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2. 로드 투 하비셜 (2)
"진유을!"
커헉.
배를 멧돼지에게 들이박히기라도 한 듯한 격통에 눈을 뜬 나는,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다.
군대를 다녀온 뒤로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는, 너무나도 안락한 나의 자취방이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배 위에서 흘러내린 물건을 집어들었다.
거의 새것같은 전공서적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냄비받침으로 잘 쓰고있던 전공서적.
"이눔시키가, 시간이 몇신데 지금까지 퍼질러자고 앉았어!"
"으어억?!"
이번엔 팔꿈치에 또 다른 전공서적이 날아들었다. 팍, 하고 모서리가 팔꿈치에 찍혀 눈물이 찔끔 나왔다.
"어, 어머니?!"
"이 웬수를 먹이려고 반찬통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내가 정신이 나갔지. 으이구, 이 화상아."
어머니였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눈물이 주륵 흘렀다.
"어머니······."
"뭐, 뭐야. 다 큰 놈이 왜 징그럽게 울어?"
"꿈을, 꾸었습니다······."
"악몽 꿨어? 그 나이에?"
"아니요, 달콤한 꿈이었습니다······."
"그럼 왜 울고 자빠졌어?"
"그건,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었으니까요······."
"이게 꿈인데?"
"······뭐요? 억?!"
달그락, 달그락.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익숙한 진동이었다. 마차 안에서 느껴졌던 희미한 진동.
프레데리카와 같이 마차를 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내 머리를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받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베개는 아니었다. 배게따위는 감히 흉내내지 못할, 인체친화적인 안락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빛을 견뎌내며 조금씩 눈을 떴다.
"으으······."
"정신을 차린 건가, 위즈 율릿!"
그리고 내가 눈을 뜨고 본 광경은.
태양보다도 더욱 빛나는 소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행이군. 그대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던 참이었어."
그녀의 얼굴은, 가까웠다.
너무나도 가까웠다.
팔을 뻗으면 뺨에 닿을 것 같을 정도로 가까웠다.
"꺄아아악!!!"
"뭣?!"
불경하다, 불경하다, 불경하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순 없었다.
신화에서도 그런 에피소드가 있지 않았던가. 태양 가까이에서 날고 싶었던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높이 날다가 추락해 죽고 말았다.
내가 이카루스가 될 수는 없었다.
태양은 적당한 거리에서 보아야 한다. 너무 가까이에 다가갔다간 그 열기에 불타버리곤 마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아래로 굴렸다. 마차바닥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나, 위즈 율릿!"
조금강한 힘으로 내 허리를 감은 세렌의 팔을 느끼자,
불경하더라도 그냥 이러고 있는게 최고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말았다.
"그대가 쓰러졌을 때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쓰러진 채 미약한 숨을 내쉬는 그대를 안아들고 교수님들이 모여계신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지. 무슨 병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 그래요?"
"다행히 이상은 없다더군. 마력이 조금 폭주했을 뿐이라고 하던걸."
내 눈 앞에서 황녀님이 웃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세 번은 승천할 정도로 기쁜 일이었으나, 나는 어금니로 볼살을 씹으면서 억지로 정신을 유지했다. 황녀님의 앞에서 쓰러져 민폐를 끼치는 짓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대는 마법을 쓸 줄 아는건가?"
"아, 이거요?"
내가 앉고있는 의자를 중심으로 피어난 백합을 손에 올려놓았다. 백합이었다. 여섯 장의 꽃잎이, 삼각형과 역삼각형을 그리며 두 겹으로 피어나 있었다.
마법이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대체 어떻게 해야 쓰는지도 잘 모르겠는 마법.
프레데리카는 그런 나를 보고 분명히 마법에 재능이 있을거라고 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조절도 잘 안 되는 마법에 의미가 있을까.
"그냥 가끔씩 저도 모르게 발동되는 마법이에요. 제가 발동하고 싶다 해서 발동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꽃이지?"
"백합이에요."
"그렇구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아름답구나. 방에 장식해놓고 싶을 정도야."
황녀님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꽃 한송이를 양 손에 들었다. 마치 황녀님의 손에서 백합이 피어난 것 만 같았다.
"고귀해요······."
"응? 아, 그렇지. 이 꽃은 고귀하다는 느낌도 가지고 있구나."
그게 아닌데.
하지만 그렇게 착각하시는 모습도 고귀합니다, 황녀님.
그렇게 내뱉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담으며, 나는 창문을 내다보았다. 광활한 초원이 주욱 펼쳐져 있는 풍경의 중앙에 에르가 산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조금 쉬는게 좋을 거다. 그대는한 번 쓰러진 몸이니 조리를 잘 해야해."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인의 일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래, 나도 조금 숨을 돌리도록 할까."
황녀님이 의자에서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그리고 팔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평퍼짐한 후드가 흘러내리며 황녀님의 몸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냈다.
"하비셜. 본래라면 그 곳에 가기 전 까지는 신분을 숨길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 고생을 하며 낡은 마차에 몸을 실었지······. 그대의 간파 덕에 훌륭하게 실패했지만말이야."
후후, 하고 황녀님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백합황녀에서 세리나 황녀는 하비셜 도착 후 나무 마차 안에서 내리며 정체를 드러낸다. 그 모습을 본 평민들은 감동하고, 귀족들도 큰 깨달음을 얻는 에피소드였는데······
뭔가 시작부터 좀 꼬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때문에 포기하신 거에요······?"
"그대의 목숨이 내 오기보다 중요한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비록 허락도 받지 못하고 그대의 마차를 얻어타는 형국이 되었지만······ 그 정도는 그대가 용서해주었으면 한다."
"다, 당연하죠!"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당치도 않다는 말을 온 몸으로 표현하자, 황녀님이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마차 의자에 완전히 엎드리며 고개만을 내 쪽으로 향했다.
금발 머리카락이 황녀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차 창문에서 내리쬐는 빛이 황녀님의 하얀 피부를 빛내었다.
"그대가 말했지."
"네?"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이야."
"그, 그랬지만요······ 그때는 황녀님인 줄 몰랐고! 그랬다면 그렇게 함부로 손을 내밀지 않았을 텐데!"
내가 황망히 고개를 숙이자, 일순간 황녀님이 말을 멈추었다.
침묵이 계속되자, 나는 조금 고개를 들어 황녀님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슬픔에 잠긴 듯 한 얼굴이었다. 고운 미간이 살짝 접혔고, 속눈썹은 짙게 내려앉았으며, 입은 앙 다문채 할 말을 꺼내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대는."
"네, 네?"
침묵을 깨고 황녀님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황녀인 나와는 친교를 맺을 생각이 없는건가?"
"아니, 저, 그게."
내가 당황해서 다시 고개를 숙이자,황녀님은 조용히 읆조리듯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아바마마께서 말씀해주신 하비셜은 너무나도 멋진 곳이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우정을 쌓으며, 친우와 같은 밥을 먹는, 그런 곳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네 살 때부터 검을 잡았지. 그래서인지 귀족 가의 영애들과 잘어울리지 못했다. 친우라는 것을 만들어보기위해 노력해본 적은 있었지만, 사교계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어. 열 살 이후로 나는 사교계로의 발걸음을 끊었고, 그래서 귀족 가의 자제들도 나의 얼굴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알고 있었다.
백합황녀의 중반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왔던내용이었다.
"그 덕분에 나에게는 친우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다. 검을 잡을 때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검을 놓고 잠을 청할 때는 문득 외로워 고개를 떨구었지.
그럴 때 마다 생각하곤 했다. 하비셜에 간다면, 친우를 사귈 수 있을까. 아바마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처럼, 수 많은 이들과 우애를나눌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 나에게 첫 친우가 생기려 했건만······ 황녀라는 직책이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마는가."
황녀님은 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만, 황녀님이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으.
뭐하고 있는거야, 나란 인간은.
황녀님이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고작 황송하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그래서야 백합황녀를 사랑해 머지 않았던 진유을의 이름이 울 것이다.
"아니에요, 황녀님."
나는 가슴팍에 양손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황녀님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위즈?"
슬픈 눈이었다.
아름다운 눈이었으나, 보고싶지 않은 눈이었다.
황녀님은 행복해야 했다. 저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됐다.
"저는 황녀님을 알지 못했어요. 그 상태에서 친구가 되어달라고, 주제넘는 부탁을 했지요."
"······그런가.역시 그대는 황녀인 나와는 친교를 맺을 생각이─"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뭐?"
"저는 황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황녀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을 눈에 담았고, 황녀님의 생각을 들었어요."
나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뒤, 한 차례 숨을 가다듬었다.
황녀님께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황송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황녀님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저는 이제 조금이나마 황녀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아까의 요청은 취소할게요."
"그렇다면─"
황녀님이 입을 벌리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나는 그런 황녀님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새로운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저와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나요?"
황녀님은 잠시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올렸다.
닿아도 될지 고민하는듯 한 손길이었다. 머뭇거리며, 조금 손이 닿으면 화들짝 놀라 굳어버리는 황녀님의 손.
나는 팔을 뻗어 황녀님의 손을 잡았다.
검을 오랫동안 잡아온 그녀의손은 조금 거칠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따스한 온기가 이어지듯 전해져왔다.
"이걸로 친구 된 거, 맞죠?"
"······그래. 그렇구나. 우리는 친우가 되었어."
황녀님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엷게 웃음을 터뜨렸다.
배시시 웃는 황녀님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아하하, 그런가. 친교를 맺는 일은 이다지도 쉬운 일이었나."
황녀님은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탈함과 감탄, 그리고 기쁨이 섞여있는, 그런 목소리가 황녀님의 고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하비셜로 가는 길. 대초원의 광활한 평야 아래에서, 나는 세리나 황녀님과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