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2. 로드 투 하비셜 (3)
에르가 산이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마차가 진로를 틀어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었다.
"곧 페렐른에 도착하겠구나."
황녀님이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을 담은 듯 한 푸른 눈동자에 부풀어오른 기대가 비쳤다.
나는 황녀님을 따라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길게 늘어진 에르가 산의 그림자 끝자락에 언뜻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집결지, 페렐른이 눈 앞에 펼쳐졌다.
패렐른은 페르그 대초원의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다. 서쪽의 바른 제국과 동쪽의 리베른 제국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며, 북쪽으로는 하비셜과 연결되어 있기도 한 중립지대. 그 지리적 특성 탓에 상업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있는 곳이다.
이 곳에 사는 주민들은 리베른과 바른 그 어느쪽에도 속해있지 않으며, 하비셜의 보호 아래에서 중개업과 숙박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양 제국에서 운반되어오는 다양한 특산물들과 하비셜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마도구의 시제품들 덕에 날로 덩치를 키우고 있는 상업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신입생에게 있어서는 가장 긴장되면서도 기대되는 곳이었다.
"리베른 제국의 아이들은 어떨까. 그대처럼 친우가 될 수 있을까?"
리베른과 바른. 양국의 아이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가 바로 페렐른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죠!"
"상당히 자신에 찬 대답이구나······."
내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황녀님이 살짝 놀란 것 처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확신하냐는 듯 한 눈빛이었다.
······백합황녀에서봤다고 할 수 도 없고, 이거 참.
"리베른의 아이들과 황녀님은 좋은 인연을 맺을거에요. 분명히요!"
그래서 나는 황녀님의 질문을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그러자 황녀님은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와 황녀님을 태운 마차가 멈췄다. 대저택보다도 거대한 여관 옆의 마차보관소였다. 길과 가까워, 한달음에 거리로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하루를 묵는 모양이었다. 옆에서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내리도록 하자꾸나."
황녀님이 후드를 뒤집어 쓰곤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멀게만 느껴졌던 페렐른의 소란스러움이 화악하고 내 몸을 덮쳤다.
목소리를 높여 흥정하는 상인과 고객의 말다툼소리. 마차가 덜컥덜컥 움직이는 진동과 일 도중의 시원한 한 잔을 즐기는 함성. 그리고, 그 풍경에 눈을 빛내는 아이들의 감탄까지.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몸이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두 다리로 페렐른을 돌아다니며 두 눈에 그 모습을 담고 싶었다.
마차에서내린 황녀님이 내게 팔을 내밀었다. 싱긋 웃으며 내미는 그녀의 손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순간 넋을 잃고 몸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멈춰있자, 황녀님이 문득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성큼 다가와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 감촉에 번뜩 눈을 뜬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화, 황녀님?!"
"늑장을 부리면, 잡아가는 수 밖에 없지."
그 말과 함께 황녀님은 다른 손으로 무릎뒤를 받친 뒤,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힘든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손쉽게 마차에서 들어올려졌다.
"페렐른의 안에서는 세렌으로 부르거라. 아직 내 신분을 보일 생각은 없으니······."
나를 안아든 황녀님이 미소를 입에 담았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가, 가, 같은 방을 쓰시겠다구요?!"
"······혹시 싫은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황녀님이 눈을 내리깔며 시무룩해지자,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굴렸다. 그러자 황녀님이 눈을 크게 뜨더니, 기쁨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그대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세요! 아니, 해 주세요!"
에잇, 모르겠다. 그냥 우리 황녀님 하고싶은거 다 하세요.
방열쇠를 받고 나온 우리는 길거리로 나섰다. 왁자지껄한 거리 아래에, 신입생들을 끌어모으려는 상인들의 호객행위가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비셜 학생들의 필수품, 깃털 붓펜 팝니다!"
"마정석 잉크 통 팝니다!"
"어서오세요, 온갖 자습서가 이 곳에 있습니다!"
학생들이 상인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도구잡화점으로, 레스토랑으로, 서점으로 홀린 듯 따라가는 학생들. 과연 상인들의 집결지라 불리는 곳이었다. 호객하는 스킬이 장난 아니었다.
나는 기대에 부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판타지 세게에서호객을 받아보고 싶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쥐어주신 용돈도 있으니까, 그걸로 황녀님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황녀님께 귀여운 옷도 입혀보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어째, 저희 주위가 좀 비어있는 것 같지 않아요?"
아무리 상인들의 주위를얼쩡거려보아도, 나에게는 어떤 호객행위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가?"
"하지만, 뭔가 시선을 피하는 기분이 드는데요."
"으음······ 기, 기분탓일 거다.
황녀님이 우물거리며 말을 피했다. 뭔가, 짐작가는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호객인가? 드디어 호객을 받는건가?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예?"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경장을 착용한 경비병이었다.
"낡은 후드를 뒤집어 쓴 수상한 사람이 꼬마 소녀를 유괴하고 있다는 민원이 들어와서요. 협조 바랍니다."
"유, 유괴라니?! 누가 그런 행동을 하는가······!"
황녀님이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좁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용의자입니다. 지구대까지 따라오시죠."
"뭐, 뭐라······!"
경비병의 재촉에, 일순간 할 말을 잃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저 바라보셔도 몰라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내 복장 때문에 오해를 사고 말았어······."
"아니에요, 황녀님은 잘못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일엔 누구의 잘못도 없었다. 다만 오해가 겹쳐져 생긴 헤프닝일 뿐이었다.
그것 때문에 시간은 벌써 저녁에 가까워졌지만. 나는 조금 출출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황녀님과 내가 겪게 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열 살 남짓 되어보이는 꼬마아이가 후드를 뒤집어 쓴 수상한 사람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을 한 상인이 발견했다.
꼬마아이의 옷은 굉장히 고급스러워, 한 눈에 보아도 부잣집 딸로 보였다. 하지만 후드를 뒤집어 쓴 쪽은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평민들조차 잘 입지 않을 헤져 있는 옷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상인은 그럴듯한 결론을 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아이를, 수상한 남자가 마을 밖으로 유인해 유괴하려 하고 있다는 결론을 말이다.
그래서 이 꼴이 된 것이었다. 마차로 돌아가 하비셜의 신입생임을 증명하는 증표를 보이기 전 까지, 나는 부모님의 손을 놓쳐버린 미아 취급을 받았고, 황녀님은 비열한 유괴범 취급을 받았다.
감히 세리나 황녀님을 유괴범 취급하다니.
사실 세리나 황녀님이 유괴하신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긴 했지만.
뭐 어쨌든.
"옷부터 새로 입어요, 세렌 님."
"······그래.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
황녀님이 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면 되는 것을, 그대는 왜 굳이 내게 치마를 입히려 드는건가?!"
"드레스에 대한 강의를 세뇌받듯 머리에 저장한 보람이 있네요! 자아, 황녀님께 어울리는 가을 나들이용 워킹 드레스입니다!"
"안 된다! 그런 치렁치렁한 치마 따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어머머, 손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손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데! 분명 어울리실 거에요!"
"점원 분도 그렇게 이야기 하시잖아요! 혹시 입기 힘드신가요? 제가 입혀드릴까요?!"
"호, 혼자 입겠다!"
황녀님이 머뭇머뭇하다, 이내 드레스를 들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용성이 중시된 워킹드레스이니 만큼, 혼자서 입기엔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분명 어울리겠죠?"
옆에서 황녀님을 같이 기다리고 있는 점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점원이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손님의 일행분께선, 저희 필레아 의류점 역사상 세 손가락에 드는 아름다운 손님이십니다. 필레아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최고의 옷을 입혀드리겠어요."
"그렇죠?! 당연한 거죠?! 세렌 님이 예쁜 건 누구나 공감할 만 한 일이죠?!
"네. 기회만 된다면 우리 필레아의 모든 옷을 입혀보고 싶을 정도로요."
역시 이 점원은 굉장히 좋은사람이었다. 가게를 잘 들어왔어.
음, 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탈의실의 문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탈의실의 커튼이 걷히고, 황녀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간, 세상이 멈춘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후드에 숨겨져 있던 황금빛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그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목덜미를 가볍게 두른 푸른 스카프는 황녀님의 눈동자와 맞물려 시원한 느낌을 주었고, 그 아래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내리고 있는 짙푸른 자켓은 가슴까지 단추를 채우고 있는 상태였는데, 자켓 아래에서도 희미하게 드러나는 볼륨은 아무리 두꺼운 옷이라도 황녀님의 몸을 감추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선명히 전하고 있었다.
무릎이 살짝 드러나 있는 원피스는 자켓의 아래로부터 시작되어 황녀님의 무릎까지를 덮고 있었다. 하얀색 드레스는 황녀님의 하얀 피부와 맞물려 꼭 태어날 때 입고 나온 듯 한 자연스러움을 연출했다.
"······점장님, 저는 이 날을 위해서 옷을 만들고 있었던 거에요."
옆의 점원은 감격스러운 듯 눈가에 물기를 촉촉히 흩뿌렸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황녀님이 옷을 갈아입자, 눈길 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던 상인들이 앞다투어 황녀님께 호객을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도"언니 따라 왔니?" 라며 사탕 따위를 권유하는 상인들이 생기기 시작헀다.
음, 음. 그렇지. 보았느냐, 우매한 상인들아. 우리 세리나 황녀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선이 부담스럽구나."
"세렌 님이 아름다우셔서 그래요!"
"그렇다고 해도, 이건궁에 있을 때와 별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하비셜에서 만큼은 평범하게 지내보고 싶었거늘······."
살짝 지친 목소리였다. 이거이거, 어디 식당에라도 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어머. 실례."
"죄, 죄송해요!"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나와 몸을 부딪힌 사람도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고급스러운 보라색 로브를 입은 채,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디인가 신비스러운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요. 저 분이랑 몸을 부딪혀서······."
"그런가. 다친 곳은 없는가?"
"괜찮아요!"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황녀님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부딪힌 소녀는그런 황녀님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음?"
황녀님이 소녀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로브의 모자 아래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입술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인사한 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뭔가, 그 뒤를 잡고싶은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어, 이상한 기분이었다.