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2. 로드 투 하비셜 (1) (5/86)



〈 5화 〉2. 로드 투 하비셜 (1)

고개를 들지 않아도 푸른 하늘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서만 볼 수 있었던 하늘이 땅을 삼키려는 듯 내려와 있었으며, 땅은 지평선을 사방에 그리며 하늘과 섞여들어갔다.

프레데리카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나는 그렇게밖에 묘사를  수가 없는 곳에 발을 딛었다. 여관이  늘어서 있는 마을은 초원의 입구에 톡 튀어나와있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광활한 초원의 지평선이하염없이 펼쳐져 있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풍경에 말문이 턱하고 막혀있는데, 프레데리카가 옆에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율릿 양은 운이 정말 좋네요."
"네?"
"에르가 산, 보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끝을 모르는  펼쳐져있는 초원의한복판에, 하늘을 받치기라도 하는 것 처럼 우뚝 서 있는 산이 보였다.
아랫부분은 지평선에 가려 전부 보이지조차 않는 거대한 산이었다. 지평선에 가려져있는데도 보일 정도라니, 얼마나 큰 산인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드넓고 평평한 초원 위에 우뚝 서 있는 산이어서 더욱 그랬다.

"대산 에르가를 맨 눈으로 본 이들은 페르그를 무사히 지나갈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에르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에르가 역시 우리를 지켜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에르가의 가호가 율릿 양과 함께할거에요. 프레데리카가 단아한 웃음을 지었다.



프레데리카와 헤어진 후, 나는 마차가 세워져 있는 광장 끝의 벼랑에서 홀린  초원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서는 먼지  톨조차 찾아볼  없었다.

도시의 황사와 매연으로 고통받던 나에게  광경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장엄하고, 웅장하게 다가왔다.

마을이 세워져 있는 언덕에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닥쳤다. 상쾌하면서도 춥지 않은 바람이었다. 이제 막 가을에 들어선 날씨여서 그런지 이대로 하염없이 페르그를 바라본다 해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풍경의 정취에 잠겨있던 내 귀를 삐걱이는 소리가 찔러대기 시작했다.

소음이 나는 곳을 돌아본 나는 익숙한 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색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낡은 마차. 바퀴는 헐거워 덜그럭거리며 굴러갔고, 기우뚱거리는 마차의 몸체에서는 끼익거리는 소음이 여과없이 들려왔다.


"······저게 마차야, 수레야?"
"알게 뭐람. 엮이지나 말자고."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저 마차의 주인이 듣는다면 굉장히 기분이 상할 말을 툭툭 내뱉는 사람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백작, 후작, 심지어는 공작가의 자제도 있었다고 하던가. 내가 타고  마차도 수수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차는 저게 마차인가 작은 저택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호사스러움의 극치라고 할까. 네 모서리에 크게 박힌 영롱한 보석과 도금이라도 해놓은 듯 한 반짝이는 외벽. 복잡한 무늬를 자랑하고 있는 창살까지.

그런 마차들의 틈에 끼어 삐걱이는 나무 마차는 벤츠 사이에 낀 마티즈처럼 처량해보였다. 그것도 지구를 백 바퀴정도는 달린   마티즈.

나는 삐걱이는 나무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이한 외양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그 곳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꽈당 소리를 내며 마차의 문이 열렸다. 윗쪽 경첩이 망가져 마차 문이 덜렁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허름한 후드를 덮어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키는 대충 170cm정도. 어지러운듯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뒤를 로브 입은 사람이 뒤따랐다. 그들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헤어졌다. 아무래도 로브를 입은 사람은 가정교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정교사와 헤어진.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비틀대며 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덕의 끝부분, 초원이 가장 잘 보이는 벼랑에 있던 나에게로 말이다.

"어, 어라?"


나는 발을 뒤로 빼며 당혹감이 점철된 목소리를 내었다. 본능적인 위험함을 느낀 건지 몸에서 이상신호가 마구 발생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고, 뺨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은 계속해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세 걸음,  걸음,  걸음─

그리고 나를 지나쳐,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은 벼랑 끝에 몸을 철푸덕 하고 쓰러뜨렸다.
그러더니  속을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우웩, 웨에엑─"


멀미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프레데리카가 '요즘 출시되는 고급 마차들은 진동방비 마법이 걸려 있어서 멀미가 잘 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프레데리카의 말을 뒤집어보면 고급이 아닌 마차는 진동 방지 마법이 걸려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렇게 끼익거리는 낡은 마차를 타고 왔으니 만큼 멀미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 등을 톡톡 쳐줬다. 움찔 하고 몸을 떨던 그 사람은 이내 내가 등을 두드리는 타이밍에 맞춰 속을 게워내었고, 그렇게 몇 분을 게워낸 끝에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고, 고맙다······."


후드 사이로 언뜻 보인 붉은 입술에서 부드럽고 상쾌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굉장히 정중한 말투였으나, 헛구역질을 하느라 기진맥진 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요?"
"아아, 그래.  정도는 거 아니다······ 우욱."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후드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다시 벼랑 끝에 엎어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내 등을 두드려 줄 수 있겠나─ 우웨에엑!"
"아, 알았어요."


통, 통.
외견나이 열 살의 소녀가 지닌 손은 말랑말랑했다, 그래서인지 후드녀의 등을 칠 때마다 고무망치를 톡톡 치는 듯 한 귀여운 소리가 들렸다.




"후우우우······."
"여기, 물이에요."
"미안하다. 받기만 하는구나."


내 마차 안에 있던 물통을 건네자, 후드녀가 후드를 벗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나는 후드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후줄근한 후드 아래에 숨어있던 얼굴은 그야말로 조각같았다. 후드 사이로 흘러내리는 비단결같은 금발 머리카락과 화사한 속눈썹, 그 아래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아이스블루 색의 눈동자.
온화한 눈썹 아래의 콧날은 뭉툭하지도 뾰족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잡티하나 없는 피부는 후줄근한 후드와 대비되어 오히려 더욱 깨끗해보였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는 붉은 입술에서 한 줄기의 이슬이 떨어지는 모습은, 화보를 찍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그대의 도움을 받았다. 은인의 이름은 가슴 속에 품어야 하는 법이지. 내가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물통에서 입을 뗀 후드녀는 머리카락을 후드 밖으로 빼내며 고개를 젖혔다. 하얀 목덜미가 태양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나는 그녀가 던진 질문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몇 초가 지나서야 허둥대며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저요?"
"그래.내 등을 두드려주고, 물을 가져다  그대의 이름 말이다."
"위, 위즈 율릿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위즈 율릿인가. 좋아, 기억했다. 은인으로서 기억해두도록 하지!"


후드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 만 같은 웃음이었다. 비록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은 낡고 헤진 후드였고, 앨리스에게서 배웠던 의복 예절은 단 한 군데도 지키지 않고 있는 엉터리 복장이었으나, 그녀는 내가 보았던그 어떤 사람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음,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후드녀가 물었다.

"그나저나, 그대는 왜 이곳에 있는가? 신입생으로 보이지는 않아. 혹시 하비셜에입학하는 가족을 배웅하러 온 건가?"


신입생으로 보이지 않는다라.
확실히 그랬다. 내가 봐도  다섯살이라기엔 무리가 있는 몸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신입생이었다.


"저도 신입생이에요!"
"풉······?!"

다시금 물통으로 목을 축이던 후드녀가 물을 작게 흘리며 사레라도 들린 듯 콜록거렸다.


"시, 실례했다. 설마 같은 나이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
"저도 제가  다섯살인게 신기하긴 해요."
"미안하다, 마음에 두지 말아줘."

후드녀가 허둥대며 팔을 휘휘 내저었다. 감정이 표정에 정직하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 쪽도 신입생인가요?"
"그렇지."
"그럼 친구하실래요?"
"뭐······?"


이번에는 후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표정 변화가 굉장히 두드러져서, 대화하는 것 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다시  번 자기소개할게요. 저는 율릿 백작가의 여식, 위즈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이름을 여쭤볼  있을까요?"

크으.
내가봐도 완벽한 자기소개다.
이 인삿말을, 이 몸짓을,  표정을 연습하기 위해 앨리스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가.

고개를 숙인 채 뿌듯해하는데, 후드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나는 세렌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대에게 당장 이름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이유는 입학식 이후에 설명하도록하지. 잘 부탁한다, 위즈!"


나는 세렌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검을 오래 잡은 듯 군데군데에 굳은살이 박혀 있는 거친 손이었으나,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세렌이라고 하는구나.
세렌······.

"세렌?!"
"가, 갑자기 왜 그러지?"

들어본 적이 있다.
아니, 들어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매일 보아온 이름이었다.
세렌.
정확히는, 세리나의 애칭.
백합황녀의 두 주인공 하나인, 세리나 바른의 애칭이었다.


"······세렌."
"그, 그래. 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만, 무슨 일이지?"
"세리나, 바른"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어? 어, 어떻게?!"

반응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소녀는, 세리나 바른이었다.

말 한 마디 나누는 것이 소원이었던 내가, 그녀의 손까지 잡았다.
이 세계로 빙의한 것에 대한 축복과 경애가 샘솟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슴을 채운 것은 바로 성취감이었다.
그래. 누구보다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그런 성취감.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성취감이었다.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푹신했다.
어느새 피어난 백합이 쿠션역할을 하며 나를 받아준 것 같았다.

"그, 그대는, 내가 세리나 바른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안 건가······?! 분명 옷도 평민의 것이었을 테고, 마차도 허름한 것으로 준비해왔을 터인데······!"
"저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어머니······."
"유언이라도 되는 건가?! 어째서 그렇게 아련한 표정을 짓는거지?! 그리고 이 꽃무리는 대체······!"

아무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행복함으로 표백되어버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단지, 세 가지의 실수가 아쉬울 뿐이었다.


 번째. 외모를 눈에 담자마자 세리나 바른이라는 이름을떠올리지 못한 것.

두 번째, 감히 세리나 황녀님을 후드녀 따위의 호칭으로 지칭한 것.

 번째, 세리나 황녀님을 영접하는데에 있어 목욕재계조차 하지 못한 것.

아아, 내 인생에 있어, 오점은 그 것 뿐이리라.


"위즈? 위즈 율릿?! 정신 차려라, 눈을 떠!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아아, 그래. 비록 일주일 정도였지만, 퍽 행복한 인생이었다─
꼴깍.


"위즈?! 제길, 위즈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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