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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1. 가정교육 (1) (2/86)



〈 2화 〉1. 가정교육 (1)

"오늘 오전에는 가정교육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조찬에 늦지 않도록 서두르시길."

밤색 나무로 만들어진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말에 벙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문 뒤의 기척은 이내 발걸음 소리를 내며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얼굴근육에 경련이 오며, 입이 볼썽사납게 벌어지고 말았다.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이불을 꼬옥 쥐었다. 거울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그야말로 명동에 떨어진 조선시대 선비와 판박이일 것이었다.

내 자취방은 아니었다. 본가에 있는 내 방도 아니었고, 애초에 이런 고풍스러운 방은 내 인생에 있어 발을 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반신을 덮고있는 이불은 금색 실로 한땀한땀 자수되어있는 고동색 비단 솜이불이었다. 침대의 매트리스 속에는 스프링이 아니라 솜이 들어가 있었고, 등허리를 받치고 있는 베개는 오리털 파카를 모아놓은 것 처럼 부드럽고 가벼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창문 틈으로 아침햇살이 들어왔다. 그 대부분을 붉은 커튼이 가리고 있어, 덕분에 은은하고 따뜻한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달아오른 빛에 물든 비단천이 나무로 되어있는 벽을  틈없이 휘감았다. 방의  켠에는 천장까지 닿는 목재 옷장이 고풍스러움을 내뿜고 있었으며 그 오른쪽 벽에는 한 소녀가 그려져 있는 유화가 걸려 있었다.

그 유화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침대 옆 책상에 놓여있는 작은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제서야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 모습을 보고 경악에 휩싸인 나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이 흘러내리며, 하늘색 눈동자는 길고 짙은 쌍꺼풀 아래에서 찬란히 빛난다. 가늘고 윤기나는 입술이 엷은 호선을 그리면 부드럽고 새하얀 피부가 더더욱 돋보이곤 한다.


입을 멍하니 벌리는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가지 흠이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귀여운 꼬마 아가씨의 모습이 거울에 담겨 있었다.

휙휙.


나는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울 속의 소녀 역시 내게로 손을 뻗었다.


왼손을 흔들었다.
소녀가 오른 손을 흔들었다.

오른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소녀가 왼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고개를 왼 쪽으로 까딱였다.
소녀가 고개를 오른 쪽으로 까딱였다.

"저거, 나야······?"

홀린듯 목소리를 내었다. 가늘고 높은,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핫 하고 목에 손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울대뼈가 거의 만져지지 않았다.


거울 속의 소녀는 나였다.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그런 결론 외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양 손을 올려 뺨을  번 쓰다듬었다. 거친 수염자국은 커녕 솜털조차 나지 않은 보드라운 볼살이 손바닥을간질였다.

그제서야 난 비로소 내가 이 소녀의 몸에 빙의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한참동안이나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문 앞에는 전의 인기척이 돌아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 저기, 그게······."

당황한 나머지 말을 흐리자 문 뒤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꽃무늬가 양각으로 장식된 목조 문이 똑똑 소리를 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위즈 아가씨."

문이 열리며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발목까지 덮는 길고 검은 드레스 위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장신의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설 속에서나 보던 메이드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고개를 숙인 메이드는 이내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게로 다가와 이불을 화악 걷어내었다.

"윽?!"
"가정교육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가씨."
"그게······."


뭐라도 설명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메이드는 이미 내게서 등을 돌린  옷장을 열어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아가씨께서그렇게 게으름을 부리시면 제가 주인님을 뵐 낯이 없어집니다."
"미, 미안해요."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 묘하게 혼나는 듯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침대 난간에 걸터앉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아무리 발을 뻗어도 땅에 닿지 않았다. 그닥 높아보이지도 않는데 발이 닿지를 않다니.  몸의 주인은 대체 몇 살인건가 싶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기위해 체중을 앞으로 쏟았다. 천천히 무게중심을 옮겨,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엉덩이가 침대에서 부드럽게 떨어지자, 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향해 무사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의복은 모두 챙겨놓았으니 세면실으로 가시지요."
"세면실이요?"
"가정교사님과의  대면입니다. 몸가짐을 단정히하는 건 스승을 대하는 기본중의 기본이구요."
"그, 그래요."

메이드의 따끔한 질책에 살짝 기가 죽은 채,나는 한 구석에 있는 슬리퍼에 발을 걸었다. 그러자 메이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맞잡았다. 메이드는 그런 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를 인도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대충 세안을  후, 나는 메이드가 준비한 의복을 입었다. 등 뒤의 단추는 메이드가 대신 잠궈주었다. 목 뒤까지 채워진 단추가 조금 갑갑했다.


"조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따라오시지요."
"아? 응, 어."
"······부디 가정교사분의 앞에서는 그런 맹한 모습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아가씨."
"그, 그래."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드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숨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 백합 만화를 보며 울던 나를 보는 어머니가 내쉬던 한숨과 비슷했던 것이다.
걱정 50%, 한심함 30%, 포기 20% 정도의 감정이 뒤섞여있는 한숨.
듣는 사람을 뜨끔하게 만드는 한숨이었다.

하여간,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식당은 굉장히 넓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커다랗기도 했다. 식탁보는 마치 새것처럼 하얬고, 스무 명은 함께 먹을 수 있을 법 한 긴 식탁의 중앙에 놓여있는 은촛대는 기름막에 비친 태양빛처럼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식탁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작은 책을 읽고 있었다.


"주인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메이드가 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은 채 목소리를 내자, 책을 읽던 남자는 책갈피를 책에 꽂은  식탁의  구석에 책을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갈색의 단정한 올백머리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짙푸른 눈동자. 아직 30대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 남자는 그 나이와는 다르게 굉장히 사려깊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 언제나 수고가 많구나, 앨리스."
"별 말씀을."

나를 이 곳까지 안내해준 메이드-이름이 앨리스였나보다-가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뒷걸음질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위즈, 자리에 앉거라."

숙련된 솜씨로 뒷걸음질 치는 앨리스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인자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의자에 앉으라는 듯 부드럽게 손짓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남자가 가리킨 자리의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조금 높아서, 앉기 위해선 살짝 뛰어야 했다.


남자가 그릇을 내밀어주었다. 따뜻한 수프와 빵조각 몇 개가 들어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포크를 들었다.


아무래도 내 눈 앞의 남자는 이 몸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던 앨리스가 이 남자를 주인님이라고 불렀으니 아마 확실할 테지.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았다. 딱딱하지도 않고, 강압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말로만 듣던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할까, 하여튼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래. 지난 밤에  일은 없었고?"

남자가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깜짝 놀라며 대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사실 어젯 밤에 잠을 설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말이 나락으로 떨어진 백합황녀 때문이었다. 어디인지도   없는 세계에서 백합황녀의 이야기를 꺼내어봤자 의미는 없겠지. 나는 어물적 고개를 끄덕이며 볼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아무래도 잠을 설친 모양이구나."

남자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덜컥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안 건가 싶었다.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을 할 무렵.


"그렇겠지. 네가 그토록 기대해왔던 하비셜 행이 눈앞까지 다가왔으니 말이야."
"네?"
"하지만 위즈. 기대하는 마음은 좋지만, 먼저 가정교사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하비셜은  아비의 손 바깥에 있는 곳이야. 현인께서 계신 만큼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하비셜에 다니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많단다. 알겠니, 위즈?"


남자가 확인하듯 내게 물음을 보내었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해져서, 질문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하비셜.
하비셜.

나는  이름을 안다.
너무나도  알고있다.

"그러니 밤잠을 설치는 건 오늘부턴 자제하려무나. 오늘부터 일주일동안은 가정교사님의 수업을  들어야 하니까 말이야. 앨리스도 네 교육을 보조한다고 하니 열심히 듣거라."

백합황녀의 무대이자, 주인공이 다니는 아카데미의 이름.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이며,  제국의 학생이 같은 교육을 받으며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기록의 도서관, 하비셜」.  이름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아버지."
"그래, 말해보려무나."
"가정교사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접객실에 계실거다. 로제가 간단한 식사를 대접하고 있을텐데─ 위, 위즈?!"
"다녀오겠습니다!!"


의자에서 폴짝 뛰어 다다다 식당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오전에 가정교육을 받는다고?
참을 수 없다.
밥을 먹을 시간 따위는 절대로 기다릴  없다.
한시라도 빨리 하비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이 세계가, 내가 그토록 바래왔던 세계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한다.

등 뒤에서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무작정 식당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먼지를 털어내고 있던 메이드에게 말을 걸어 접객실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다다다다다.
나풀거리는 치마가 거추장스러웠지만,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지나, 마침내 접객실에 도착한 나는 벌컥 문을 열었고─

"······위즈 아가씨?"
"아, 저 소녀인가요?"
"찾았어요······!"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있는 붉은 머리의 가정교사를 발견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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