리가 없겠지?
실제로 아키야의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인 시엘라의 ‘님부스’는 상반되는 느낌의 설명을 가지고 있고, 플레이어인 나는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NPC인 둘은 서로가 서로의 대척이라는 점은 물론, 둘의 싸움은 승패에 무관하게 절대적인 양쪽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 확언한다.
그 말은 단순히 전투적으로 상성이 반반이거나 전력이 비슷해서 양패구상을 한다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늘어놓은 추론을 기반으로 생각했을 때, 아키야의 이능이 단순히 북서지부에 눈과 귀를 흩어놓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으며, 전투에서 역시 그림자로 변해 그 형태를 잃고 자유자재로 이동하고 변신하며 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번 회차의 아키야는 그러한 그녀의 능력을 모종의 방법으로 활용한 결과 스스로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사출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하아니 시발 이걸 어떻게 예상하고 대처하라고?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존나 시발 전혀 괜찮지 않다.
“뭐, 이거만 배달하면 되기는 하는데, 어쩐 일로?”
“그냥 차라도 한잔 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오래 보관하면 향이 날아가서 맛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아깝잖아요?”
그래봤자 목숨보다 아깝겠냐?
“그럼 이사하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다같이 마시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 근데 거기에는 시엘라가 있는데.
“그러면 저야 더 좋지만, 그러기에는 제 시간이 또 넉넉하지 않아서요. 혹시 이사가 끝났나요?”
“과연. 그렇다면 아쉽지만 힘들겠네요. 아마 아직 한창 이삿짐을 나르는 중 일겁니다.”
나이스! 감사합니다! 제아무리 큰 불행 중에도 다행인 점이 하나쯤은 있다고, 그 행운이 여기서 터지는 것은 아쉽지만 안 터지는 일도 다반사인 북서지부에서 행운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어디냐!
“그러니, 바쁘지 않다면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나요?”
조울증에 걸릴 것 같이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나락으로 떨어져서 조마조마하다가 죽음을 직감하고 포기한 뒤, 바로 구원의 동아줄에 기뻐하고 이어서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고작 7개의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말이야.
***
“들어오세요. 편하신 곳에 앉으셔도 좋답니다.”
편한 곳? 그럼 저기 밖으로 나가서 좀 걸으면 파라디수스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앞 벤치는 어떤가요? 깔끔하고 경치도 좋은데.
“조용한 분위기네요. 여기에 사시는 건가요?”
물론 입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기 때문에 적당한 자리에 앉으며 속으로만 삭힌다.
“북서거리에 가까운 건물치고는 괜찮죠? 구매한 건물이냐고 물으면 저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지만.”
조용히 웃으며 농담이라는 듯이 말을 건네 온다.
아키야의 거주지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부르는 방법은 쉽고 간단하지만,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가는 방법은 어려운 NPC.
그런 주제에 불러내면 죽을 가능성이 높고 못해도 아키야 루트는 버려야하며, 후자는 정말 북서지부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한다.
개가튼련…!
후, 아니지 진정하자. 감정이 격해지면 이후의 상황에 악영향을 줄 뿐이야…! 진정해!
잠시 뒤, 조용히 건네지는 찻잔. 확실히 향은 굉장히 좋다.
독을 포한한 무언가 약물이 들었을 확률도 지극히 낮다.
정확하게는 체력에 영향을 받는 계열의 약품은 아키야가 사용할 이유가 없고.
적응에 영향을 받는 계열의 약품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조평이는 적응밖에 없는 괴물이니까.
그러니 괜히 망설이지 말고 들이키는 것이 이롭다.
“정말 좋은 차네요. 제가 차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굉장히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이어서 찾아오는 정적.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그저 고민.
만에 하나 아키야가 정신줄을 내던져도 날 여기서 죽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내가 죽을 걱정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이 고민이라는 뜻은, 이곳에 오기 전 마주했던 그 표정이 진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북서지부를 부술 예정인데, 아직 마지막 한 조각이 모자라서 실행을 못하고 있으며, 그 한 조각을 내가 쥐고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끄집어낼지에 대한 고민.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지만, ‘플레이어가 아닌 나’는 세미라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고 건넬 말도 없다.
그러니 그녀가 나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는 물론, 어떤 생각으로 지금 나를 쳐다보는지 또한 몰라야 정상이다.
때문에 이 편찮은 고요는 계속되고, 그 적막이 방안을 가득 채울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첸씨와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긍정적인 경우의 수와 부정적인 경우의 수가 있다면, 긍정적인 경우의 수.
그녀의 반응을 보건데 미래가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다는 뜻이고, 대처를 잘 한다면 리베르타스가 쥔 패에 따라서 광폭의 참치소환까지도 막을 수 있다.
“음, 보다시피 아귈라의 소속이니까요. 아귈라에 취직한 계기부터 말씀드려야할 것 같은데-”
거짓은 섞지 않되 납득이 갈만한 각색은 곁들인다.
난 그저 유실물을 주워서 아귈라에 반납하는 길에 취직이 하고 싶어졌고, 우연히 마주친 선배가 안쓰러워서 후임을 자처했다.
“저런 근데 그 선배 분, 아직 아귈라에서 혹사당하시던데…”
“아, 역시 그런가요? 어쩐지 이즐씨…아니지 소장님이네요. 소장님이 얼핏 흘리시는 말을 들으니 그럴 것 같기는 했어요. 그나저나 분명 집배원인데 아귈라에 있는 시간보다 리베르타스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 호칭이 잘 입에 붙지 않네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취직한지 얼마 되지 않음을 어필하며 다음 화제를 유도한다.
“아귈라에 취직하셨는데, 리베르타스에 있는 시간이 더 기신 건가요?”
“전담인원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특히나 리베르타스는 한창 바쁠 타이밍이 지나서 여유로운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차피 자주 얼굴 볼 사이기도 해서 친해질 겸 눌러 붙었죠.”
공감할 수 있는 전후 상황을 제시하며 무해함을 어필하여 시간을 벌고.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오만 잡일을 도맡아하기도 하고, 보금자리가 위험한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이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괴수들을 잡기도 했지만, 나름 좋은 추억이었어요.”
리베르타스의 행보도 설명을 해서 그들의 목적을 이해시킨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살던 곳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끼리 뭉쳐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
과하지 않을 만큼 정에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파악할 수 없다. 이 정신이상자는 정보를 파악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추론을 마친 뒤,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린 순간부터 비로소 감정을 할당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대화중에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는 모습은 볼 수 없거든.
그것이 ‘아키야’라는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한 이후의 ‘세미라스’라는 가면이 가진 역할이기도 하고.
정신병자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고? 누가? 내가? 진짜? 그럴 리 없다.
“아, 생각보다 빨리 마셔버렸네요. 보통 차는 향을 음미하는 것이지 맛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좋은 차라서 그런지 희미하게 단맛도 도는 것이 금방 다 마셔버렸어요.”
이건 진심이다. 인공적인 단맛이 아닌 자연의 단맛이 나더라. 놀랍다!
물론 살짝 속도를 내서 마신 것도 맞다. 존나 도망치고 싶어서.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굉장히 알찬 삶을 보내고 계시네요. 에드베레 씨는.”
여전히 표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판단은 보류인가?
이건 부정적인 경우의 수다.
판단을 보류할 만큼 중요한 내용의 대회를 한 것도 아닌데, 판단이 유보되었다.
돌려서 말하면 앞서 내린 판단을 돌릴 정도의 내용이 오고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의 루트를 통틀어 아무리 미치고 눈이 돌아버린 아키야를 만들어내도, 북서지부의 일반인에게 큰 위험이 갈만한 일을 쉽게 벌이지는 않았는데, 인간에게 절대 정을 주지 않을 것 같던 그녀지만 사실은 측근의 유무가 정신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렇게 되었네요. 솔직히 귀찮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번 협상은 실패다.
그래도 도화선을 앞당기는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으니, 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
그녀가 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어디까지 알아내고 무엇을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았고 긍정적인 반응도 한번 뽑아냈으니까, 도화선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
“다음에는 모두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네요.”
“네, 그럼 다음번에 또.”
다음? 믿는다? 믿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