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1. 가정교육 (3) (4/86)



〈 4화 〉1. 가정교육 (3)

백합황녀가 중반부로 달려갈 즈음, 나는  가지 상상을 해 본적이 있었다. 백합황녀의 세계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에 대한 상상.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상상이었다. 그러니, 백합황녀를 수도없이 읽었던 내가 그런 상상을 벌인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바다 위에 눈을 내리고,
하늘 위에 꽃을 피우고.


솟구치는 하늘호수의 물방울로 무지개를 그리고,
반짝이는 비취빛 사막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았던 두 소녀와 밤을 지새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소원에 생각이 미치면 이내 고개를 저어 머릿속을 비워내 버리곤 했다. 애초에 백합황녀는 소설 속의 이야기였거니와, 그런 상상은 설령 백합황녀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해도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소망이었다.


상상하는  만으로도 나 자신을 괴롭히는 소망.
백합소설에 남자가 난입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신념을 깨트리는 소망이었으니까.

그래. 백합에 남자는 난입해서는 안 된다.
백합장르에서 남자는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해야 한다. 백합장르에서 남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참교육을 받는 악역이어야 하고, 선역이더라도 주인공들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동성친구같은 포지션 이상이어서는 안된다. 하물며 백합을 꽃피워야 하는 두 주인공에게 말을 걸려고 집적대는 남캐라니, 그런 캐릭터는 하늘에서 만개의 낙뢰를 떨궈 불태운다 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

내가 남자인 이상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됐다. 백합황녀의  주인공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은 즐거웠으나,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를 제 삼자의 시선으로 상상해본 결과물은 그야말로 구역질이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의 상상은 항상 두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내야 했으며, 그 이상의 행동은 상상에서조차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래,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신념을 어기지 않으면서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열 다섯살 짜리 위즈 율릿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정도는 해 내야 해.


"아가씨, 다시 고르세요. 틀리셨습니다."
"윽. 또 틀렸어요?"


앨리스가 고개를 젓자, 나는 추욱 늘어지며 고개를떨구었다.


내가 있는 곳은 여성용 드레스룸. 의자에 앉아있는 내 앞에 펼쳐진 드레스는 도합 스무 벌을 넘어가고 있어, 그야말로 드레스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아가씨. 하비셜은 교육의 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래의 인재들과 만나며 사교를 쌓는 만남의 장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상황에 맞는 드레스 하나를 구별하지 못해 망신을 당한다면, 나중에 그걸 알게 되신 주인님께서 얼마나 얼굴을 붉히시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억울한 표정으로 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이틀 진행중인 앨리스의 교육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평소에 배웠던 기초지식들을  잊어버린 거냐며 경악하던 앨리스의 얼굴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하비셜에는 원칙적으로 고용인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따라가서 아가씨를 보조할 메이드가 없다는 소리예요. 아시겠어요?"
"하지만요, 구분이 안 가는걸요."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기본."


앨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양 손을 허리에 올렸다. 나 역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드레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공통점이 없는 드레스가 같은 종류였고,  봐도 비슷해보이는 드레스가 각각 파티용 드레스와 추모용 드레스였다.
사실 앨리스가 잘  알고있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해 보였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내기엔 앨리스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져 있었다.

저런 상태의 여자는 건들면 안된다. 그래, 여동생이 저런 얼굴을 지었을  개드립을 날렸다가 비오는 날에 먼지가 날릴 정도로 두들겨 맞았었지.

"아가씨, 집중하고 계신가요?"
"집중하겠습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앨리스의 수업을 다시금 경청해야 했다.




"······글쓰기 공부요?"


세 세트의 카드뭉치에 적힌 문자를  나는 기함하며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다. 각각의 카드뭉치에는 뭐가 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수직선과 수평선, 점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도형같은 문자였다.


"하비셜에서 사용되는 문자는 총 세 개입니다. 고대 기하 문자, 천지 상형 문자, 현대 마법 문자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 문자들을 모두 섭렵할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그 기초는 알아두어야 합니다. 특히 기하 문자는 바른 제국과 리베른 제국, 양 국의 공용 문자이니 만큼  배워두셔야 해요. 마법사를 지망하신다면 현대 마법문자도 필수구요. 아, 역사를 배우고 싶으시다면 천지 상형문자도 굉장히 중요하답니다."


프레데리카가 웃으며 카드뭉치를 늘어놓았다. 다른 소설에서는 고대 룬 문자가 사실 한글이었다던가, 뭐 그런 일이 수두룩한데, 내 눈 앞에 펼쳐져있는 글자는 도대체 이게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현대 마법 문자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색깔만 다를 뿐 문자라고는 부를 수 조차 없는 이상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이걸 배워야 돼요?"
"고대 기하문자를 익히는 건 쉬운 편이랍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3일이면 깨우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뭔가 세종대왕님이 하실 법  말인데.
나는 허망히 손을 늘어뜨리며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원하는 눈빛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프레데리카, 저는 알파벳도 가물가물한 사람이라구요······?"
"알파벳이 뭐죠?"
"으으윽·."


간절함이 담긴 시선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5일 후.

"흐헤헿, 헤헤······."


와, 마차다. 그런데 말이 없네? 그럼 마차가 아니라 뭐지? 에헤헿, 잘 모르겠다.

"······로웰 양. 우리 위즈가 비록 조금 모자란 아이긴 해도,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입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따님의 마법재능은 훌륭해보이니, 하비셜에서 반드시 멋진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을 거에요."
"말씀 감사합니다. ······후우. 위즈, 아비의  명심하거라. 하비셜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이니 위험을 항상 주의하라고 말이다."
"으헷, 헤헷? 아버지, 의상, 기쁜 일에 입는 예복!"
"그래. 우리 딸이 하비셜에 가는 날이니까. 다만  아비는 걱정이구나, 하비셜에서 네가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흐헷헤, 황녀님을 만난다, 황녀님이다."
"걱정이구나······."
"페르그 대초원의  까지는 제가  다독일테니, 부디 염려치 마세요."
"······예. 위즈를 잘 부탁드립니다."

프레데리카가 나를 마차로 데려가따. 에헿, 구름 모양이 기하문자처럼 생겼네에. 저건 에 자인가? 아닌가? 오 자인가? 에? 오? 에오? 에─오?


"율릿 양, 한숨 주무세요······."

기하문자 공부중에 프레데리카가 내 머리를 쓰다드머따.
졸리다.
에헤헤, 자야지.




"저, 저는 대체 무슨 짓을  거죠······?"
"다행이에요. 상태가 조금은 좋아진 것 같네요."

나는 마차 안에서 깨어났다.

잠들기 전에 내가 벌인 정신줄 놓은 기행이 생각난 탓에, 감히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지못하고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탄 마차에는 말이 없었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자동으로 바퀴가 움직이고 있었다. 원론적으로 보면 마차보다는 마법자동차라는 표현이 옳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말이 있든 없든 마차로 호칭하는 모양이었다. 아, 설마 마차(馬車)가 마차(馬車)가 아니고 마차(魔車)인건가? 오오,  논리적이었던  같은데! 이게 일주일 간 특훈을 받은 효과인건가?

"율릿 양. 표정이 이상해요."
"아, 네."

······정신 차리자. 아까처럼 정신줄을 또 놓으면 안 된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길을 달리는 마차는 흔들림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늑했다. 마차 안도 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명만이 타기엔 너무나도 넓었다.

마차의 앞쪽에서 마정석에 손을 얹고 있는 프레데리카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려요?"
"페르그 대초원의 초입지역까지는 대략 반 시간 정도가 남았군요."
"벌써요?"
"율릿 양은  시간동안 자고 있었으니까요."

그, 그런가요. 나는 볼을 긁적이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 보면 옆트임이 되어있는 드레스의 치마는 생각보다 움직이기 용이했다. 마법이라도 걸려있는건지, 아니면 재질이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몰라도 입지 않은 것 마냥 가볍기도 했고.

"페르그 대초원에서부터는 신입생들과 짝을 지어 이동하게 될 겁니다, 율릿 양."
"어, 헤어지는거에요? 하비셜에 끝까지 같이 가는거 아니었어요?"
"지금 당장은 헤어지겠지만······ 후후, 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있곘죠."

프레데리카가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동안 다사다난한 수업을 받으며 정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더욱이  세계에 빙의되고 나서  번째로 만난 사람이라 정을 많이 붙였던 것도 있어, 곧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율릿 양은 수월하게 온 편이랍니다. 율릿 양의 영지는 페르그 대초원과 거리가 가까운 편이니까요. 에스파다에서 페르그 대초원의초입지대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족히 걸린답니다."
"사, 사흘이요······?!"
"네. 뭐, 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면 닷새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우와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잘 정비되어있는 흙길은 마차 여덟 대가 동시에 지날 수 있어보일 정도로 넓직했다. 그런 도로를  혼자만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마차가 모여들었는데, 그들 모두가 하비셜에 다니는, 혹은 다니게  학생들이라는 점이  가슴을 괜히 설레게 만들었다.


분명 저들 중 어딘가에 세리나 황녀님이 계실것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괜히 콩닥거린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마차가 숲을 벗어나 넓은 초원과 마주했다.


여관이 빽빽히 늘어서있는 마을 뒤편으로,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초원.


그리고 초원의 한가운데에 마치 신기루처럼 거대하게 솟아올라있는대산(大山), 에르가.

하비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페르그 대초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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