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프롤로그
모름지기, 백합이라 함은 순수한 백색을 탐구하는 자들이 추구하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때묻지 않은 하얀 꽃잎들이 비와 바람에도 그 순백의 고결함을 잃지 않고 서로를 의지해나가며 성장하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꽃봉오리를 활짝 피어내어 세상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때 밀려오는 진한 감동의 물결.
그것이 백합이며, 그것이 내가 이 장르를 추구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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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NE 작가님
한 편이 나올 때 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렸던 독자입니다.
작가님의 소설은 제게 있어 성서와도 같았습니다. 앙숙인 두 제국의 황녀가 아카데미에서 서로 만나는 모습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 직전의 카인과 아벨의 모습을 연상시켰으며, 그 둘이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며 등을 맞댈 때에는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쳐지는 듯 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습니다.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두 주인공, 메디아와 세리나 역시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습니다. 작가님의 혼신을 담은 필력으로부터 느껴지는 그들의 생동감은, 스크롤을 읽을 때 마다 향기로운 백합의 꽃내음이 넘실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
그런데 말입니다.
대체 왜 결말이 정략결혼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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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녀였던 두 사람은 이윽고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이제 어릴 적 노을 지는 언덕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은 모두 추억이 되었고, 그 때 품었던 감정은 머나먼 이야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말 없이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
그녀들이 품었던 사랑스러운 감정을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온전히 전해주기 위해서.
─그녀의 티아라에 경애를 完」
드르륵, 드르륵.
마우스 휠이 계속해서 돌아갔다. 아래에 무언가가 더 있을까 싶어 휠을 돌리기를 몇 분.
이럴 리 없다고 되뇌며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맨 끝의 한자 뿐이었다.
完.
이야기가 끝났다는 표시이며, 작가가 하고싶은 말이 모두 종료되었다는 메세지.
"······거짓말,이야······."
마침내 그 글자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만 진유을은, 쉰 목소리를 겨우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럴 순 없어······. 씨발, 오늘이 며칠이더라? 4월 1일······ 은 아닌데······."
아무리 부정해보아도 진유을 앞에 내려진 현실은 냉혹했다. 모니터에 표시된 글자의 나열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소설의 에필로그였다.
「그녀의 티아라에 경애를」, 줄여서 백합황녀.
백합황녀는 세리나와 메디아, 두 황녀가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다. 근래에 들어 별로 인기를 끌기 힘든 정통판타지에 가까운 서사였으나, 보는 이의 심장을 아리게 하는 감정선의 묘사와 숨막히는 작중 전개를 통해 백합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가히 성서로까지 여겨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그렇기에 진유을은 눈 앞에 펼쳐져있는 백합황녀의 에필로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진유을의 생각을 대변하듯 댓글창 또한 난리가 나 있었다. 격한 욕설을 내 뱉으며 내용 자체를 부정하는 댓글, 이건 베드엔딩이고 해피엔딩은 내일 또 올라올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리는 댓글, 실성이라도 한 듯 ㅋ자로 도배되어있는 댓글.
댓글의 공통점은 단 하나. 오늘 올라온 백합황녀의 에필로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진유을도 마찬가지였다. 백합황녀가 연재되었던 지난 3년간 그가 정주행한 횟수만 해도 80번. 재미있는 편을 골라서 본 횟수는 셀 수조차 없었기에, 진유을은 머리 속으로 백합황녀의 연표를 빈틈없이 채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백합황녀의 엔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략결혼.
에필로그에서 갑툭튀한 백작가의 똘마니와 정략결혼한 메디아가 공작가의 똘마니와 결혼한 세리나를 만나, 함께 옛 추억을 회상하며 노을을 바라본다는 충격적인 전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머리가 이해한다 해도, 가슴이 그 에필로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씨발, 씨발, 씨발······."
진유을은욕설을 내뱉으며 워드 프로세서를 켰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타닥타닥 글씨를 써 내려갔다.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 한 단락. 한 페이지.
진유을의 손가락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오탈자를 수정하기 위해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일 조차 없었다. 거의 소설 한 편 분량인 5782자를 쓰면서 진유을은 단 한번의 오타조차 내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님을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진유을은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으로 진유을이 써내려간 글은, 다름아닌 백합황녀의 작가에게 보내는 메세지였다.
백합황녀를 읽으며 느꼈던 즐거움을 시작으로, 어째서 정략결혼 엔딩이냐는 물음과, 캐릭터성에 맞지 않음을 강력히 표출하는 비판. 그리고 결말을 바꿔달라는 애원까지.
진유을이 에필로그를 읽고 느꼈던 모든 감정이 응축된 정수와도 같은 글이었다.
"하······."
글을 마친 진유을은 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 글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글쓰기와는 연이 없었던 그가 어떻게 이 장문의 글을 거침없이 써내려갔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유을은 이 글을 작가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삼년간 함께했던 백합황녀의 결말을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진유을은 타오르는 것 같은 입술을 짓이기며 쪽지보내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글을 작가에게 보냈다.
제발 내일 새로운 에필로그가 올라오기를.
오늘의 그 악몽을 그저 꿈으로 여길 수 있기를.
탈진한 진유을은 침대에 몸을 털썩 맡겼다.
그리고 백합황녀의 새로운 엔딩이 올라올 내일을 바라며 눈을 감았다.
"위즈 아가씨,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