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5화 〉094 - 피로 세운 도시, 죽음으로 세운 기둥. (95/99)



〈 95화 〉094 - 피로 세운 도시, 죽음으로 세운 기둥.

사실 비가 오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한 일이다.

어차피 아키야가 그림자를 있는 힘껏 뻗어서 북서지부 전체를덮을 정도로 이능을 발휘하고 있는데, 시엘라가 이능을 발동시키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안개가 조금씩 피어오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
상대가 이미 전심전력인 상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돌입해야하지 않겠어?

다만 그와 별개로 조금  미리 이능을 발휘했거나 조금 더 나중에 이능을 발휘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마치 지금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것처럼 타이밍을 노려서 이능에 시동을 걸지 말고.

아무튼 그림자에 뒤덮여 검게 물든 북서지부에 검은 빗물이 내리기 시작했고, 아직 색을 머금지 않은 안개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이쪽도 진입할 준비는 끝났다고 봐도 좋다.

입성.

3년 전 그날 파라디수스를 떠나던 이 둘은 이런 일을 계기로 다시 북서지부에 발을 들이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녀들은 어떤 기분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그녀들이 버리고 와버린 유실물을 어떤 생각으로 마주할까?
잡념이 뇌를 가득 채우고.

콰르르륵-!

그 잡념은 기둥이 무너지는 것을 본 순간 사라졌다.
어…벌써 정화기둥에 대한 판단이 완전히 끝난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완벽하게 인지하고 실행에 옮긴 건가?
전자든 후자든 벌써 파라디수스가 뚫리고 정화기둥을 내줬다는 사실은 예상한 부분이 아닌데.
루미나는 어디서  하고 있…

콰-앙!

“미친년. 주인을 잃고 꼬리 내린 개가 아니라, 생각을 포기하고 흘러가는 고목이었나요?”

담서야?
아키야 저 여편네 앙귀스를 어떻게 구워 삶은 거야?
왜일까 유독 최근에 담서 vs 루미나의 구도를 많이 보는  같은데.
거기에 살면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천수국을 쌩으로 휘두르는 담서를 연속으로 2번이나 보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원래 담서의 재주가 300대였던 것 같은데, 천수국과 금잔화를 직접 손으로 쥔 담서를 본 이후로, 도감에 기록된 담서의 재주가 500으로 뛰었다.
도감이 대상의 최고 컨디션과 최고 스탯을 기록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차이가 200?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담서님? 굳이 사복검을 쓰시는 이유가?
아니지. 재주 500의 담서를 재주 300으로 떨어뜨리는 조작 난이도를 가진 사복검이 굉장한 것 아닐까?

손에 쥔 천수국을 바닥에 꽂고 오른손에 쥔 사복검을 크게 휘두르며 왼손을 허리춤에 금잔화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런 담서를 향해 쏘아지는 루미ㄴ…어? 연두색 빛? 왜?

진짜 시바 놀라움의 연속이네.


대기를 울리는 이능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단 역류를 아니, 순환을 이용한 개지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평소보다 빠른 속도.

그런 루미나의 경로를 방해하며 뻗어지는 사복검.
늘어진 검신으로 그녀의 경로를 제한하고, 제한된 경로를 달리는 그녀의 시야를 방패로 가리며 창을 내리 꽂는다.

그런 방해를 그저 귀찮은 것을 받아 넘긴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사뿐히 발걸음을 옮기며 담서에게 쇄도한다.

오른손을 당기며 검신을 회수하고,  여파로 시끄러운 굉음과 강렬한 검풍이 휘몰아친다.

혀를 차며 몸을 감던 빛이 은빛으로 바뀐다.

잠시 뒤. 활로가 열리고 다시 연두색의 기운이 감기며 지금까지 보여준 속도와는 궤를 달리하며 쏘아지고, 그런 그녀를 향해 그 순간만을 노렸다는 듯이 금잔화를 뽑아 휘두르는 담서.

루미나의 고유능력이  예상과 달랐던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그녀의 체력은 평상시와 같을 것이고.
게다가 이미 담서는 왼손으로 휘두르는 검결을 통해 금강루미나를 긁어버린 전적도 있으니, 눈앞에서 또 소중한 고넴들이 서로 부딪혀서 터지겠구나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재차 굉음.

“여기까지 하지 않으련?”

그 미래는 다행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
“오랜만이네… 우리 잠꾸러기?”

희미하게 일그러지는 표정과 조금씩 가라앉는 분위기.
그녀들도 자신들의 재회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겠지.
이런 상황에서 루미나가 성능 좋은 시엘라의 억제기로 보인다면 감성이 메마른 것일까?
그저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촉 아니 삼촉즉발의 상황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회차에 대한 희망이 조금 생겼다.

다만, 여전히 비는 그칠줄을 몰랐고.
무너진 기둥은 낙원을 할퀴고 간 마수가 건재함을 알리고 있었으며.
안개는 서서히 색을 머금기 시작했다.



***

북서지부 최강 최악의 괴물이 중재를 했다고는 해도 어차피 괴물소굴.
제아무리 최강이어도 괴물  마리와 괴물 한 마리라고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지 감이 오지?
이곳은 최강은 최강이기 때문에 최강일 뿐, 전력에 차이 따위 최강의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당당한 말을 뱉을 만한 인재가 없다.
있나? 사실 모르겠네. 짐작할 뿐이야.
근데 적어도 도감에 실린 스탯의 기준으로 판단을 했을 때, 시엘라도 담서의 좌수 진심 금잔화나 천수국을 맞으면 반으로 갈라져서 죽지 않을까?

요는, 그 사이에 당당하게 끼어 들어서 싸움을 중재하기는 했어도, 담서를 막은 팔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졌고 루미나를 막은 팔은 으스러진 것이 아닌지 너덜너덜해졌다는 사실이지.
그런 그녀의 상태는 차치해두고 사이에 끼어 든 그녀의 과감한 행동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우선 그녀와 나름 친분이 있고,  친분이 자신의 오라비에게서 이어진 관계다보니 담서는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감정이 격해지고 시야가 좁아진 결과, 사이에 끼어드는 그녀를 발견하는 것이 늦어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팔이 잘려나가지 않고 갈가리 찢기는 선에서 멈춘 것이  증거이리라.
루미나야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조금, 진정했을까?”

그리 말하며 팔이 재생되는 것을 보니 위에서 말했던 최강자에 대한 역설이 갑자기 덧없게 느껴지지만, 재생이라는 것은 전투의 지속력을 나타내는 것이지 내구도의 총량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까. 넘어가자.

“우선 이야기를  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엘라는 날카로워진 눈으로 낙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의 복수를 행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고 서로 뜻을 굽히지 않았을 뿐.”
“파라디수스는 낙원의 성문을 지키는 마지막 첨병. 힘에 굴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 힘이 빠지는군.
근데 안개는 다 어디로 사라졌어.
유이님? 유이야?

“후, 담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줄래?”





담서에게 전해들은 아키야의 수작질…이라고는 부르기 애매모호하고, 아키야의 추측은 이러했다.
처음 보는 얼굴과 세력이 있어서 감시를 붙였다.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그림자가 잘려나가서 경계심을 키우고 있었는데, 잘려나간 기운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기묘한 이능의 흐름을 발견했고.
그것은 명백하게 불특정 다수의 인원이 정제한 것으로 보이는 극광의 기운.

그래도 한때 연구 소장이었던 이로서, 이정도 퍼즐이 주어진다면 짜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겠지.
평소라면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있으니 섣부르게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았겠지만.
여기까지 판이 준비된 이상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멍청한 수라고 판단했겠지.

따라서 안정적으로 주사위를 던지기 위해서 배제해야하는 수.
루미나.

담서를 끌어들여서 루미나를 배제하고, 강을 건넌 결과물이 지금 저 무너진 기둥.
그래도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것이 보인다.
가장 답답한 순간은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순간인데, 그래도 정리가 되어가고 있잖아?
이제 유이만 찾아서 마저 상황 정리를 끝마치면 완벽한데… 불길하게 안개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금호랑 은호도…보이지 않는다.

문득 고개를 돌려 첸을 봐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야에 들어온 첸의 안색은 마치 있어서는  되는 일을 들은 것처럼 파리했고.
그 옆에 자리한 밀레의 얼굴은 물론 에드윈을 비롯한 삼인방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은호는 항상 금호에게 너는 인간이라고 못박아준다. 그럼에도 금호는 자신은 여우이고 싶다고 한다.
그 대화는 마치, 은호는 여우라는 대화 같지 않아?

여우의 형상을 한 인간 금호와 인간의 형상을 한 여우 은호.
인간을 싫어하는 인간 금호와 그런 금호를 아끼는 여우 은호.

진짜 만약에, 인간에 악의에 맞아 죽음에 떨어진 이가, 인간이 아닌 것에게 구원을 받았다면,  사람은 인간으로 남고 싶을까?
OO의 이능은 불친절하다.
굉장히 많은 이능이 존재하는 세상이며, 같은 이능이어도 수없이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이능을 소지한 자의 원망과 갈망, 경험과 역사로 결정된다.
고유한 이능을 가질 정도로 강한 원망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를 바라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게 될 수 있을까?

금호는 인간을 보면  인간에 대한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파악할  있는지는 예측할  없지만, 명백하게 그녀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 그 뒤를 보고 있었다.
은호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금호가 홀로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은호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금호가 직접 말했고, 금호는 언제나 그런 은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둘은 서로를 이어주는 이능을 가지고 있었고, OO라는 세상에서 그러한 이능은 결코 평범한 방법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잔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무너진 잔재를 잔해라 부르건만, 그럼에도 잔해가 무너지는 소리라 부르기에 적합한 소리가 들렸다.

여우의 우는 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소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히 사람을 홀리는 소리였다.
가슴을 사무치게 긁어내리는 울음소리.
인간의 목으로는 흉내를 낼 수 없는, 심장을 향해 직접적으로 칼날을 박아 넣는 그런 울음소리.

그 울음소리에 맞춰 안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개는 어느새 북서지부를  채로 덮기 시작했고, 북서지부를 감싸던 그림자는 조용히 바닥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첸 뭐라고 말 좀 해봐. 금호는 어디 갔어? 은호는?”
“…”
“밀레 씨! 저거. 저 울음소리. 제 예상이 맞습니까?”
“…”

침묵은 때로 더 많은 것을 내포한다.
명백한 해답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안녕 내 반쪽? 난 지금부터 중앙으로 갈 거야.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그림자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안개는 세상을 덮기 시작할거야. 자신의 남은 정신을 모두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지천을 뒤덮은 안개는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그 영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상처받은 여우는 끊임없이 울기로 했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가 세상을 끝내는 순간까지.”

심장을, 그 벽을 긁어내어 달이는 듯한 울음만이 북서지부에 허락된 유일한 소음이었다.


~희망을 여는 여로~

* 테마 엔딩이 달성되었습니다.
* 이 후에 기록되는 서사는 후일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너도 그만 선택할 때가 왔어. 언제까지고 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넌 태생부터 황제였어, 세상에 군림할 황제.”

그러니까. 선택해야 해. ‘혼자 남는 황제’가 될 것인지. ‘혼자 남겨진 황제’가 될 것인지.

비가 거세지기 시작하고.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는 황제이라 칭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어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 등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기운이 존재했고.

그저 조용히 인상을 쓰고 있던 루미나는  뒤를 조용히 따라 붙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런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명 뿐 이었다고.

담서는 모르겠다.
생의 불꽃을 되찾지 못한 그녀가 다시 불을 피우기에 비는 거셌고,  폭풍에 휘둘리듯이 그저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마치 삶을 놓기 위한 준비를 하듯이.

“가자. 절친한 친우의 울음소리를 받으러.”

결연한 표정을 지은 첸은 그리 말하며 리베르타스를 이끌고 금호를…그리고 은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 솔직히 모르겠다.
우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뿐만이 확실한 지표.
다른 게 아니라 ‘떠오르는 나이트메어’ 이거 트리거가 올라갈 것 같아.
뭔가 몸이 무거워지고, 달아오르는 기분이 느껴져.

아마 내게도 정하라는 것이겠지. 나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할 것인지, 외부인답게 내려놓고 떠날 것인지.
그래. 북서지부  번 벗어나 보자.
내 손을 떠난 이야기지만, 본의는 아니더라도 내 손에서 시작된 이야기니까.






근데 분위기 깨서 미안하지만 희망을 여는 여로는 좀 아니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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